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사는 길- 다시 말씀 앞에, 다시 복음 앞에

 

주님은 우리에게 무리에 머물지 말고 제자로 나가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삼는 일은 많은 희생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제대로 예수 믿는 것은 간단하고 쉽게 되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부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것을 뛰어 넘을 좋은 핵심을 말씀 해주시면 좋겠네요. 어디 서부터 이 문제를 풀어 가야 할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번에 한국교회의 말씀양육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과 평가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것에 따라 제자양육의 방향성과 핵심을 제시해주면 제자 양육을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좋은 말씀을 해 주셨어요. 지금 한국교회가 극복해야할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제자를 삼는 일이어요. 그렇게 하려면 그들을 양육하고 훈련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각자 나름대로 양육을 하고 있지만 정리된 양육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학교에서도 이런 것을 알려주지 않고 각자 맡기다보니 제대로 정착이 안 되는 것 같구요. 진정한 제자를 삼는 양육체계가 없는 것이 아쉬어요. 자기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있지만 대부분 교회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있어서 제자 양육에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자양육은 지속적인 자기 죽음과 부인이 있지 않으면 힘들다고 생각해요. 단기간의 양육과정으로는 제자 삼는 것은 어렵다고 봐요. 사람 자아가 죽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아요. 마치 학교 졸업장 주듯이 하는 제자과정은 큰 효과가 없구요. 오히려 문제를 낳을 수 있어요.

적어도 예수님의 방식대로 3년 주야로 훈련은 해야 한다고 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친 시간은 약 26,000 시간입니다. 시간상으로도 대단한 축적시간입니다.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정도는 배우고 공부해야 한다고 하는데 하물며 신앙인으로서 제자가 그런 시간을 바치지 않고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런 마음 없이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은 불순한 마음이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아요. 제자가 만들어지는 환경이 아니지요. 적어도 상식선으로도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교회 양육시스템은 너무 엉성하고 급조된 자격증으로 해보려는 흐름이 자리 잡고 있는데 안타깝죠. 의사보다도 못한 목회자 자격과 훈련이 되면 안 되죠.

 

목사님은 30여 년 동안 교회와 신학교와 성경대학에서 평신도와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훈련해오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해오고 있는데 이런 과정을 지내오시면서 통해서 특별히 느끼시는 점은 무엇인가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만 제자 삼는 영역에서 한 가지 특징은 주의 종과 훈련 받는 사람들을 보면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빨리 시간을 단축하여 목사 안수를 받고 학교를 졸업하고 단기전으로 사역을 하는 사람들과 느려도 장기전으로 축적하여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 비율은 10:1정도 됩니다.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은 아주 적어요. 이런 사람은 자격증과 졸업증과 기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깊은 내공에 시간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제자가 나올 소지가 많지요. 그런데 빨리 무언가를 얻어서 급하게 사역을 하고 자격증이나 학위증으로 실력을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렇게 자격을 얻고 공부를 한 사람은 오래가지 못하고 방법도 늘 자기가 경험한 것을 넘어 서지 못해요. 자격증으로 증명하는 사람은 사역도 자격증을 주는 일을 주로 하고 사역이 방향도 그렇게 하죠.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봐요. 자기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은 억지로 안 되죠. 지금까지 성경대학을 다녀간 분들만 해도 약 3,000명 정도는 되지만 꾸준하게 말씀을 따라 오는 사람은 아주 적지요. 많은 수가 와서 졸업증을 받았느냐 보다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죠. 단 한 사람이라도...결국은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이 제자로 남는다고 보아요. 거기에서 믿음이 결정되지요. 그래서 제자의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주님의 제자들을 보아도 이것은 진리인 것 같아요.

 

왜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고 이리저리 표류하는 사람이 많다고 보십니까? 거기에 제자사역의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요?

 

예수님의 제자훈련 축적 시간이 26,000시간이라고 했지요. 예수님 같이 능력 있는 분도 그렇게 하셨는데 우리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죠. 어디엔가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해요. 무언가 목표와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라 봐요. 아브라함과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등을 보아도 단기간 승부로 이룬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성경의 인물 중에 그런 제자가 있나요? 적어도 20년 이상은 됩니다. 그 시간은 자기가 죽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꾸준히 공부하고 그 앞에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만이 나중에 하나님이 사용하신다고 봐요.

 

그런데 자칫 착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주의 길을 간다고 생각하면서 합리화 할 것 같거든요. 많은 분들이 예배드리고 주일성수하고 말씀 읽고 살면 이 정도는 준수한 것 아닌가 하면서...더 어떻게 시간을 내라는 것이냐? 이런 경우에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저는 바울의 사역을 보면서 역시 그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어요. 마지막에 예루살렘으로 고난의 길을 홀로 가서 십자가의 죽음의 길로 일생을 마친 것도 주님과 닮았구요. 특히 제자양육 부분에서도 너무 흡사해요. 사도행전 20:31에 보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하면서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워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나와요. 3년 주야로 각 삶을 훈련하며 제자 훈련했다는 것이죠. 예수님처럼 26,000시간을 축적해다는 이야기인데 대단하죠. 과연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을 3년 주야로 목숨을 던져 제자양육에 힘을 바치는 열정과 희생을 하는지 돌아보면 부끄러워요. 그런 희생 없는 제자양육은 의미가 없죠. 우리는 시간상으로 보아도 얼마나 양육시간이 짧은지 몰라요. 그 많은 시간 중에 주일 30분 말씀 듣는 것으로 다하는 경우가 80% 성도가 되니 여기서 제자가 나오기 힘들죠. 나머지가 거기에다 조금 시간을 더 바친다 해도 일주일에 10시간 정도 되지요. 2시간씩 1년 해도 100시간입니다. 10년 해도 1000시간인거죠.

