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6) 선포(宣布)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위대한 국가는 자서전을 세 권으로 나눠 쓴다. 한 권은 행동, 한 권은 글, 나머지 한 권은 미술이다’. 미술평론가 John Ruskin의 글이다. 셋 다 시각과 관계한다.’ 마태는 하나님의 나라를 시각보다 청각에 호소한다. 여인들의 행동, 천사의 모습, 빈 무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다. 마태는 여기에 시선을 두지 않고 있다. 오직 빈 무덤에서 외치는 천사의 부활 선포에 집중하게 한다. 오감은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이다. 육감은 분석적인 사고를 하지 않고도 직관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제7의 감각은 ‘초연결지능’이다. “어떤 사물이 연결에 의해 바뀌는 방법을 알아채는 능력”이다. 마태는 모든 감각을 다 동원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천사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을 경청하길 원한다.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먼저 들리는 소리를 수동적으로 듣는 것은 비교적 쉬운 단계다. 청각기관을 통해 공기를 진동시키는 파장을 의지 없이 수신하는 피동성이다. 하지만 소극적 경청마저도 쉽지는 않다. 다음 단계인 적극적 듣기(active listening)는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와 목적을 가진 듣기다. 천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여인들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신뢰 위에서 선포를 편안함으로 초대한다. 화자에게 주의를 집중한다. 마태는 마가와 다르게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가서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무덤 밖에서 선포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이도록 한다.

1.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선포

마태는 마가의 부활 기사와 많은 부분에서 다르게 접근한다. 향유가 빠져있고, 돌이 굴러짐과 여인들의 놀람을 생략한다. 마태는 사건의 순서를 좀더 효과적으로 전개한다.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감하게 가지치기 한다. 포커스는 하나다. 부활절 새벽, 여인들은 향유를 들고 십자가에 목 박힌 예수님을 찾으러 갔다. 마태는 마치 빈 무덤에서 선포되는 부활절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달려간 것처럼 기술한다. 돌을 굴러낸 것은 부활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함처럼 묘사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의 목적은 한 가지다.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다.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여인들의 상황이나 선포자의 사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바를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결정된다.

마태와 마가는 천사가 한 명이었다고 기술한다. 누가는 둘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자의 강조점에 따라 세부적인 내용은 다소 다른 기술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마태는 누가처럼 둘이 아닌 한 명으로 소개하는 의도가 뭘까. 둘은 증인의 최소 단위다. 한명이라는 것은 선포의 집중과 통일성을 보여준다.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천사는 하늘의 사자이다. 헤럴드(herald)에 해당하는 ‘케뤽스’는 신약성경에 단지 3회 밖에 나오지 않는다. 강조점은 명사 케뤽스가 아니라 동사 ‘케뤽소’에 있다.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이 아니라 진정한 사자로서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천사의 부활 메시지를 듣고 제자들에게 전하는 자가 여자였다는 것도 맥락을 같이 한다. 여자이기에 안 믿고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자를 증인으로 보내신 분이 중요하고 그의 입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마태는 부활의 소식을 선포하는 천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않다. 번개 같은 형상과 눈 같이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가 하늘에서 온 천사임을 확인시켜주는 언급이다. 그 천사를 보내신 하늘의 아버지에게 있다. 그 아버지가 천사를 통해 선포하는 부활의 메시지가 능력이고 좋은 소식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선포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 촉각과 시각을 배제하고 청각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한 사람의 이미지가 각인될 때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7%인 반면 청각 요소는 38%, 시각 요인은 55%나 된다. 1971년 ‘조용한 메시지’에서 앨버트 머레이비언은 이런 내용을 설파했다. 그의 이름을 따 ‘머레이비언의 법칙’으로 통한다. 천사는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주의를 끌지 않는다. 마태는 청각 요소가 시각에 비해 38%에 불과하지만 선포에 귀를 기울이도록 장치를 한다. 누가는 두 번째 천사를 포함시킨다. 마태와 마가는 여인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한 천사에게만 집중한다.

부활은 예수님이 이전에 어떤 분인지를 확인해 준다.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효력 그리고 대위임에 반응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실한 주님으로서 지금 살아 계심을 선언해준다.

 

2. 그리스도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는 선포

천사가 여인들에게 선포한 것의 내용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다. 이를 예수님이 일찍이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 선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 1:24). 어떠한 변경도 허용하지 않는다(갈 5:11).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되어야 한다(딤후 4:2).

