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종교개혁운동 시리즈 - : 성경의 의인들

8) 성경의 의인들

위에서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행칭의를 말하는 여러 성경구절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의인으로 불리운 많은 인물들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 있는가? 전 7:20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70인역: ouk estin dikaios)” 고 말한다. 바울은 전도서 7:20의 70인역(LXX)을 인용하여 로마서 3:10b에서 “의인은 없나니(ouk estin dikaios) 하나도 없으며” 라고 강조하여 말한다. 과연 이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을까? 아래에서 보겠지만 성경은 여러 의인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의인은 없다”고 말한 전도서 7:20이나,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 로마서 3:10b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의인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는 ‘절대적 의인’이요, 다른 하나는 ‘상대적 의인’이다. 절대적 의인이란 전도서 7:20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을 행하고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이다. 이런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음이 분명하다. 전도서 7:20과 로마서 3:10b에서 말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은 이런 절대적 의인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죄를 범하지 않고 선만 행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런 의인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상대적 의인’이란 “선을 행하지만 때로는 범죄도 하고 실수도 하고, 그러나 범죄하고 실수한 다음에는 회개하고 다시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인” 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런 의미에서의 의인은 이 세상에 많이 있을 수 있다. 성경이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의인’이 아니라 ‘상대적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들, 즉 상대적 의인들이 누구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구약의 의인들

A. 노아

구약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들이 있다. 노아, 아브라함, 욥 등이 그들이다. 창세기 6:9는 “노아는 의인(tsaddiq)이요 당세에 완전한(tamim) 자라”고 말한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말과 ’완전한 자‘(tamim)라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 tamim은 ‘완전하다’(complete), ‘흠이 없다’(blameless)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tamim) 자라”는 말은, 노아의 삶과 행함이 ‘흠이 없는’(blameless)는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노아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었음과 동시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주를 준비하여 그의 집을 구원하는 행함의 사람이기도 하였다(히브리서 11:7). 그래서 창세기 6:9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말한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고(창 6:9)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완전한(tamim) 사람이어서 의인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노아도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창세기 9:21)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성경은 노아를 의인이라고 말한다. 노아는 의인은 의인이되 상대적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B. 아브라함

야고보는 2:21에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말함으로써 아브라함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17:1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tamim)”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말은 노아가 완전한 자라고 말할 때 사용되었던 바로 그 tamim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히브리어 tamim은 ‘완전하다’(complete), ‘흠이 없다’(blameless)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walk before me) 완전하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에게(창세기 15:6), 이제는 행함으로도 완전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흠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여,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는(창세기 12:11-13; 20:2) 등 실수도 범하였다. 그러나 이런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성경은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의인은 의인이되 상대적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C. 욥

욥기 1:1은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tam)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2:3도 참고)고 말한다. 여기서 ‘온전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tam이다. tam은 tamim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다’(complete), ‘흠이 없다’(blameless)는 뜻이다. 욥이 ‘온전하고 정직하다’는 말은 노아,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의인이라는 말이다. 에스겔 14:14,20에서 욥은 노아, 다니엘과 함께 의로운(tsedaqah) 사람 즉 의인으로 나온다. 욥기 29:12-17; 31:16-21에 의하면 욥은 많은 선행을 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1)라고 칭찬한다. 이렇게 본다면 욥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음과 동시에, 많은 선행을 하고 악에서 떠나 범죄하지 않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 시험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진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도 하고 불평도 하는 잘못을 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성경은 욥을 의인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은 의인이되 상대적 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D. 다니엘

에스겔은 14:14에서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tsedaqah)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고 말한다. 노아와 욥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노아와 욥은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흠이 없고 완전한(tamim, tam) 사람들이어서 의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구약의 대표적인 의인들인 노아와 욥과 함께 다니엘을 언급했다는 것은, 다니엘도 노아나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흠이 없고 완전한(tamim, tam) 의인이었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을 함께 의인으로 언급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에스겔은 이 세 사람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의’(tsedaqah)의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의(tsedaqah)의 사람들‘이라는 말은 노아와 욥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다니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미 의인으로 알려진 노아와 욥뿐만 아니라 다니엘도 의인임이 분명하고, 그래서 에스겔은 다니엘을 노아와 욥과 함께 구약의 대표적인 의인으로 언급한 것이다.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이었던 것처럼(창세기 6:8) 다니엘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chӑmûdah) 라고 3번이나 거듭해서 말한다(디니엘 9:23; 10:11,19).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나 ’은총을 입은 자’나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 노아가 의인이었던 것처럼(창 6:9),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인 다니엘도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는 말일 것이다. 다니엘은 율법의 규정을 어기고 만든 바벨론의 음식을 먹으므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단 1:8) 야채와 물만 마실 정도로(다니엘 1:12) 율법을 지키는데 철저하였고, 다리오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조서가 공포된 것을 알면서도(다니엘 6:7), 매일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할” (다니엘 6:10)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철저히 지켰다. 다니엘의 친구들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는 장면에 다니엘의 모습은 보이 않지만(단 3장), 다니엘도 그의 친구들과 함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 그의 다른 신앙행위로 보아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다니엘을 노아, 욥과 마찬가지로 의인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E. 아벨

