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사연으로 얽힌 인생이 세계와 맞물려 역사가 되고

노사연이라고 사연이 없을까? 사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우연한 만남도 지내놓고 보면 필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삶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만남과 헤어짐이 그렇고 나아가고 물러섬이 그러하며 울고 웃음이 그러하다. 그래서 그런지 사연 많은 대중들은 이상하리만치 노사연의 <만남>을 애창한다. 곡도 어렵지 않고 마음에 와 닿는 가사 때문인 듯하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세상이 사연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요 인생이 온갖 사연으로 엮여있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사연을 “일의 앞뒤 사정과 까닭”이라 정의하고 있다. 인생은 수많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인생사, 인생 만사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우연이란 전혀 없다. 하나님의 필연이 우리의 삶을 매순간 의미 있게 엮어간다.

시간의 모래사막을 건너는 사람이 너와 나로 만나면 사건이 만들어지고 이 사건에서 사연은 태어난다. 그런데 모든 일에는 그런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와 전후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경험을 어찌 필설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평생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옅고 짙은 관계를 맺으며 우리의 삶은 영글어간다. 이런 저런 사연이 마치 초여름의 아스팔트에 복사열로 인해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저 하늘의 뭉게구름 닮았다. 저마다의 사연을 설명하려면 일의 전후사정과 이유를 밝혀야 하니 자연스레 이야기가 형성된다. 역사는 큰 틀에서의 사연이다. 일의 전후 사정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한 나라나 세계와 맞물리게 되면 모두의 이야기인 역사가 되는 것이다. 오늘은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로서의 사연에 초점을 맞출까 한다.

 

인생, 자석의 양극처럼 끝없는 사연들의 밀당

모든 이야기에는 메시지가 있다. 신화와 전설, 동화와 소설을 듣고 읽으면서 우리가 재미있어 하는 것은 그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 때문이요, 감동을 받는 것은 그 메시지가 이미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사연은 눈물겨울수록 비장감을 더한다. 그래서 사연은 고백과 수기, 간증과 증언의 형식을 취할 때 청중의 눈과 귀를 강하게 사로잡는다. 사연은 연인, 친구와 같은 친밀 관계, 고부, 원수와 같은 긴장 관계처럼 밀도가 높을수록 깊고 아린 맛이 상승한다. 인간이 숨 쉬며 활동하는 이 세상에는 온갖 사연이 만발하고 사연을 주고받으며 나누는 눈물과 웃음 속에 세월은 흘러간다. 그 세월의 흐름과 함께 너와 나는 자석의 양극처럼 끌어당기기와 밀어내기를 반복하면서 한 인생을 엮어간다.

돼지 국밥 한 사발에도 결코 말아먹을 수 없는 진지한 사연이 숨어 있고 단순한 노랫말 한 구절에도 피눈물 섞인 대중의 애환이 잠겨 있다. 자질구레한 이야기 속에도 시답잖은 너스레라고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진지함과 뭉클함이 있어 우리의 삭막한 가슴을 적신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숨과 절규에 무관심하던 대중은 기막힌 죽음 뒤에 조명되는 그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비인간적 처우에 분노하지만 때늦은 공감이다. 이와 유사한 사연을 끄집어내라면 끝도 없이 이어지리라. 사연은 산 자들이 서로 나누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다. 사연이 지닌 슬픔과 고통의 무게는 제각각일지라도 정도나 강도의 차이와 달리 모두 진지함으로 채색되어 있어 가벼이 대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사연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비슷한 내용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사연이 더 애달프고 가슴 시리다. 사연의 속성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도 일단 자신의 사연이 부각될 때에 한해서다. 남의 기막힌 사연을 듣는 순간에도 자신의 사연과 연관시켜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의 사연이 더욱 기막히다고 자신을 설득한다. 며느리의 혹독한 시집살이에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자신이 당한 배신의 쓰라림보다는 낫다고 여긴다. 파란만장한 연애사를 듣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이 극복해야 했던 원한 이야기보다는 한결 덜하다고 판단을 내린다. 실제로는 덜 아파도 사연이 되면 더 아프다.

 

수많은 사연들로 울고 웃던, <이산가족찾기>

<인간극장>이나 <동행> 같은 프로그램은 사연을 극화하여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건드리는데 한 몫 한다. 완만하게 전개되는 한 사람의 사연이 노련한 연출에 카메라 앵글의 조화까지 곁들이면 극적 요소가 더해져 감동의 깊이를 배가시킨다. 사랑과 이별, 득병과 치유, 결혼과 이혼 등은 사연 감의 좋은 소재들이다. 옛 스승을 찾는다든지 헤어진 형제자매 간의 만남을 주선한다든지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게 하는 각종 프로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것으로서 집중력이나 몰입도가 높은 편이다. 국가적 재앙이나 위기의 바람이 잦아들면 사연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남북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되어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결정되면 전쟁과 난리를 겪으며 생겨난 온갖 사연들이 봇물을 이룬다.

최초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1983년 6월 30일부터 138일간, 장장 453시간 45분에 걸쳐 세계 최장 기간을 릴레이로 방송한 기록을 세웠다. 여의도 광장에 몰려든 인파 하며 다양한 크기의 플래카드, 깨알 같은 글씨에서부터 큼지막한 글씨로 혈육을 찾는 종이쪽지가 곳곳에 나붙었다. 그때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그 방송을 지켜보던 온 국민이 울었다. 실로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는 표현이 실감 날 정도였다.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그것은 민족적인 사연을 대대적으로 연출한 한풀이 같은 것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가 이산가족 찾기 주제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만인의 노래가 되다시피 했다.