저는 신앙은 시간과 거의 비례한다고 봐요. 얼마나 주님에게 시간을 드렸느냐에 따라 제자의 능력은 결정된다고 봐요. 시간을 바친다는 것은 자신을 드리는 희생과 자기 부인이 없으면 힘들지요. 그런데 이런 시간을 드리지 않은 채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요. 구체적인 자기 죽음의 흔적이 필요한데 거기에 우리는 인색하지요. 좀 더 정직해야 한다고 봐요.

자기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죽는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더 위험하다고 봐요. “사람이 잘 안 모이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요즈음 사람들은 성경을 지겨워해요” 등 핑계를 댄다면 그것은 직무 유기라 생각해요. 특히 지도자인 목회자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면 더욱 심각하죠. 이런 면에서 목회자가 먼저 회개해야 되죠. 그리고 먼저 말씀시간을 바침으로 진정한 회개를 이루어야 한다고 봐요. 당장 말씀의 시간을 내는 것이 회개의 증거죠. 목회자가 적어도 월요일은 말씀 축적하는 날로, 화, 목요일은 제자 양육의 날로 바쳐야 한다고 봐요. 만남이 어렵고 시간이 안 되면 일터와 집으로 찾아가면서라도...

 

그렇다면 지금이야 말로 힘들지만 한국교회가 제자양육에 힘써야 한다는 의미겠네요?

 

 

예. 다른 길은 없어요. 지름길을 찾으려 하기 보다는 정도를 가야 한다고 봐요. 지름길은 넓은 길이요 나를 교만하게 하는 첩경이죠. 프로그램으로는 제자가 만들어지지 않지요. 오직 말씀자체를 통하여 자기를 죽이는 희생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제자를 결정한다고 봐요. 진리가 아닌 프로그램에 목숨을 걸고 순교하지 않아요. 진리 된 말씀 이외의 답은 없지요.

단순하게 성경 66권을 가르치고 그 말씀속으로 들어가는 일에 목회자가 목숨을 거는 일만이 한국교회가 살아나는 길이라 봐요. 결과가 어떻든지 상관하지 말고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다하는 바울과 같은 목회자가 된다면 그 본을 보고 진리에 목숨을 거는 스데반과 빌립 같은 제자가 나온다고 확신해요. 제자는 본을 보고 따르는 사람이죠. 말씀에 불철주야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각 사람을 세우는 목회자와 교사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있느냐? 그때 그 본을 보고 따르는 제자가 나타난다고 봐요.

그러면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닌 그 말씀이 기업이 되고 그 말씀이 제자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한 것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착념해야 하죠.

 

결국은 진솔하게 지도자가 먼저 말씀 앞에 서는 일이라는 이야기네요?

 

 

그렇죠. 한국교회 5만 중에 단 천명의 목회자만이라도 자기에게 맡긴 양들을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일이 지도자의 임무여요. 단 몇 명이라도 그들을 붙잡고 말씀으로 세워나가는 일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본질 사역이지요. 그렇게 하면 한국교회는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간단한 방법이어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이일을 각자 시작하면 되요. 조금 하다 말다 하지 말고 시간을 정하여 꾸준히 부르시는 죽음의 그날까지 충성하면 그것이 역사를 일으킨다고 봐요. 예수님이 그렇게 끝까지 하시니까 나중에 제자들이 그대로 따른 것처럼 우리고 이 원리를 적용하면 되구요. 성공의 결과는 주님이 하실 것이어요. 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어떤 모습인지 그대로 보여주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 28:31)

이것은 우리의 스승이요 구주인 예수님도 그 모습이 동일했어요. 곧 며칠 있으면 십자가에 죽는 순간에도 결과와 상관없이 가르치는 자기의 일에 충성하는 모습을 봐요. 마지막 날까지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으셨어요. 곧 있으면 다 도망가는 것을 아시면서도 바보처럼 가르치는 일에 목숨을 거셨지요. 그 마지막 최후만찬 때 가르쳤던 교훈의 내용이 요한복음 13장-17장의 많은 분량으로 다락방 강화가 나오는데 말씀을 남긴 것이 최고의 사역이지요.

오늘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봐요. 말씀을 가르쳐도 설사 제자들처럼 교인이 다 떠나고 혼자 남아도 핑계대지 말고 가르치다가 죽는 것이 우리 교회지도자의 사명이라고 봐요. 그런 지도자와 교사가 많아지면 한국교회는 다시 부흥이 일어날 거여요. 누구 탓할 이유가 없이 각자 부르신 곳에서 자기의 소명을 다하는 것이 최고의 솔루션이라 봐요.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이미 답은 너무나 명확하고 해결점도 단순하고 당장 할 수 있어요. 문제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의 부름에 응답하는 오직 실천만 남았죠.

 

오늘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 한국교회 위기의 해결책이 나왔다고 봅니다. 너무 단순하고 명료한 해결책인데요. 지금 즉시 누구나 시작하면 되는 오늘 메시지에 공감이 갑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복음 앞에. 다시 예수 앞에. 다시 말씀 앞에 서는 역사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목사님의 준비하신 미리토크 말씀 사역이 이 일에 선한 도구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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