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 고백과문답 출판사 대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사회적 변화에 있어서 한동안 빅이슈(혹은 Hot issue)였던 것 가운데 하나가 ‘간통죄’의 폐지였다. 지난 2015년에 “간통죄는 국민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헌법에 위반된다.”고 하는 판시에 따라 1953년도에 제정된 이후로 62년 만에 형법 241조의 간통죄가 폐지된 바 있다.

사실 간통죄의 시행은 일제강점기 형법의 관행에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일제강점기 형법에서 간통죄는 남녀 간 공히 적용될 수 있는 형법이 아니라 차별이 있는 형법이었다. 즉 아내가 간통을 저지른 경우에 남편의 고소에 따라 아내와 상대방 남성을 처벌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남편이 간통을 저지른 경우 배우자인 아내는 간통을 저지른 남편의 상대가 유부녀가 아닌 이상 처벌할 수 없는 ‘단벌 죄’의 성격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1953년에 제정된 간통죄의 경우 헌법 제11조에 근거하여 남녀 쌍방을 처벌하는 ‘쌍벌죄’로 규정되어 있었어도, 실제로 법을 적용하는 데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관행이 유효하게 적용되는 예가 많았다. 이에 따라 간통죄는 남녀의 평등권에 위배되며,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그에 따른 사생활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위헌적 소지가 있다고 하는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형법의 본질적 기능은……윤리 도덕을 강제하거나 고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

그런데 간통죄 폐지의 중요한 논리적 근거였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유사하게, 금번 낙태죄의 위헌적 소지에 관한 판시의 경우에도 논리적 근거에 있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하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형법의 본질적 기능은 개인의 생명·신체·재산 등 개인적 법익의 보호에 그 제1차적 목표가 있는 것이며 사회의 윤리 도덕을 강제하거나 고양하는 것을 직접적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국민의 도덕적 개선을 강요하는 것은 국가의 헌법적 권리도 의무도 아니며 윤리 도덕적 비난을 받을 수 있는 행위를 전부 형벌로서 다스린다면 형법만능주의에 빠지게 되어 국가는 윤리 도덕의 보호를 빙자해서 필요이상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형법의 법익보호주의 또는 겸억(謙抑)주의에 반하기 때문에 반사회적·반도덕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일정영역은 윤리·도덕·사회여론·평판에서 규율하는 분야로 남겨두는 것이 온당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는 법원칙에 근거하여, 개인의 권리를 법률적으로 구속하거나 제한할 소지가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법률적 해석의 밑바탕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원리가 깔려 있는데, 그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엄격하게 금하고자 하는 취지다. 즉 간통죄가 관행적으로는 일제강점기의 단벌죄개념을 따라서 남성 중심으로 적용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낙태죄 역시 임신에 있어서 지나치게 여성의 책임만이 강요된다고 하는 불평등에 대한 반대가 깔린 것이다. 그에 따라 심지어 여성의 몸은 사회적 공공재가 아니라고 하는 말까지 외쳐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 가운데서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 사회의 오랜 이슈가 바로 ‘여성 인권’ 혹은 ‘여성차별’의 문제라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옛 봉건적 의식구조를 바탕으로 한다고 볼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지나친 반감이 현대사회의 윤리·도덕적 의식의 기저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들에 대한 책임과 역할이 기독교 신앙에 맡겨져”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여성 인권이 대한 의식은, 여성으로서의 독특한 정체성의 확립보다는 ‘양성평등’(Gender equality)이라고 하는 주제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성성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양성평등’에 저해되는 것이라는 논리까지 공공연히 주장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양성평등’이라는 개념이 ‘자웅동체’(Hermaphrodite)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극단적 양상을 향하고 있다. 그만큼 아직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가치가 여전히 부족하고 빈약한 형편이다.

사실 “형법의 본질적 기능은 개인의 생명·신체·재산 등 개인적 법익의 보호에 그 제1차적 목표가 있는 것이며 사회의 윤리 도덕을 강제하거나 고양하는 것을 직접적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는 법 원칙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인 문제들에 대한 책임과 역할의 상당 부분이 참된 종교로서의 기독교 신앙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양성평등’과 같은 개념에 있어서도 그 명확한 원리와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류를 자웅동체의 인격체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성정체성을 바탕으로 하도록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외에 정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4장에서 창조에 대하여 언급하는 가운데 2항에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후에, 이성적이고 불멸하는 영혼을 지닌 사람”을 창조하셨다고만 하지 않고 “곧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아울러서 바로 그 남자와 여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함을 부여하셨고, 더구나 율법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전 7:29절에 기록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성적이고 불멸하는 영혼을 지닌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지만, 자신의 꾀(안목)에 따라 스스로 타락한 사람인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게 되었고, 여자는 남편을 원하는 관계(창 3:16) 가운데서 각각 억압과 결핍이라는 치닫고 말았으니, 소위 페미니즘(feminism)이라고 하는 반감도 어쩌면 남편을 원하는 여자의 결핍과 여자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군림하고 억압하는 남자의 폭력적인 욕구에서 싹을 틔운 것이 아닐지 모르겠다. 창세기 3장의 그러한 타락과 부패가 있고 난 뒤, 곧장 인류 가운데에는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창 4:8)뿐 아니라 두 아내를 맞이한 라멕의 방탕까지(창 4:19) 발생하기에 이르렀으니, 여자는 남자가 합당하게 다수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성경의 질서 외에 다른 데서 창조에 걸맞은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그런 변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이르신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는 말씀을 신약성경의 바울 사도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유지하시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고전 11:8-10)고 이르도록 하셨으며,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고전 11:11-12)고 기록하도록 하셨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성경의 질서 가운데서 남자를 여자 없이 남자만으로 이해하거나 여자를 남자 없이 여자만으로 이해하는 가치관과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은 결과가 바로 ‘봉건적 가부장제도’요 현대의 ‘페미니즘’ 현상이다.

무엇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 여자들에게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고전 11:13)고 이른 뒤에, 또한 남자들에게도 “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14절)고 말하면서 “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고 명확하게 단정하고 있으니, 이러한 성경의 질서(구약과 신약의 질서) 외에 다른 질서를 추구하는 가운데서는 결코 창조에 걸맞은 가치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처럼 혼란스런 사회(사회의 윤리 도덕을 강제하거나 고양하는 것을 직접적 목적으로 하지 않는 형법의 본질적 기능에 따라 최소한으로 묶여 있는 사회)를 향하여 작금 우리의 신앙과 가치는 대답할 말을 준비하되(벧전 3:15) “온유와 두려움으로” 예비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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