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공공성은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하는데서 비롯

지난 7월 4일, 부산 중앙교회당에서는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과 <부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13회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 회복을 위한 부산포럼이 열렸다. 이 발제문은 당일 포럼의 발제자로 나선 이헌주 목사(교회 2.0 목회자운동 총무)의 글이다. 지면 관계상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1. 좌표를 설정하기 ; 나는 개혁주의 목사인가?

‘길’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가? 길을 잃게 된 사람은 당황한 가운데 자꾸 어딘가로 나아가려고 한다. 앞에 난 길을 따라 무조건 걷는 것이다. 그 길이 어떠한지 고려하지 않는다. 단지 지금의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생각과 두려운 마음에 무작정 걷는다. 하지만 그것은 좋은 방법일 수 없다. 길을 잃었을 때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독도법’이라는 것이 있다.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을 들어 보았을 단어다. 낯선 지형에서도 지도 한 장과 나침반을 가지고 주변을 이해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길을 잃었을 때 지도와 나침반으로 길을 찾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은 내가 지도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다. 나의 위치를 지도 위에서 찾아낼 때에야 비로소 다음 작업이 진행될 수 있다. 앞의 언덕으로 올라가야 할지, 강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 것인지, 막다른 길과 계곡은 어디인지, 회피할 길은 어디이며, 어디로 가야 안전한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단지 일상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뿐만이 아니다. 삶의 중요한 분기점에서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이든, 신앙의 문제이든 혹은 신학의문제이든 먼저는 지금 나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에서 시작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기독 신앙의 공공성’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다루면서, 특히 이 땅에서 일어나는 ‘고통’이라는 주제를 살펴 볼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지금 나의 신학과 신앙의 좌표를 설정해주는 작업에서 시작하는 것이 주요해 보인다.

1.1. 개혁주의 목사로 살아가는 것

나 스스로를 규정하면서 과연 어떤 시금석으로 판단해 볼 수 있을까? 누구든 개신교의 목사라고 한다면, ‘종교개혁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는 다 동의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했던 신학과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적극 동의한다. ‘5 solas’라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은 과거에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대와 지역, 문화에 따라서 표현의 방식이 다를 수는 있을지언정 그 내용과 가치에 대해서 우리는 강하게 동의한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의 큰 준거점으로 우리 스스로를 규정하고 이런 가치에 우리가 성실한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성실’이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신학적, 교리적 동의와 깊은 이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의 총량으로서만 그의 신학함과 신앙함의 모든 것을 유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이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삶의 기준과 권위가 바로 성경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삶은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로 말미암는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가능하다. 또한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오직 은혜(sola gratia)’로 되었음을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목적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한 지식을 전해 들었던 것이 아니라 ‘삶’을 전수 받았다.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라간다고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단순히 활자로 기록된 것을 추종하는 것을 넘어선다. 믿음이라는 것이 ‘지식’과 ‘동의’ 그리고 ‘신뢰’와 ‘헌신의 삶’까지를 총 망라하듯이 ‘5 solas’는 단순한 지식을 넘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렉스 오란디(Lex orandy)’와 ‘렉스 크레덴디(Lex credendi)가 가리키는바, 교리와 삶의 일치를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며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새기고 살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객관화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그릇된 것들을 벗겨나가야 한다.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의 것에 무엇인가를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벗겨내는 것이다. 관습과 전통들을 벗겨내어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더욱 단순해지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 가운데 덧붙여진 것들을 벗겨내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삶이 바로 우리가 목적하는 삶이다.

1.2. 개혁주의와 변혁주의 사이에서 

사실상 개혁주의이든 변혁주의이든 그들의 원래의 뜻과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개혁주의’와 ‘변혁주의’는 양극단에 위치해 있다. 물론 이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기도 하며, 각자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말함에 있어서 오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사실 개혁주의 이든 변혁주의이든 구원에 대하여 ‘내세적 관점’과 ‘현재적 관점’ 모두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면 각자 배움의 모자람이 드러날 때가 많다. 하여튼 우리는 개혁주의 변혁주의의 긴장 사이에 놓여 있다.

우리는 역사적 신앙고백을 따르는 것이 매우 변혁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사회나 교회개혁, 혹은 문화에 대하여 단지 망가진 제도를 변혁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의 본질적 의미를 찾고 그것을 용기 있게 실제로 옮기는 것이다. 변혁주의도 마찬가지이다. 현재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내세적 관점을 잃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이 둘을 분리하여 생각해왔다.

