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2) 실족(失足)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실족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예기(禮記)’다. ‘군자는 사람 앞에서 실족하지 않는다(君子不失足於人).’ 사람 앞에서 넘어지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다. 사실은 예절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넘어진다. 문제는 크고 작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데 있다. 미국 뉴저지 의과대학 교수인 아서 프리먼과 저널리스트인 로즈 드월프는 사람들이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사고의 패턴 10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 첫째가 ‘치킨 리틀 신드롬’이다. 옛 영국의 우화에서 꼬마 닭 리틀은 머리에 도토리를 맞고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으로 착각해 재앙이 일어났다고 소리치며 돌아다닌다. 이는 '재앙화(化)'라고 알려진 행동 양상이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죽음을 제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마음속에서 최악의 상황이 일어났다고 단정해버림으로써 재앙이 곧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족이다. 목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뒤 제자들은 다 실패했다. 넓지도 않았고 굳세지도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밤새 고기잡이에 실패한 그들을 찾아 가서 먹이시고 사명을 재확인시킨다.

 

1. 오늘 밤에 다 실족하리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의 영역본 번역이다. NIV는 ‘will fall away’, 즉 ‘실족할 것이라’고 번역한다. KJV는 ‘shall be offended’, 즉 ‘범죄하게 되리라’고 번역한다. NRSV은 개역개정처럼 ‘will become deserters’, 즉 ‘버리게 될 것이다’로 번역한다. 먼저 버린다 혹 실족한다는 것 중에 어느 것으로 해석하든 제자라는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말이 아니다. 제자됨을 포기하지 않는다.

Disciples flee the scene, Duccio di Buoninsegna c. 1310

마태는 어떤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버리리라’에 해당하는 ‘스칸달리조’(σκανδαλίζω)의 미래 수동태이다.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될 것이다’. ‘나로 인해 믿지 못하게 하다’, ‘거절하게 하다, 혹은 버리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 동사는 ‘실족케 하다, 기분을 상하게 하다, 범죄케 하다’의 의미가 있다. 스가랴는 목자를 치면 양들은 흩어진다고 예언하였다. 마태는 이 동사를 사용하므로 버린다는 것보다 마치 덫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용어는 칠십인역에서 치거나 덫으로 잡는 것, 그리고 ‘죄의 원인’이라는 변형된 의미를 지닌 미끄러지거나 넘어지는 것이라는 다른 의미를 지닌 두 군(set)의 히브리 용어들의 역어로 어군이 사용되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해석의 차이를 보게 된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경전 원본보다 주자의 해석인 성리학을 중시했다. 반면 일본 유학자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적 해석을 거부하고 고전의 원래 뜻을 정독하는 고문사학(古文辭學)을 정립했다. 그래서 ‘논어’ 첫 구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해석이 다르다. ‘습(習)’은 하얀(白) 새(羽)의 날갯짓을 뜻하므로 익히는 게 아니라 실천한다는 의미다. 한국에서는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이지만 일본은 ‘배우고 열심히 실천하면 즐겁지 아니한가’가 본뜻에 가깝게 해석한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을 변호하는 용기를 가져야 하는 시험에는 실패할 것이다. 버리게 되고 또는 실족하게 된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이런 용기의 부족은 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의 초석을 세울 때 해소된다. 이런 능력은 실족을 통해 다시 생겨난다. 신기한 일이지만, 사람의 몸에는 'upgrade' 기능이 있다. 스스로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능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면, 창조주야야말로 최고의 프로그래머이다. 오퍼레이터인 동시에 하드웨어 제작자다. 사람의 신체와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는 그 자체로도 훌륭하다. 여기에 upgrade service까지 평생에 걸쳐 제공된다. 제자들은 실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탄력회복성을 가동하여 리셋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최고의 프로그래머되신 예수님께서 사흘 뒤에 그들을 리셋하실 것이다.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업그레이드하실 것이다. 인생은 컴퓨터가 아니라서, 강제 종료 후 재부팅(reboot)도, F5키를 누르고 리셋도 어렵다. 인생의 하드를 포맷하고 그간의 실족의 궤적을 다 지워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것은 희망사항이다. 목자이신 예수님 다시 살아나신 뒤 제자들을 새롭게 재부팅하신다.