천사가 여인들에게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다’는 말은 선포이다. 천사는 예수님이 살아 나셨기 때문에 빈 무덤이 되었다고 선포한다. 예수님은 거듭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한 예고를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심으로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빈 무덤이기에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이냐. 아니면 살아나셨기에 빈 무덤이 되었느냐. 비슷하게 들리지만 우선순위가 있고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 마태는 빈 무덤을 선포 앞에 두지 않는다. 빈 무덤에 대해서는 진실을 덮기 위해서 다른 이야기들이 조작되었다(참조. 28:11-15).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신 것은 그럴 수 없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많은 단어들을 사용한다. 기본적인 것은 ‘케뤽소’이다. 신약에서 61회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9회 사용된다. 이 단어가 ‘‘케뤽스’나 ‘‘케뤼그마’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역동적인 선포에 강조점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활의 소식이 선포될 때 듣을 귀가 있는 자가 복이 있다. 성경을 보면 지혜는 곧 “듣는 마음”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왕상 3:9) 능력이다.

서양의 사유 전통에서 오감 중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시각이다. 서양철학을 시작했다고 하는 플라톤은 사물의 본질을 ‘eidos’라고 불렀다. ‘이데아’나 ‘형상’으로 번역된다. ‘보다’라는 뜻을 가진 ‘idein’이라는 동사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반면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 가장 중시된 것은 시각에 앞서 촉각이었다. 제자들은 시각·촉각·청각의 문을 닫았다. 여인들은 시각과 촉각을 앞세우고 무덤을 향해 갔다. 마태는 독자로 청각에 집중하게 한다. 선포에 귀를 기울이도록 장치한다. 전령인 천사보다 일찍이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의 선포에 귀 기울이게 한다.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한 사람의 벗은 한 쌍의 귀를 의미한다’고 했듯 좋은 소식이 선포될 때 듣는 여인들이 부활의 목격자가 되고 첫 부활의 증인이 된다. 선포의 목적은 이해보다는 믿음에 있다. 선포를 통해 사람들이 듣고 믿음을 갖게 된다(롬 10:10). 참된 들음은 믿음을 갖게 하며 그러한 믿음은 또한 순종을 가져다준다.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게 되고,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롬 10:8). 믿음은 선포에 의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동일한 내용을 갖는다(고전 15:14).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놀라운 선포는 이에 합당한 기이이한 사건들을 동반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다. 곧 지진, 열린 무덤, 천사의 등장 및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의 드러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예언하셨던 것처럼 무덤에 누워 있지 않았다. 천사들이 부활을 선포하고 여자 제자들이 부활의 첫 목격자요 증거자가 되며 이 이적에 대응하기 위한 가짜 뉴스를 유대 당국자들이 꾸민다. 천사의 선포는 사방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리를 듣는 것과 다르다. 이렇게 듣는 행위를 영어로 ‘hearing’이라고 한다. 우리는 천사의 소리가 아닌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음성을 ‘listening’해야 한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가장 높은 단계는 외국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이해하는 것이다. listening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특정한 대상이 필요해 항상 전치사 ‘to’가 따라온다. 헬라어는 여격이다. ‘여자들에게’에 해당하는 ‘타이스 귀나익신’은 특정 대상이다. 천사는 두려움에 기절해 있는 지키는 자가 아닌 예수님을 찾는 여인들에게 선포한다. 그 선포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메시지에 귀뿐만 아니라 마음도 집중해야 한다. 이런 행위가 listening이다.

사람은 오감을 느낀다. 오감을 통해 생각(thought)이 생산된다. 하루에 7만 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 빈 무덤을 먼저 보게 되면 인간의 사고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설교를 준비하면서 파워포인트나 영상에 치중하면 알맹이가 소홀해 질 수 있다. 내용도 그림처럼 그냥 보고 넘어가려 한다.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시각에 의존하면 이성보다 감성이 사고를 좌우한다. ‘생각을 하지 않는 시대(Unthinking Age)’로 갈수도 있다. 이미지가 전달하는 감성적 사고는 때로 이성적인 논증과 어긋난다. 그리스도의 삶, 죽음 및 부활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선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부이다. 구원을 가져다주는 이러한 사실들을 선포하는 목적은 이러한 사실들이 신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실제가 되게 하려는데 있다. 부활 자체뿐만 아니라 부활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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