기독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는 ‘정교분리’의 원칙에 대한 이해가 상이함을 발견한다. 한 쪽에서는 종교의 사회참여를 무조건 반대하고 있으며, 다른 쪽은 기독교의 사회적 참여와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신앙의 개인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사적인 영역으로 신앙을 축소하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아예 사회와 공공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조차도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마도,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의 지나침이 서로를 반대하는 것으로 치달아버린 것은 아닌지 모른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서로가 가진 것들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지혜가 절실하다.  삶이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실제의 의미를 가지는 ‘현장성’도 필요하고, 그 현장에서 기독인으로서의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지는 것 또한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적 신앙고백을 배움으로 인하여 기독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웠다면, 이제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단지 두뇌의 상층부에서 머물지 않는 ‘현장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독 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 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 ‘현장성’과 ‘지속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 기독신앙의 공공성에 접근하기

2014년 한국기독교 내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진 주제는 ‘기독신앙의 공공성’ 혹은 ‘공공신학’이라는 주제일 것이다.  물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기독신앙의 공적영역에 대한 논의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이 주제는 단순한 담론으로서의 논쟁에 그치지 않고 인간 실존의 의미에까지 접근하는 폭넓은 이야기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독신앙의 공공성’이라고 할 때에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떤 것을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김동춘 교수는 한국 개신교의 위기를 ‘공공성’의 위기라고 지적한다. ‘공적 신앙(public faith)’의 부재와 결핍이 가져온 위기가 곧 한국 개신교의 위기라고 진단한다. 그는 계속해서 한국교회의 문제는 도덕성의 상실과 공공성의 문제라고 언급한다.  이런 주장과 함께 그는 기독신앙의 공공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증거된 복음, 사도적 신앙고백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신앙, 그리고 역사상 그리스도교 교회가 진술하는 신앙의 확신들은 신앙 자체로부터 오는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공적 진리(public truth)의 타당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2천년 교회의 역사 속에 존재했던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성경적 가르침과 교리적 진술, 그리고 신앙고백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언어의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동시대의 공적 세계 안에서 보편성과 신빙성과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름의 시대적합한 신앙논리와 변증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평화와 기쁨을 주는 것이며, 열방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창조세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온 세상의 주님이라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을 향해 들려주고, 증언하는 신앙언어 역시 게토 안에 갇혀 속 좁은 배타성과 고집스러움에 매몰될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복음논리, 즉 신앙언어는 세상 한복판에서 모든 이들의 공명(共鳴)을 불러 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유벽한 곳에서만이 아니라 도시의 광장에서 불리어져야 하고, 골목에서만이 아니라 시장에서도 들려져야 하고, 문명과 문화의 중심에서 고백되어야 한다. 결국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공공성의 문제이며, 공적 신앙(public faith)의 문제이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그것은 ‘공적 진리로서 기독교 신앙’에 관한 우리의 확신을 말한다.”

기독신앙의 공공성의 의미를 잘 풀어 놓은 이 의미들도 책상을 떠나 현장으로 돌아올 때면 많은 실존적인 문제들과 부딪치게 된다. 예를 들어, 도덕적인 공공성이라는 것이 단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기독신앙의 공공성이 단지 사회와 공공의 이익과 질서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피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언제나 기독신앙의 사적영역과 기독신앙의 공적영역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데에 익숙하다는 것이며, 이러한 구분은 서로의 영역에서 새로운 규범과 이해를 요구 받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신앙의 공적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는 어디인가? 사실 이런 경계는 언제나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다. 무엇을 ‘사적 영역’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는 ‘관계’의 선을 따라 그 영역이 참여된 ‘공적영역’을 배제할 수 없다. 거꾸로 하여 ‘공적 영역’이라고 하는 것들도 어느 순간 개인의  ‘사적영역’ 안으로 들어와 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단지 표면적 의미에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나누었을 뿐이다. 담론을 위해서 구분지어진 것이지 이 영역들의 실체와 그 안의 메커니즘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장신근은 1980년대 이후에 ‘실천신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는 ‘공공신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기독신앙의 공공성의 상실이라는 주제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단지 기독신앙의 공공성의 문제였을 뿐만이 아니라 기독신앙의 사적 영역의 붕괴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적 영역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정체성’을 상실한 탓에 공적 영역의 ‘현장성’에서도 힘을 잃었다. 이렇게 기독신앙의 영향력을 잃어버린 ‘공적영역’은 다시 ‘사적영역’에 영향을 미치며, 악순환의 고리 가운데에서 쳇바퀴 돌듯 하고 있다.

2.1. 다양한 표현들

최경환(프레토리아대 기독교윤리)은 자신의 논문 [공공신학의 기원, 특징, 최근 이슈들]에서 ‘공공신학’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다양한 상황 속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지만 그 의미와 내용은 늘 모호하다고 지적하면서 공공신학의 시작을 이해함으로써 그 의미를 알아내려고 한다. 일반적으로 공공신학의 기원은 1960년 ‘시민종교’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다. 미국의 시민종교는 교회와 함께 존재하면서 미국의 제도와 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한다. 마틴 마티는 니버의 신학을 연구한 논문에서 ‘공공신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고, 몇 년 후에 ‘공적 교회’라는 책을 써냈다. 이것은 미국인들의 공적인 삶 속에 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혀내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공공신학의 모델을 제시한 공정 신학자이자목사로서 중요한 모델이 된다. 이것은 ‘정교분리의 원칙’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무너지게 만드는 중요한 특징이다.

