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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철 칼럼】 敎會-권징이 사라진 교회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작금의 교회는 주님이 머리신가?

지금 주님이 오신다면 교회로 향하신다. 노회, 지방회, 총회 할 것 없이 지상교회의 모든 모임들을 하나로 묶어 대총회를 소집하신다. WCC를 비롯한 세계적 모임들이 토론 끝에 합의해서 유일한 기독교 대총회가 결성되고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가 수천 년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한 교회일치를 위해 손수 정치 일선에 나서신다. 지상교회를 제대로 갱신시키고자 총회장 후보로 나서신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이시기에 신실한 모든 교회들은 주님이 당연히 단독후보일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예상 외로 후보자가 난립한다.

북극 집회의 높은 산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려던 루시퍼처럼 사탄은 자신의 대리자들을 대륙별로 선정하여 주님의 대항마로 출마시킨다. 의외의 복병이다. 오대양 육대주를 대표한 여섯 명의 후보가 나선다. 아시아 대표에는 한국교회의 정치 9단으로 유명한 모 목사가 나선다. 그는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주님과 겨루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후대의 족보에 기록되리라 흥분하여 후보 출마를 수락한다. 역사적인 투표는 진행되고 결과는 주님이 과반수 득표에 실패한다. 콘클라베 굴뚝의 검은 연기처럼 투표는 끝도 없이 진행된다. 결국 후보를 사퇴하신 주님은 재림의 길을 택하신다. 권징을 행사하시기 위해서다.

사랑과 은혜가 난무하면 거룩과 일치가 사라져

현대교회는 징계를 남발하여 교회가 약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징계를 적절히 행사하지 못함으로 교회는 더 아름답고 본질적인 사랑과 은혜, 거룩과 일치의 힘 또한 잃어버렸다. 징계를 포기하면 남는 것은 사랑이나 은혜가 아니다. 사랑도 사라지고 은혜도 훼손된다. 사랑을 더욱 사랑답게 만들고 은혜를 더욱 은혜스럽게 만들려면 징계의 칼끝은 예리해야 한다. 법은 거룩과 사랑보다 하위의 가치다. 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을 행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이다.

사랑과 은혜란 말을 적당히 섞어가며 온갖 탈법과 불법을 자행하고 비법과 초법을 내세우는 와중에 사랑공동체는 무법천지가 되어버린다. 사랑하려면, 은혜를 바란다면 법을 먼저 지켜 행해야 한다. 온전히 거룩하지 못하고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기에 최소한의 기준으로 교회는 법을 세웠다. 그 법마저 준수하지 않고 도외시해버린다면 기독교적 실천 가치인 거룩과 사랑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될 수가 없다. 법을 어긴 자에 대한 징계는 법을 세우기 위함에 앞서 사랑을 수호하기 위함이다. 법과 공의에 근거한 권징이 사랑을 지킨다.

권징이 사라지면 영적 권위도 사라져

권징이 사라지면 덕과 사랑이 남아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다. 권징이 사라지면 덕은 숨고 사랑도 자취를 감춘다. 권징과 사랑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사죄공동체인 교회는 교회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늘 자기해부에 철저해야 한다. 죄가 스치면 내부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권징의 두루 도는 화염검을 뽑아야 한다. 권징을 행하는 기관은 당회, 지방회(노회), 총회가 있다. 이 기관들은 일반교인들과 지도자들을 그리스도의 규범 안에 바로 세우기 위한 조직이다. 권징을 행사하는 기관에는 권위가 주어졌다. 이 권위는 행정적 권위지만 뿌리는 엄연히 영적 권위에 있다.

