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종교개혁운동 시리즈 -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 구원

임태수 박사

6) 갈라디아서 5:16-26

갈라디아서 5:16-23에서도 두 종류의 믿음을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믿음 즉 행함 없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열매가 있는 믿음 즉 행함 있는 믿음이다.

행함 없는 믿음: 바울은 19-21a절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믿음 즉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하여 경고한다. 여기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에 속한 사람들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갈라디아서의 대상은 갈라디아교회의 교인들이다(1:2; 3:2; 4:811,28,31; 5:2,7,10).

갈라디아서 5:13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다.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자유를 얻은 기독교인들이다. 그런데 그 교인들이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을 수 있는”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자유를 얻은 기독교인들이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를 삼아 범죄하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서 보고 듣는다. 유감스럽지만 이것은 사실이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사실이다. 바울은 19-21a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믿음 즉 행함 없는 믿음의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15가지를 열거한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기독교인들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하여 바울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21bc에서 단호하게 말한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왜 이런 사람들이 믿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지 못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믿음은 ‘행함 없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행함 있는 믿음: 바울은 22-23절에서 성령의 열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9가지를 말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9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는 믿음이 행함 있는 믿음이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려는 요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믿음 즉 ‘행함 없는 믿음’과,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열매가 있는 믿음 즉 ‘행함 있는 믿음’이다. ‘행함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고, 후자는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7) 야고보서 2:14-26

야고보서 2:14-26에서 야고보는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는 ‘행함 있는 믿음’이요, 다른 하나는 ‘행함 없는 믿음’이다.

행함 없는 믿음: 14절에서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질문한다. 그 대답은 당연히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는 능히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이다. 15-17절에서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의 허구성을 아래와 같이 고발한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7절에서 야고보는“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20절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하고, 26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행함 있는 믿음: 야고보는 21-25절에서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먼저 행함 있는 믿음의 예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든다. 23절에서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 창세기 15:6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21-22절에서 야고보는 이 아브라함이 믿음만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행함도 겸비한 사람임을 이삭 제사를 들어 아래와 같이 입증한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만약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는 이삭을 제사로 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삭을 제사로 드리는 행함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함은 서로 보완해주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믿음과 행함 가운데 어느 하나만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치므로(21절)“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23절에서 말한다. ‘이루어졌다’는 헬라어 pleroō는 “성취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성취되다’의 본래의 의미는 ‘가득 채우다’(fulfill)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믿음만으로는 가득차지 않았는데, 행함이 더해짐으로써 가득차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로소 완전하게 되고 온전해졌다는 뜻이다. 믿음만으로는 가득차지 않고 행함이 더해질 때 비로소 가득차게 되고 온전하게 되고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행함의 예를 든 다음 야고보는 24절에서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야고보서 2:14-26에서 두 종류의 믿음 즉 ‘행함 없는 믿음’과 ‘행함 있는 믿음’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전자의 ‘행함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행함 있는 믿음’으로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결론이다.

이상에서의 사례들 외에도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한 성구들은 신약에 많이 있지만 이상의 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의 예는 들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 구약에서 두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8) 이사야 1:10-20

구약에서도 두 종류의 믿음 즉 행함 있는 믿음과 행함 없는 믿음의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이사야 1:10-17과 아모스 5:21-24 두 곳의 예만을 들고자 한다.

먼저 이사야 1:10-17에 나타난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자. 10-15절에서 이사야가 말하는 대상은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다. 여기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 전체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사야는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행함 없는 믿음: 먼저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10-15절에서 이사야는 믿음은 있되 행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서 이사야가 대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므로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 무수한 제물을 가져옴(11,13절)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옴(12절)

하나님 앞에 분향함(13절)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임(13절)

하나님께 손을 펴고 많이 기도함(15절)