노아, 아브라함, 욥, 다니엘 외에도 신약성경은 구약의 인물인 아벨(마태복음 23:35; 히브리서 11:4)과 롯(베드로후서 2:7)을 의인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의인 아벨’(마태복음 23:35)이라고만 말씀하셨으므로 아벨을 의인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히브리서 11:4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dikaios: 의인)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고 말함으로써, 아벨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말한다. 히브리서는 아벨이 ‘의로운 자‘ 즉 의인이라는 증거를 얻은 이유를 두 가지로 든다. 첫째 이유는 ‘믿음’이고, 둘째 이유는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 즉 행함이다. 아벨은 믿음과 행함으로 의인이라고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강조한 장으로 유명한데, 11장은 성경인물들의 믿음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함도 동시에 강조한다. 노아는 믿음으로 순종하여 “방주를 준비하여 그 가족을 구원하였고”(7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8절),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며”(17절),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27절),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30절),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다”(31절). 이렇게 본다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은 믿음의 사람임과 동시에 행함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아벨도 믿음의 사람임과 동시에 행함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F. 롯

베드로후서 2:7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dikaios) 롯을 건지셨으니”라고 롯을 ‘의로운 사람’(dikaios) 즉 ‘의인’이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는 롯이 의인이라는 이유에 대하여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2:7 전후의 문맥을 보면 왜 롯을 의인이라고 말하는지 그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7절 전후에서 탐심(3절), 범죄한 천사들(4절), 노아시대의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5절),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6절), 소돔과 고모라의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과(7절) 불법한 행실(8절), 불의한 자(9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함과 비방(10절),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김과 속임수(13절),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고 탐욕에 연단된 마음(14절), 발람의 길을 가며 불의의 삯을 사랑함(15절), 허탄한 자랑의 말을 하며 그릇되게 행하고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함(18절), 멸망의 종들(19절) 등에 대하여 말한다. 이러한 부정적인 범죄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거론하면서, 그들과 대조되는 인물로 거론한 사람이 바로 롯이다. 특히 롯은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고 날마다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의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다”(7-8절)고 말함으로써 롯은 이런 범죄행위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본다면 롯은 범죄행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의롭게 산 의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롯은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은 의인이었다.

 

(2) 신약의 의인들

신약에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들이 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사가랴와 엘리사벳, 아리마대 요셉, 고벨료가 그들이다.

A. 마리아의 남편 요셉

마태복음 1:19는 ‘요셉은 의로운 사람’(dikaios) 즉 ‘의인’이라고 말한다. 요셉을 의인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신명기 6:25; 누가복음 1:5-6). 의인인 요셉이 한 일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1:18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라고 말한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요셉이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잉태 사실을 듣고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성령잉태 사실을 듣고 요셉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는”(19절) 결단을 내렸다. 19절에서 요셉이 하려고 한 일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일은 마리아의 성령잉태 사실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동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마 1:18).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동거하지 않은 상태에서 잉태한 사실이 밝혀지면, 성령잉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으로 간주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신명기 22:23-24; 요한복음 8:3-5).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요셉은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 “드러내지 아니하고” 라고 번역된 헬라어 deigmatizō는 “어떤 사람을 공개석상에 드러내는 것”인데, 특히 어떤 사람의 잘못을 사람들에게 공개해서 수치를 당하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은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라고 번역했다. deigmatizō의 뜻을 잘 드러낸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약혼자 마리아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를 돌로 쳐죽이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려는 요셉의 행위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의인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요셉이 이렇게 한 것은 하나님이 마리아를 통하여 하시려는 큰 일이 방해받지 않고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을에서였음이 분명하다. 인류 역사상에 처음 있는 성령잉태를 믿고 받아들인 요셉의 믿음도 마리아의 믿음 못지않게 위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마리아 없이는 예수탄생이 불가능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의인 요셉이 성령잉태를 이해하고 믿고 도와주지 않았다면, 예수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두 번째 일은 “가만히 끊고자”(apoluō) 한 일이다. 헬라어 apoluō란 말은 파혼한다는 의미이다. 마리아의 성령잉태를 믿고 받아들인 요셉이 왜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을까? 요셉이 파혼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가 간음했다고 생각해서 파혼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파혼하려한 이유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20절)고 한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였다(누가복음 1:35).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를 데려와 동침한다는 것은 의인인 요셉으로서는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고”(출애굽기 33:20), ”성물만 만져도 죽는다“(민수기 4:15; 사무엘하 6:6-7)는 이스라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요셉으로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성스러운 마리아를 데려와 동침한다는 것은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와 동침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 그래서 조용히 파혼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요셉의 판단은 일면 옳은 것이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야기될 파혼 이후의 문제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판단이었다. 마리아의 문제를 공개석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리아와 파혼하는 것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파혼하면 마리아가 요셉과 상관없이 잉태했다고 판단하고, 성령잉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마리아를 간음죄로 몰아 죽이려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두 문제를 해결할 절묘한 방법을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알려주셨다. 그것이 바로 마리아를 데려오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는”(1:25) 방법이었다.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여” 마리아가 간음의 혐의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여 그의 집에서 안전하게 구세주 예수를 탄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요셉 자신은 아들을 낳기까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와 동침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두려워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의인 요셉이 한 일들이었다. 이러한 요셉을 성경은 의인이라고 부른다.