다시 말해 영적 권위가 있어야 행정적 권위 행사에 무리가 없다. 한국교회의 고질적 병폐는 영적 권위 없이 행사하는 행정적 권위, 아예 권징을 포기하는 무기력함이다. 제 눈에 들보 박힌 자가 상대의 눈에서 티끌 빼려는 행태를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징계 대상자가 힘이 있으면 징계안에 딴전을 피우거나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 징계 대상자가 힘이 없거나 사감(私感)이라도 있으면 구색을 갖추어 직격탄을 날린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권징의 능력이 사라져 몸살을 앓는다. 권징 조항은 있지만 실행 의지나 담력이 없다. 서로 눈치만 볼 뿐이다.

성경적 권징과 반(反)성경적 권징

성경적인 권징을 행하면 누가 탓하랴?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권징을 행하면서 성경을 들이댄다. 모두가 성경을 방패막이로 자신의 입장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긴다. 아전인수가 따로 없다. 교회정치의 난장판에는 양심도 없고 인정도 없다. 은원은 정치판도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하고 선후배 관계는 실종신고 처리되어 아직껏 오리무중이다. 목양정신이 사라졌다. 기도와 회개를 외치면 동물원의 원숭이나 원시인 보듯 한다. 관용과 양보를 말하면 정신 나간 수준으로 취급된다.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있냐? 는 생뚱맞은 표정이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다. 개판이라 떠드는 통에 모욕을 당했다며 세상의 모든 개들까지 짖어댄다.

개혁은 교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개혁을 거부하는 한국교회는 세상에 회개를 외칠 자격이 없다. 신자들의 변화를 다그치기 전에 목사, 장로들부터 변해야 한다. 변혁 정도로는 되지 않는다. 부셔야 한다. 할 수 있다면 성직부터 모두 박탈해야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난날의 신학교 수준은 잊어버리고 몇 십 배, 몇 백 배의 강도로 강훈련에 돌입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면 나부터 목사 가운을 훌훌 벗어버리고 지옥보다 두려운 그 훈련의 선봉에 서고 싶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교회 앞을 가로막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남들마저 못 들어가게 하는 꼴통들을 때려잡으리라!

이단도 권징 못하는 변질된 교회

이단의 수괴급 인사들이 교세를 앞세워 소위 복음주의적 교단의 안전지대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늘 있어왔다. 이단의 조무래기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을 그들은 시도한다. 지난 사례들을 통해 우여곡절을 겪긴 해도 성공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교세 확장과 함께 이름이 알려지고 세간의 관심을 끌만한 모임에 적극 참여하면서 대중들의 인지도도 높이고 경계심도 느슨하게 만든다. 왜일까? 그렇게 해선 안 될 사람들이, 알 만한 사람들이 그들을 이단의 족쇄에서 풀어주려 어째서 안달일까? 무슨 흑막이라도 있는 것일까? 폐일언하고 이단은 이단이다. 성형을 하고 양의 울음 흉내를 내어도 이리는 이리다. 이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포용이 아니라 배격이다. 교단 내에 있으면 교단법에 따라 권징이 시행되겠지만 독자 행보를 주로 고집하는 이단의 괴수들은 권징이 현실적으로 불가하므로 영적 권징이라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이단 해제라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교회도 많지만 목사는 더 많다. 목사의 검증 제도가 필요하다. 신학교를 졸업할 때,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다진 그 각오와 신념이 유지 발전된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퇴행되고 변색된다는 현실이다. 목사 자신을 위해 안수부터 은퇴까지 목사다움을 강화시키는 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명이나 소명 없이 목사가 되었든지, 목회 도중에 적성이 맞지 않든지, 목사의 기준에서 벗어나 파행을 일삼는다면 목사직을 반납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그것이 교회와 교인들을 위하는 일이요 주님을 위한 일이다. 몇 년에 한 번씩 천국의 용사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지옥훈련 코스가 있었으면 좋겠다.