데이빗 트레이시는 세 가지 공적 영역(교회, 학문,사회)을 제시하면서 모든 신학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한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하버마스의 영향 아래에서 공공신앙에 대한 개념을 ‘공개성’과 ‘접근가능성’이라는 주제로 풀어냈다.  또한 공공신학을 해방, 정의, 평등을 위한 ‘투쟁’을 강조하는 말루레케나 스톨라도 있으며, 각 지역의 문화적 양식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적용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공공신학’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신앙의 공적 영역이라는 이 표현이 과연 평화와 정의에 대한 투쟁으로서인지, 혹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다양한 방식에 대한 관용적 표현이어야 하는지 또는 이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하지만 우리가 기독신앙의 공공성이라고 할 때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에 대한 합의가 있음은 분명하다.  첫째는 공공신학은 모든 사람들이 지적으로 동의하고 인지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신앙의 개인화와 개인주의에 반대하고 성도들의 삶이 교회 내적 윤리와 환원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사회 참여의 당위성을 넘어 그 방법의 정당성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기독신앙의 공공성을 이야기 할 때에 개혁주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정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일반 나라의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하며, 기독교 진리의 보편성을 합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가이다.

3. 고통의 문제로 들어가다.

기독신앙의 공적영역을 확보해 가는 노력으로서 인간의 보편적인 이해와 맞물리게 될 때에 우리는 인간의 실존적인 중요한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인생 안에 존재하는 ‘고통’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담론을 거쳐야 한다. 섣불리 인간 실존의 문제로 나아가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낳기 십상이다. 이 문제는 ‘신정론’에서 시작하여 ‘창조’와 ‘섭리’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인의 실존의 문제는 넘어 사회구조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이해가 없이는 서로 다른 이해에 대하여 답답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오늘날 ‘세월호 참사’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안전이 보장 되지 않는 때에 주어지는 불안함이 극에 달한 때에 ‘고통’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것조차 숨이 막히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3.1. 트릴레마에 갇히다.

21세기는 트릴레마의 시대라고 부른다.  딜레마(Dilemma)라는 것은 수학에서 제안, 명제를 뜻하는 레마(Lemma)가 di(두번) 있다는 것으로 진퇴양난, 궁지에 몰린 상황을 의미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가 덧붙여진다. 명제가 두개에서 세 개로 늘어난다. 그렇게 결정과 선택이 더더욱 어려워진다.  일반적으로 ‘3중고’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의 트릴레마’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우리들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하는데 그것이 ‘경제’. ’에너지’, ‘환경’, 이다. 화석연료로 생산되는 에너지는 환경을 파괴하고, 환경이 파괴되면 식량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수급이 필수적이다. 21세기 복잡한 사회적 환경은 수많은 가치와 선택의 기준을 제공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트릴레마’의 문제는 단지 자원뿐만이 아니다. 스티븐 핑커는 ‘사회적 트릴레마’를 이야기 하면서 ‘공평함’, ‘자유로움’. ‘평등함’ 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아서 C. 클라크는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데. ‘Quick’, ‘Cheap’, ‘Good’ 즉 ‘빠른 시장 출시’, ‘높은 품질’, ‘저비용’이다. 오늘의 사회는 이런 복잡함 가운데 있다. 그리고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도 이 트릴레마에 갇혀 있다.

‘신의 존재’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에 대한 고민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적으로 신정론의 트릴레마라고 부른다. 신의 전능하심, 신의 선함, 그리고 현실의 악과 고통의 이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이며, 완벽하게 선한 신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 현실에 악과 고통이 있다면, 신이 전능하시지 않거나, 아니면 선하지 않은 것이 된다. 박영식 교수는 자신의 책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에서 인간 실존의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함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세월호 참사 같은 인간의 커다란 고통의 현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미리 제거하시지 않은 것은 그 고통의 현실을 제거할 능력이 없는 전능한 신이 아니거나, 전능한 신이어도 선하지 않은 신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 부합하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아니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그분이 전능하시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 되심을 매번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신앙의 고백과 양립 가능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 안에서 우리는 때로 길을 잃어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지극히 변호적인 입장을 취하다 보니 인간의 현재적 정서에 공감하지 못하기도 하며, 때로는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려는 시도를 통해 이 문제를 극복해 보려고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심,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고통’의 문제의 트릴레마 안에 갇혀있다. 우리의 문제는 이 어려운 문제를 너무 쉽게 풀어버린다는 것에 있다.