 

B. 사가랴와 엘리사벳

누가복음 1:6은 “이 두 사람(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의인”이라고 말하고, 곧 바로 이어서 그들이 의인인 이유를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로 말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의인이 된 것은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그들의 행함 때문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들이었다.

 

C. 아리마대 요셉

누가복음 23:50은 아리마대 요셉이 ‘의로운(dikaios) 사람‘이라고 말한다. 요셉을 의인이라고 말한 것은 그가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신명기 6:25; 누가복음 1:5-6). 누가복음 23:50-51은 요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dikaios)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의인인 요셉은 두 가지 선한 일을 했다. 첫째 선행은 요셉이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일이다(51절). 요셉은 유대 민족의 최고 의결기관인 공회(산헤드린)의 의원이었지만, 이 공회가 예수를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할 때에(막 14:64) 찬성하지 않았다.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인(누가복음 23:47)인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불의한 일에 찬성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의인이었다. 둘째 선행은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둔”선행이었다(누가복음 23:52-53절). 사형범인 예수의 시체를 요구해서 장사지낸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서 니고데모와 함께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서(요한복음 19:40), 자기의 새 무덤에 명예롭게 장사지냈다. 요셉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었다.

 

D. 고넬료

사도행전 10:22는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dikaios)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God-Fearer)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란 이방인으로서 할례를 받고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의무를 가진 개종자(proselyte)는 아니지만, 유대교의 회당예배에 참석하고 모세의 율법의 일부 특히 윤리적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고넬료는 이런 부류에 속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2,4,3은 고넬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절: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4절: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31절: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기도와 구제’에 힘쓰는 사람이었다. 고넬료의 행동 가운데서 유대인들이 특히 칭찬한 것은 그의 구제였을 것이다. 구제는 행함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기도와 구제를 많이 하는 행함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고넬료를 사람들은 의인(dikaios)이라고 불렀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는 사림었을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었다.

 

소결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갖춰야 할 의(義)에는 두 종류의 의가 있다. 하나는 믿음으로 얻는 의요, 다른 하나는 행함으로 얻는 의다. 그런데 루터는 이 두 종류의 의(義) 가운데서, 믿음으로 얻는 의 한 종류만을 말하고, 행함으로 얻는 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루터는 1519년에 믿음으로 얻는 의와 행함으로 얻는 의 즉 “두 종류의 의”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 다음 해인 1520년에 “크리스챤의 자유”에서 “오직 믿음으로만의 의”를 말한 이후부터는 더 이상 행함으로 얻는 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믿음으로만의 의”에 대해서만 말했다. 이렇게 본다면 루터는 두 종류의 의 가운데 한 종류만을 말했으므로, 절반의 진리만을 말한 셈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완전해야 한다’(히브리어 tamim, 헬라어 teleios) 고 말한다.

창세기 17:1: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tamim).”

신명기 18:13: “너(이스라엘)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tamim).”

사무엘하 22:24: “내(다윗)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tamim)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시편 18:23: “또한 나(다윗)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tamim)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마태복음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teleios).”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 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teleios)로 세우려 함이니”

마태복음 5:48과 골로새서 1:28에서 말하는 ‘완전하다’는 헬라어 teleios는 히브리어 tamim과 마찬가지로 ‘완전하다’(perfect), ‘흠이 없다’(blameless)는 뜻이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완전해야 한다’(히브리어 tamim, 헬라어 teleios)고 말한 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tamim)”(창세기 17:1)는 말씀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즉 ‘의인’이 되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창세기 6: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완전한 자‘(tamim)는 ‘의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성경의 의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만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는 의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기독교인의 삶의 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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