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9) 판단(判斷)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사람은 살아가면서 서로 평가하고 평가 받으며 산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판단과 평가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널뛰기를 하거나 연연한다면 미숙한 자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본분마저 잃고 사람의 평판에 좌우되어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재능을 땅에 묻는 한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판단과 분별력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린도인들은 바울과 아볼로 그리고 베드로 같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행동들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사역자들의 저격수 노릇을 자청하였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역자들을 사랑 없이 판단하는 죄악은 실로 매우 보편적(universal)인 죄악이다.

청지기의 핵심 임무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주인만이 청지기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와 눈치를 보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더 무게를 두었다. 심지어 자신마저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유보했다. 비록 자신을 자책할 아무 거리도 없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지만 자신을 판단하지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종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의 이런 저런 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실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 고린도교회 내에 있었기에 이에 대한 답변을 한다. 바울이 먹고 결혼하고 사례를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이런 권리를 쓰지 않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고전 9:12).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그리고 나는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이 세 가지 물음은 모두 존엄성이라는 개념으로 흘러 모인다는 말을 한 사람은 ‘삶의 격’을 쓴 독일 철학자 피터 비에리(Peter Bieri, 1944, 스위스 生, 하이델베르크 철학부 박사)다. 바울은 여기에 한 가지 더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그리고 자신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충성이라고 말한다.

 

1. 자신에게 판단 받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나’의 문자적 의미는 ‘사람의 날들에게’이다. 도대체 어떤 날을 말하는가. 고린도전서 3:13에서 말하는 날은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그날을 말한다. 본문의 ‘사람의 날’, 즉 ‘인간의 날’에 내려는 인간들의 판단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는 결정적인 날도 아니요 결정적인 판단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이야말로 진짜 그 날이다.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가 아들러 심리학을 풀어쓴 ‘미움 받을 용기’에서 남 눈치에 신경을 끄라, 인정 욕구를 없애려면 상대의 기대에 연연하지 말고 일 자체에 만족을 느껴라, 현재란 미래를 위한 리허설이 아니라 본방이라 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이 땅은 리허설이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때가 본방이라고 한다.

법정에서는 피고가 검사로부터 판단을 받고 판사로부터 판결을 받는다. 사람의 판단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가? 법정에서 판단하는 것이 모두 옳은가? 의과사가 있는 것처럼 법정에서 잘못 판단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는 일이 한 두 번 일인가? 바울 사도는 어떤 사람의 판단이든 자신에게 결정적인 것이 못 되므로 자신도 이 인간들의 판단들 중의 또 다른 것에 불과한 판단을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본문 3절의 ‘판단하다’에 해당하는 ‘ajnakrivnw’(아나크리노)의 의미는 ‘조사하다, 시험하다, 자세히 검사하다’이다. 대개는 사법적인 심문에 관계되는 용어이다. 바울이 이 단어를 본문에서 풍자적으로 쓰고 있다. 세상이 첨단기술로 촘촘이 연결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사람을 화성까지 실어 보낼 세상이 됐지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되는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 말이 유효할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심지어 법정의 판단과 심문이라고 흔들리지 않는다. 세상의 인간의 평가와 마지막 날 하나님의 판단 사이에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Raphael, 1483-1520; St Paul preaching