그들은 안식일과 월삭을 지키고, 많은 제물을 바쳐 제사드리며, 분향하고, 많이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그들의 종교행위로 볼 때 그들은 열심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무수한 제물이 유익하지 않으며(11절), 그들의 번제와 짐승의 기름과 피를 기뻐하지 않으며(11절),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며 분향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을 하나님이 견디지 못하며(13절), 그들의 월삭과 절기를 싫어하며, 그것이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요 지기에 곤비하며(14절), 그들이 손을 펼 때에 하나님이 눈을 가리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겠다(15절) 하셨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15절). 피를 흘린다는 말은 사람들을 때리고 죽인다는 말이다. 이사야는 59:3-8에서 피를 흘리는 일이 어떤 것들인가를 자세히 말한다.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1:15의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말은 59:3-8에 말하는 갖가지 범죄를 하는 일들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고,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는 이유가 바로 59:3-8에서 말하는 피흘리는 일로 상징되는 여러 가지 죄를 범하기 때문이라고 사 59:1-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1:10-15절에서 말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즉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 주위에 이런 신앙인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것이 이사야가 줄기차게 외치는 예언의 메시지다.

행함 있는 믿음: 다음으로 1:16-17절에서는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하여 말한다. 16-17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믿음에 합당한 행함을 다음과 같이 요구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먼저 요구하시는 행함은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는” (15절) 회개를 하는 일이다. 잘못을 회개하지 않고 올바른 행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함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남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말한다. 이것이 행함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런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18-19절에서 약속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면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주시고,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수 있게 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사야 1:10-19에서 우리는 행함 없는 믿음과 행함 있는 믿음을 보았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믿음 은 행함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행함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수 있는”(19절) 복과 은총이 주어지고, 행함 없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칼에 삼켜지는”(20절) 저주와 심판이 주어진다.

 

9) 아모스 5:4-27

아모스 5:4-27에 나타난 두 종류의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자. 4-27절에서 아모스가 말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족속(5:1-4,25)이다. 여기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벧엘, 길갈, 브엘세바 등 성소를 찾아가서(5절) 절기와 성회들을 지키며,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며(18절), 번제, 소제, 화목제를 드리는 자들이다(21-22절). 그들이 이런 종교행위를 하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은 열심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4-27절에 두 종류의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행함 없는 믿음: 먼저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자. 4-27절에서 아모스는 믿음은 있되 행함이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서 아모스가 대상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므로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분명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다(5,18,21-22절).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5a절)고 하시면서(암 4:4-5 참고) “길갈은 반드시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비참하게 될 것”(5b절)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18-19절) 라고 재앙을 선포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1-22절)고 하셨으며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27절)고 심판을 선언하셨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7절)이고, 그들이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고”(10절), “힘없는 자를 밟고 그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거두고”(11a절), "허물이 많고 죄악이 무겁고...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들”(12절) 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믿음은 있지만 악을 행하는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심판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행함 있는 믿음: 다음으로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하여 알아보자. 벧엘, 길갈, 브엘세바를 찾으면서 범죄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4절에서는“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하고, 6절에서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한다. 여화와를 찾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구체적인 내용이 14절과 24절에 나타나 있다.

14절은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24절에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것”과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하면 위에서 말한 악을 행하지 않고, 그 대신에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행함 있는 믿음이요, 이렇게 하는 사람들은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4,6절).

믿음은 있되 행함이 없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죽게 되고(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고),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살게 된다(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 5:4-27절에서 아모스가 말한 예언의 내용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믿음에는 ‘행함 있는 믿음’과 ‘행함 없는 믿음’이 있다. 행함 있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지만, 행함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은 행함 있는 믿음과 행함 없는 믿음을 구별하지 않고, 행함 있는 믿음뿐만 아니라 행함 없는 믿음에도 구원을 보장해주는 구원론이다. 이 구원론은 위에서 살펴본 성경의 진리와는 배치되는 구원론이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은,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의 믿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행함 있는 믿음인지,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행함 없는 믿음인지를 검토해보지 않고 교회 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니,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행함 없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믿음으로만 구원’이 라는 잘못된 구원론을 하루 속히 시정하고,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올바른 성경인 구원론을 가져야 할 것이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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