3.2. 트릴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

트릴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셋 중 하나가 사라지면 된다. 셋 모두를 만족할 수 없다면, 차라리 하나의 개념을 버리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하듯이 ‘악’과 ‘고통’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의 선하심은 그로 말미암는 모든 세계가 선하다고 인식한다. 그렇기에 ‘악’은 존재가 아니라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나 타락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맛좋은 사과가 한 개 있다고 하자. 이 사과에 벌레 생겨 한쪽이 상하게 되었다. 그 상해서 없는 부분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결국 악은 존재 자체가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뜻 가운데 있다고 주장한다. 악한 상태가 선함을 더욱 빛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고통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잔인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선의 결핍이 악이라고 정의하는 인간 실존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인간의 고통과 슬픔에 대하여 그 어떤 정서적 도움도 줄 수 없다. 또한 사회적, 구조적 악함에 대하여는 그 악함을 고발하고 응징하며, 저항할 수 있는 용기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는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 중에 ‘융’(C. G. Jung)을 들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의 기본적 전제인 악의 존재를 부정하여 선의 결핍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융은 악을 선의 그림자로 이해했다. 즉 선의 대칭된 곳에 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융은 하나님도 악의 어두운 그림자를 소유하고 계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어두운 측면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선함과 악함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이야 말로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현대인은 빛과 어둠, 선과 악, 그리고 건강과 병듦이 함께 존재하는 그러한 하나님과 대면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하나님의 악함을 인정하게 되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즉 이제 신앙에는 선하다는 의미가 없어진다. 선과 악의 구분조차 모호해지게 된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전능보다는 하나님의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과 자기 제한과 연결시킨다. 이제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을 제한하신다는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전능을 포기하고 인간의 자율을 확대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제한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섭리’ 가운데에서 보호하고 보존하시며, 통치하시는 모든 사역에 제한을 가하게 한다. 힘을 포기하고 섭리하심을 포기한 하나님이 과연 하나님이실까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시대를 지나면서 인간은 많은 노력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했다. 수 천 년이 지나는 동안 고뇌하던 문제 속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정답을 내고 있다. 과거의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논증이 가지는 허점들을 극복하고자 수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깊은 고민의 흔적도 없이 너무 순진하게 답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정답지 같은 이야기들이 단지 학문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제 고통의 현장에 스며들었을 때에는 고통 받는 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공감’의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관계’는 깨어진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깨어진 관계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서로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한 채.

3.3. 고통의 문제 바라보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인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우리는 인간의 삶 속에서 오는 ‘고통’의 문제를 아예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든 인간의 ‘고통’은 실재라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원인으로서 여러 가지 이유와 설명을 우리가 들을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 원인에 대하여 ‘결핍’과 ‘박탈’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결핍’이란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지거나 모자란 것을 말한다. ‘박탈’은 권리나 자격을 빼앗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의적이든, 자연적이든,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빼앗긴 것이든 인간의 삶속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사라졌거나 강탈당한 것을 의미한다. 그 무엇은 ‘애정’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경제의 메커니즘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돈’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돈’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에 강제한 기본적 소비에 대해서 결핍을 느끼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소비를 박탈당한 경우 심각한 외상을 입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다시 우리의 내면에 커다란 고통을 안겨 줄 수밖에 없다.  ‘송파의 세 모녀’의 죽음은 그래서 너무 슬프다. 경제적인 결핍과 그녀들의 능력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 절벽, 그리고 사회의 법적 구조 안에서 박탈당한 그들의 권리는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의 굴레를 씌워버렸고,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무언의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를 지나면서 우리는 ‘안전한 나라’에 대한 기대가 크다. 물론 그 후에도 계속되는 안전문제로 인하여 가족을 잃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많은 사건들 속에서 가족을 잃은 사건이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단순한 ‘사건’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가 사고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 가족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연적이거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존재를  ‘박탈’당한 것이다.  모두가 함께 영유해야 할 권리를 빼앗긴 것이다. 가족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갈 모든 일상에 누군가가 고통을 강제로 주입시켜 버린 것이다. 이 고통을 가늠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오만이다. 그 누가 이 고통을 공감, 공유할 수 있겠는가.  가족을 잃은 슬픔과 고통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강제로 제거된 것이 될 때에 우리의 고통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이런 고통의 문제는 사실 한 개인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적 연결망이 복잡해진 오늘에는 고통의 문제가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 특정한 공동체 혹은 특정한 집단의 고통과 맞물려 있으며, 이것은 다시 사회적인 이기심에서 비롯된 고통으로까지 이어져 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과 연결점은 한 개인의 고통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를 낳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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