 

사연들의 보물창고인 성경

미국에서는 재채기를 크게 해도 전혀 흉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듣는 사람이 누구든지 상대에게 “bless you!”(축복합니다)라고 말하길 잊지 않는다. 그게 관습이고 아주 자연스럽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많이 사용하는 표현 중의 하나다. 이런 말을 하게 된 유래가 몇 있는데 그 설들이 곧 “bless you!”에 대한 사연이다. 기원전 8세기 말엽에는 갑자기 심장이 멈췄을 때 “bless you!”라 말하면 심장이 다시 뛴다고 믿었다는 설이 있다. 6세기 말엽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교황이 이 말을 써서 병세가 호전되어 민간에서 쓰기 시작했다는 설, 재채기를 할 때 악마가 빠져나가므로 축하의 뜻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외국인들은 웬만한 일에도 “Bless you!”라는 표현을 아주 잘 쓰고 듣기에도 과히 나쁘지 않다.

사연이라면 성경의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에덴동산을 둘러싼 아담과 하와 그리고 뱀 이야기는 인류 타락의 직접적 원인이 될 만큼 사연의 무게로 따지자면 메가톤 급이다. 땅의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인류가 언어의 혼잡으로 인해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던 바벨탑에 얽힌 사연, 깡패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던 입다가 어떻게 사랑하던 무남독녀를 죽게 내버려둬야 했는지 서원과 관련된 기막힌 사연, 목동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사연, 호세아 선지자가 왜 창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어떻게 배신한 아내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한 신비한 사랑의 사연 등 구약은 신약에 비해 특이한 사연들의 보물창고라 할 만하다.

 

사연다운 사연은 가공되지 않은 순수함에 있어

사연은 저마다 독특하다.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르다. 사연의 차이는 사물을 바라보고 사건을 이해하고 사랑을 저울질하는 사람의 경험이 다름에 연유한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누구의 사연도 경홀히 다룰 수 없다. 내 사연이 눈물겹다면 상대의 사연도 눈물이 홍수를 이룰 정도임을 인정해야 한다. 한 맺힌 사연만이 사연다운 것은 아니다. 한을 푸는 것도 사연답다. 좋은 친구란 흉하고 길한 사연을 담담히 나눌 수 있는 관계다. 가족이 좋은 점은 비슷한 사연의 둥우리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사연 때문에 척을 져야 할 이유가 그만큼 줄어들기 까닭이다. 친구 또한 그런 사이다. 즐거운 사연에 함께 웃고 슬픈 사연에 함께 눈물지으며 서로의 친밀함을 더욱 깊게 만든다.

우리는 사연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사연은 외로움을 잘 타고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을 타고 멀리 흩어지기 바란다. 왜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대단한 사연인양 말하고 싶어 할까? 홀로 감당키 어려운 삶의 무게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남의 사연에 귀를 쫑긋할까? 내 사연이 얼마나 극적임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사연을 주고받음에 있어 마음의 빗장을 열어두는 것은 삶의 여유요 지혜다. 바람이 되어 저마다의 사연을 사람 사는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 곧 삶이다. 삶은 사연이 있어 농익고 사연을 나눔으로 지탱되기에 바람의 노고가 무색하지 않도록 사연다운 사연이 우리 주변에 피어나기를 고대한다. 사연다운 사연이란 어떤 각색이나 첨가가 배제된 순수하고 진솔한 삶의 이야기다.

 

사연의 보고(寶庫)인 성경을 가까이 하라!

조작된 사연은 대중을 기만하는 죄다. 생명공학의 급부상으로 불치 환자 가족들의 희망이 되었던 황우석 교수는 줄기세포 논문이 날조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하루아침에 국민 영웅에서 사기꾼으로 전락했다. 국가의 위신은 물론 전 국민이 한동안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것은 한 사람의 몰락이 아니라 관련된 숱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악몽 같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 조작된 여론, 조작된 통계처럼 조작의 영이 활발함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나라가 조작된 사회로 변질되는 것을 방지시켜주는 버팀목 됨에 있다. 교회는 진위(眞僞)와 정사(正邪)를 재는 믿음직한 다림줄이어야 한다. 강단에서 설파되는 메시지에 온갖 허위와 기만을 부서뜨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를 보여주는 진리의 표준이 서려 있지 않다면 문제다.

아름다운 남도의 섬, 제주 도민들은 지금도 <4.3사건>이란 아픈 역사의 흉터를 안고 살아간다. 잊은 듯 살아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의 진실은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다. 무차별 학살인지, 민주 항쟁인지 왈가왈부한다. 진상조사 보고서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다른 관점에서 발표된다. 국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 사상적 잣대를 들이대는 한 이 사건은 영원히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둘 중의 하나는 살아남은 자들과 죽은 자들을 우롱하고 있다. 사연은 역사적 논증과 구체적 자료에 의한 진실 규명이 이루어졌다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여부를 떠나 사연은 상하고 아픈 이들에겐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한다. 그들의 아픔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온 모든 이들의 것이다. 그 사건을 올바로 해석하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당연한 몫이다.

무색무취라 해도 사연은 처음과 나중이 모든 과정과 함께 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가장 보편적인 삶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짙은 감동의 여운을 길게 남기는 것은 진실한 사연이기에 그렇다. 인간이 죄인 된 사연을 한 번 들여다보라! 그 죄인이 어떻게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탈바꿈했는지 살펴보라! 성경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한편에는 시커먼 죄의 색깔로 뒤덮여 있고 다른 한편에는 빨간 핏빛으로 물들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천사장이 사탄으로 전락한 사연은 어떠하며 하나님이 사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또 어떠한가? 정녕 당신이 사연에 진실하다면 상상할 수 없고 표현하기에도 벅찬 사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실의 저장고에서 뛰쳐나온다. 사연의 보고(寶庫)인 성경을 가까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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