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120) - 에스겔(12)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부회장 KC대 전 총장

 

선지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공동체, 이스라엘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겔33:33)

예언자는 항상 이스라엘 사회에서 중심에 선 존재였다. 누가 예언자(나비)인가, 누가 자신들의 선지자(로에)이며 선견자(호제)인가? 이스라엘은 이를 파악하여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공동체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존재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고 있다. 에스겔의 소명은 그 환상 속에서 북쪽에서 오는 맹렬한 구름에서 보인다. 그 구름 속에서 네 개의 날개를 가진 짐승들(각기 네 면에 사람의 얼굴, 사자와 소, 독구리의 얼굴)이 있고, 그 얼굴들은 그들의 머리 위에 수정 같은 둥근 천장(궁륭穹窿)으로 옮겨가며 빛나는 얼굴이 보좌에 앉은 인간의 형태와 같았다. 그 모양은 주의 영광과 같은 형상이라 말한다.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겔1:5).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8).

하나님의 보좌가 다윗·솔로몬 시대 이래로 시온에 굳게 고정되었는데 여기서는 바퀴가 있어서 움직이고 있다.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겔1:15). 하나님의 현존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 땅, 이방의 땅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개념이 형성되고 있다. 또 움직이시는 하나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편재(遍在)성을 보여준다. 그 포로의 땅이 부정한 땅(겔4:13)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말한다.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 너의 형제 곧 너의 형제와 친속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겔112:15).

세상에서는 왕따, 하나님과는 동행자인 선지자

에스겔의 비전과 환상은 예언자의 사명을 준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선지자로 보내노라”(2:3). 에스겔의 반응은 이전에 선지자보다 더 우호적으로 기대되지 않았다. 그들이 듣는지 아니 듣든지(그들이 반역한 집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예언자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에 선지가 있는 줄은 알지니라”(겔1:5). 선지가가 활동하던 시대에 사람들은 그 선지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의 선지자를 거짓 선지자처럼 여기고 자신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자신의 틀에 맞지 않으면 들으려 하지 않는 완고하고 고집 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겔33:32). 그저 아름다운 소리, 사랑의 노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선지자의 소리를 듣고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고 준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수없이 많이 퍼지는 동영상 설교의 시대에 취향에 맞는 하나님의 소리, 설교를 듣고 그 소리에 중독되어 가는 현상이 편만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진정한 하나님의 소리를 분별하는 것은 무엇일까? 성서의 나타난 예언자, 참 선지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회의에 참여한 선지자였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서 이르신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집은 반역한 집처럼 완전히 책임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예언의 선포와 예고가 과거의 회고에만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에스겔은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반대하며 저항하기 위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말고 그 말을 두려워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말지어다”(겔2:6).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다니엘이나 욥, 노아같이 세상에서는 왕따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즉 그는 외로운 존재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임을 자처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고독한 단독자로 살아가는 연습을 많이 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사야 예언자(사6장)나 예레미야 예언자(렘1:17)의 소명처럼 환상의 체험을 가지고 두루마리 말씀을 먹는 상징적 행동은 하나님의 소명의 특이한 현상이며 오늘도 이러한 하나님 말씀을 먹는 작업을 통해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에스겔도 양면에 있는 두루마리 말씀을 먹는 체험을 한다. “탄식과 애가의 말씀을 기록하라 저주로다.” 그 말씀이 꿀처럼 달았다고 한다(겔2:8-3:3).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요12:28,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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