실족에 해당하는 스칸달론은 scandal 즉 ‘추문(醜聞)’이란 단어의 어원이다. 성경의 영역 밖에서는 이 동사가 사용된 예가 없다. 하지만 ‘덫을 놓다’는 의미의 동사가 전제되어 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전쟁의 신 아레스가 바람을 피우다 남편 헤파이스토스가 설치해 놓은 그물 덫(skandalon)에 걸려 망신당했다는 신화에서 나왔다. 스칸달론은 ‘함정’ 그리고 ‘방해물’를 의미한다. 이처럼 원래 덫을 작동시키는 장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비슷한 변천 과정을 거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걸려 넘어기게 하는 것’, 즉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방해’ 의미를 가지므로 따라서 ‘믿지 못하는 경우’를 뜻하기도 한다. 누가 부딪쳐서 그 때문에 다치거나 물러서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어 그 곳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란 뜻이 나온다(마 16:23; 갈 5:11).

‘뛰다, 넘다’인 선사 유럽어 skan 역시 스칸달론에서 나왔다. ‘사회가 이미 정해 둔 선을 넘다, 부정 타다’에서 ‘사회적 금기를 깨 충격을 주다’로 의미가 발전해 지금까지 쓰인다. 목자를 쳤을 때 양떼는 어떠했는가. 실족한다. 실족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충성이 지극히 시험에 부딪힐 것임을 알려 준다. 정해 둔 선을 넘는다. 정해진 선을 넘어, 즉 skan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놀라게 되기 때문에 그를 지탄하고 벌주어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속성이 생겼는데 그런 사회적 사건을 scandal이라 불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제자들의 행각은 충격을 준다. 실족한다는 흔히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진다는 뜻으로 이 단어를 푼다. 그러나 이 말의 원래 의미는 단순히 ‘넘어지다’가 아니다. 우리가 보이는 행동거지와 관련이 있다. 목자를 치는, 즉 아들이 죽게 한 주도권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처럼 양떼들인 제자들이 실족케 되는 모든 일도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따른 결과로 일어난다.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에게 일어날 동시다발적인 사건에 스가랴 13:7에 예언된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설명한다.

 

2. 실족함을 허하노라

완전함과 무오류를 향한 전진은 인간세상의 숙명일 것이다. ‘자본주의 종주국’ 미국에서조차 사회주의의 인기가 치솟는 현상도 이상향에 대한 추구를 잘 보여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완전함과 무오류를 요구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버리는 것을 허용한다. 실수를 막지 않으신다. 실족을 허한다. 하지만 그가 다시 일으키신다. 이것이 차이다. 실수는 과정이고 실족은 결과다. 실수가 터무니없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실패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실족한다고 다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실족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 목자가 손을 내밀어주시기 때문이다.

문화마다 실패 또는 실족하는 것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 프랑스는 냉정하다. 젊어서 실패는 인생 실패로 본다. 미국은 따뜻하다. 꿈을 찾아가는 카우보이에 비유한다. 영국은 뜨겁다. 누구나 한 번의 실수한다며 기회를 준다. 예수님은 어디에 해당할까. 오늘 밤에 너희가 나로 인해 실족하리라. 허용적이다. 제자로서 실패가 아니다. 베드로의 배신은 끝이 아니다. 단지 실패했을 뿐이다. 회복은 실족이 뒤집어질 때다. 실족하므로 그릇 용량이 점점 커진다. 예수님은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예수님은 목자인 자신이 침을 당하면 ‘오늘 밤에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버린다는 것은 배신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실족하게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스가랴에서 양들의 목자를 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면 양떼들이 엄청난 시련의 시기를 거쳐 단련될 것이다. 시련의 과정을 통해 그들은 단련이 되어 하나님의 새롭고 신실한 백성으로 태어날 것이다(슥 13:9). 예수님은 오늘부터 부활 때까지 실족할 것을 허락한다. 제자들에게 닥치는 실족함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다는 말씀이다. 허용된 실족이다. 세상의 스캔들은 넘어지게 하는 덫과 함정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스칸달론은 시험장이다.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이 위태로워질 경우 사력을 다해 마지막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어 유전자를 후대로 이어가기 위하여 노력을 한다. 이와 같은 종족보존 현상을 생물학적 용어로 앙스트블뤼테(Angstblüte)라 한다. 독일어로 ‘공포, 두려움, 불안’을 뜻하는 앙스트(Angst)와 ‘개화(開花), 만발, 전성기’를 뜻하는 블뤼테(Blüte)의 합성어다. ‘불안 속에 피는 꽃’으로 번역할 수 있다. 요셉은 함정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그곳에서 꽃을 피웠다. 물 없는 웅덩이와 감옥이 그를 가두지 못했다. 보디발의 여인과 스캔들에 휩쓸리지 않았다.

목자가 양떼를 유혹에 빠지게 하는 법은 없다. 하지만 목자가 부재하게 되면 양들은 실족하게 된다. 유혹의 노출되고 죄에 빠지기 싶게 된다. 목자를 치면 양들은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죄를 짓게 한다고 볼 수 없다. 비록 실족하고 실수하고 실패할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이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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