바울은 자존감이 높은 리더였다. 고린도 사람들의 비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존심과 구별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주위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상관이 없이 일관된 마음가짐으로 자기 자신을 대한다. 이런 자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위축되지 않는다. 또한 자기보다 못하다고 우월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존심이 낮게 되면 자신의 가치가 타인과의 관계로 결정짓게 된다. 유별하게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은 남들과의 관계에서 쉽게 상처받고 열등감을 느껴 자기방어적으로 그러는 경우가 많다. 자존감이 상처를 입을 때가 있다. 남들과 비교를 통해서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자는 자존감이 상처를 입은 자다. 그는 끼가 있는 사람이었다. 주인에게 인정을 받은 자가 아니던가. 끼를 ‘talent’로 번역하지만 ‘talent’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면 ‘재능’이 된다. 그는 재능이 검증 받은 주인의 사람이다. 주인의 재산을 갖고 사업을 할 수 있을 일꾼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존심이 낮은 자다. 앞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자와 자신을 비교했을 것이다. 화살은 주인에게 돌린다. 주인이 엄격하다는 것이다. 한 달란트는 로마에서 사용하는 화폐로 무게는 20.4kg, 통화는 6,0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자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의식에 빠져 그 막대한 자본으로 일할 의욕을 상실하였다고 변명한다. 자기파괴적인 질문은 스스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힌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를 따라 충성스럽게 일하면 된다. 남들이 주변에서 어떤 말을 할지라도 귀동냥을 할 이유가 없다. 오직 그날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 대로 판단하실 것이고, 칭찬과 보상을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윤이라고 대부분 말한다. 그러나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기업의 존재 이유는 이윤이 아니라 고객에 있다고 하였다. 고객의 욕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객에게 봉사할 수 있는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이라는 애기다. 이런 관점에서 드러커는 ‘경영은 인간에 관한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영적 리더들은 어떤 목적으로 갖고 목회를 하는가? 고객에 해당하는 성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인가? 세상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빵바구니를 들고 나가야 하는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어디에 촉각을 세워야 하는가? 복음을 맡겨주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충성할 수 있다.

 

2. 주변의 판단에 요동하지 않는 사람

바울은 고린도교회성도들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이라 말한다. ‘매우 작다’는 것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또는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민(無mean) 세대, 즉 2030세대가 추구하는 무자극, 무맥락, 무위(無爲) 휴식과 다르다. 상대의 판단을 무시하거나 흘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두지 않는 뜻이다. 최종판단의 때가 있고, 최후심판자가 있고, 최후변론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땅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께로부터 칭찬이 있음을 확신하기에 사람들의 말에 널빤지처럼 놀아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 특히 견유학파(Cynics)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무시하였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판단 뿐 만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대한 판단조차 괘념치 않았다. 바울의 뇌 속에 아난다마이드(anandamide)란 물질이 남보다 유난히 많이 생산되는 특별한 사람일까. 이 물질이 많은 사람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속된 말로 ‘뽕이라도 맞은 듯’ 즐거운 기분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일명 ‘천연 마리화나’라고 하는 아난다마이드의 어원은 바로 행복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난다(ananda)이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을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는 말들에 대해 ‘매우 작은 일’로 여겼다.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의 평판에 부하뇌동하지 않았다. Malcolm Gladwell은 저서 ‘블링크-첫 2초의 힘’에서 약 2초 동안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적 판단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2초 안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 즉 Blink가 편견에 의해 흐릴 위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웠다. 무엇이 이토록 바울로 하여금 다른 사람, 특히 성도들의 판단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무신경, 무고통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고전 2:3에서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이런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사람이 사람의 평판에 초연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바울이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고자 하였을 때 자유인들의 판단이 뒤따른다. ‘자유인이 왜 그래’라는 ‘너 전달법’(You-massage)로 규정한다. 바울은 나 전달법(I-massage)로 낙인찍는 말을 충격을 흡수한다. 판단의 언어를 감정의 언어로 바꾸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다. 바울은 신앙의 언어로 바꾼다.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청지기, 복음의 종이다. 바울이 스스로 종이 된 목적이 무엇인가. 영혼구원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맡은 청지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함이다(고후 4:2; 5:11 참조). 종은 주인으로부터 ‘잘 했다’라는 칭찬 한 마디면 그만이다. 주변으로부터 어떤 혹평과 모욕과 싫은 소리를 들어도 주인이 맡겨준 일을 묵묵히 감당하다가 마지막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수고를 그치라 위로하고 잘했다 칭찬과 함께 상을 주시면 그동안 모든 눈물과 애환과 고생은 잊어 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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