자비를 구하기 전에 악함을 회개하라

강장 밑에 약졸 없다. 우리 주님은 약장이 아니시다. 강철 명장이시다. 동시에 신학교를 줄여야 한다. 무허가 정도가 아니라 목사와 박사를 양산하는 악의 축들을 박살내야 한다. 엉터리 신학교는 한국에도 많고 미국에도 많고 전 세계에 그득하다. 모여든 학생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문제는 가르치는 교수들의 면면이다. 학문적 능력은 고사하고 그들의 도덕적, 영적 수준을 알면 까무러칠 노릇이다. 지옥이 만원사례를 할 수 없는 이유는 계속 확장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풀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자! 옷을 찢기 전에 마음을 찢고 사람 앞에 엎디기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 전에 우리의 악함을 회개하자! 세상의 개벽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를 삼키는 내 죄를 무서워하여 떨며 애통하자! 정죄의 마음도 접고 비판의 화살도 꺾은 채 자신의 가슴이 패이도록 두드리고 두들기자. 그대는 혹시 회개란 말에 이맛살부터 찌푸려지지는 않는가? 하도 많이 들어서 이골이 났으니 말이다. 아무리 많이 들으면 무엇 하나?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했다면 죽을 때까지 들어도 모자란 것이 회개의 명령이다.

회개는 부탁이 아닌 명령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를 사정하지 않으신다. 회개는 명령이다. 순종하지 않으면 엄연히 죄가 된다. 우리에게 회개를 명하시는 것은 돌이킬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해서다. 돌이키지 않으면 영멸의 형벌이 있을 뿐이다. 진실한 회개의 눈물 한 방울의 힘은 대단하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헌신이나 사역상의 업적이 아니다. 하나님을 등졌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안겨드는 회개의 동작이다. 하늘의 천사들도 함께 기뻐한다, 오죽하면 회개한 한 영혼을 위해 하늘에서 잔치까지 배설할까? 회개로 나를 버려 나를 얻자!

비바람을 피해 찾은 처마 밑에서 독사를 만났다면 잡아야 한다. 꼬리를 잡지 말고 머리통을 짓밟아야 한다. 독사를 피하려고 밖에 나가면 거센 비바람을 맞는다. 우리 안에 도사린 독사는 쉬 죽지 않는다. 혈관에 섞여든 독액이 신경을 마비시키고 불같은 고통을 수반하면서 목숨을 앗아간다.

주님의 징계 전에 스스로 채찍을 들자

에덴동산에서 첫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이미 맹독사에게 물렸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은 불뱀에 물리기 전에 이미 원망의 독사에게 물렸다. 옛 뱀이라 불리는 사탄은 인류역사상 가장 무서운 독을 지닌 맹독사 중의 맹독사다. 모든 인류에게 저주와 죽음의 고통을 안겨 주었으니 그 가공할 파괴력을 새삼 말해 무엇 하랴?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그 상태가 어떠하든지 모두 소생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은 광야에 높이 들린 놋뱀이셨다.

징계가 이르기 전에 우리에게 들린 징계의 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러야 한다. 자신에게 가하는 채찍 소리가 제일 커야 한다. 약자를 징계하기에 서둘렀고 강자를 징계하기에 머뭇거렸던 우리의 얄팍한 타협정신을 후려 패야 한다. 값싼 은혜에 안주하며 뼈아픈 회개에 몸서리쳤던 우리의 안일무사를 내리쳐야 한다. 교회에 권징이 사라졌으면 우리에게서 권징의 성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사랑의 아버지를 읊조리면서 공의로우신 아버지 모습을 거세함으로 하나님을 마치 반신상처럼 만들어버린 무지몽매함을 찍어 눌러야 한다. 직무를 포기하고 귀향했던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을 다시 불러 복귀시켰던 느헤미야처럼 꼭꼭 숨어버린 권징을 찾아내 본래의 자리로 돌이켜야 한다. 최후의 권징이 될 마지막 심판은 상상만 해도 너무 두렵다. 권징을 이기고 자랑할 그날의 남은 자, 피하여 숨은 자가 되기 위해 오늘 나는 권징을 사모한다.

 

 

 

한명철 목사  jesuspoin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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