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종교개혁운동 시리즈 - 제3장 두 종류의 행함

제3장 두 종류의 행함

두 종류의 믿음이 있고, 두 종류의 의(義)가 있듯이, 행함에도 두 종류의 행함이 있다.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이전의 향함’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이후의 행함’이다.

1. 이신칭의 이전의 행함: 이신칭의에 필요 없는 행함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이전의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한다.

1) 로마서 3:20-28

바울은 롬 3:20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3:28에서도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단계에서는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탄생할 때,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어떤 공로를 세우고 탄생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공로를 세우고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단계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는 단계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는 것은 우리의 어떤 행위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부모의 자녀로 탄생하는 것이 전적인 부모의 은혜로 되는 것과 같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단계에서는 행함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바울이 롬 3:20-28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단계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가? 그 이유는 이 단계에서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2. 행함으로 얻는 의 (이행칭의 以行稱義), 5) 로마서 8:1-4) 살펴본 바와 같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단계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다음 단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그래서 바울은 롬 3:28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 것이다. 아래에서 살펴보려는 로마서 4:1-3; 갈라디아서 2:16; 에베소서 2:8-9도 롬 3:20-28과 같은 견해를 말하고 있다.

 

2) 로마서 4:1-3

로마서 4:1-3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2-3절)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창세기 15:6) 행함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3) 갈라디아서 2:16

갈라디아서 2:16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때는 행함이 필요 없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개정개역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한글번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헬라어 성경에는‘오직’이라는 말이 없다. 그리고 헬라어 성경을 따르는 세계의 다른 번역들은 대부분 ‘오직’이라는 말을 넣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를 바로 잡아 ‘오직’을 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라고 번역했다. 16절 한 문장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믿음으로 얻는 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는 의다. 마치 갓난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어떤 행위를 통해서 공로를 세우고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어떤 행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우리의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 않다.

 

4) 에베소서 2:8-9

에베;소서 2:8-9에서도 “바울은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을 강조한 이유는, 아무도 구원이 자기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단계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필요 없다. 그러나 이에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함으로써 이신칭의를 주신 것은 선한 일을 하는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이신칭의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신칭의를 받는 데는 행함이 필요 없으나,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이신칭의를 받은 사람의 의무임을 10절은 강조한다.

 

2.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 필요한 행함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 행함이 필요하지 않았으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이후에는 행함이 필요함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한다.

1) 창세기 17:1; 18:19

바울은 로마서 4:1-3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 행함이 필요 없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 행함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창 17:1에서 다음과 같이 행함을 요구하셨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완전하라’(tamim).”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에게(창세기 15:6), 이제는 행함으로도 완전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은 이 명령대로 순종하여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이미 야고보서 2:21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2:21)

또 창세기 18:19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아브라함이 그의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공의(tsedaqah)와 정의(mishpaṭ)를 실천하도록 가르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자손들을 가르쳐야 하는 아브라함도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행함이다. 공의와 정의를 실천해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다음에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흠없이 살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았다. 이신칭의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그러나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아브라함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고 이를 자손들에게도 가르쳐서 자손들도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할 의무가 주어졌다. 이신칭의를 받기까지는 행함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신칭의 이후에는 행함이 필요하게 되었음을 18:19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2) 마태복음 19:16-19(마가복음 10:17-31; 누가복음 18:18-30)

재물이 많은 청년에 대한 이야기는 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등 세 복음서에 다 나온다. 이 청년(마가복음 10:17은 ‘한 사람’, 누가복음 18:18은 ‘관리’)은 예수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이 청년은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하고 다시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 출애굽기 20:12-16과 신명기 5:16-20에 나오는 십계명 가운데서 이웃 인간에 관한 계명들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 19:18을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이 5-9계명을 지키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신다(마가복음 10:17-31; 누가복음 18:18-30에는 이웃사랑에 대한 조항이 빠져 있다). 재물이 많은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다”(20절)고 한 것으로 보아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이 청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므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신칭의를 받은 청년에게 예수님은 영생을 얻으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상은 유대인 청년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기독교인들도 “계명들을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최소한 십계명을 지키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부자청년에 관한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한 의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15에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21; 15:10 참고)고 말씀하셨다. 또 요ᅡᆫ복음 13:34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 참고)고 하셨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인간에 관한 5-10계명을 지키고,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믿는 예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명령하신 새 계명이다. 예수님을 믿고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서로 사랑하고” “인간에 관한 5-10계명을 지키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마태복음 19:16-19에서 예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치시는 말씀이요 교훈이다. 다시 말하면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서로 사랑하고”“인간에 관한 5-10계명을 지키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행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3) 누가복음 10:25-28

누가복음 10:25-28에 율법교사가 등장한다. 율법교사는 이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므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향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한다. 이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다. 그러자 그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누가복음 10:25-28은 신명기 6:5와 레 19:18의 인용문으로서, 이 두 말씀은 10계명 전체의 요약임과 동시에 온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다(마태복음 22:40). 이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고 이신칭의를 받은 사람도,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두 큰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누가복음 10:25-28; 마태복음 22:34-40; 마가복음 12:28-34)을 실천해야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행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4) 로마서 13:8-10

로마서 13:8-10에서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로마에 있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한 말이다. 이신칭의 받은 사람은 이신칭의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하는” 등 십계명을 지켜야 하고, 또“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남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행함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5) 고린도전서 6:8-11

고린도전서 6:8-10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1-7절(특히 4절,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에서 말하는 고린도 교인들이다. ‘너희’는 예수님을 ‘주’(Kyrios)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 가운데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죄를 짓는 사람들 즉 행함이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8-10절은 말한다. 그들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속이고, 음행하고, 우상 숭배하고, 간음하고, 탐색하고, 남색하고, 도둑질하고, 탐욕을 부리고, 술 취하고, 모욕하고 속여 빼앗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바울은 두 번이나 경고한다(9,10절). 이 사람들은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행함이 없기 때문에, 불의를 행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는 사도다(로마서 3:26-28; 갈라디아서 2:16). 그런데 고린도전서 6:8-10에서 바울은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행함이 없으면, 불의를 행하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이 말한다. 여기에서 행함은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 이신칭의를 받을 때는 행함이 필요하지 않지만, 이신칭의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행함이 필요하고, 이 행함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6) 고린도전서 13
로마서 3:20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하고, 이어서 3:28에서도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또 갈라디아서 2:16에서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때는 행함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이신칭의를 위해서는 행함이 필요 없다고 말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행함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행함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불신자에게 한 말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한 말이다. 이신칭의를 받을 때는 행함이 필요 없었지만. 이신칭의를 받은 다음에는 행함이 필요하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사랑 없는 믿음이 무익함을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방언, 예언, 지식, 믿음은 성령의 은사에 속한다(고전 12:8-10). 그런데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한다.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는 생명가 아니다.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또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 없는 믿음 즉 행함 없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생명이 없는 비존재”를 의미한다. “생명이 없는 비존재”라는 말은 구원이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 없는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롬 3:28에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믿음’을 강조한 바울이 고린도전서 13:2에서는 사랑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행함이 구원의 필수요건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상반되는 것을 말하는 바울은 모순이 아닌가? 아니다. 모순이 아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28에서 말하는 행함은 이신칭의를 얻을 때의 행함이므로 이신칭의에 불필요하고, 고린도전서 13:2에서 말하는 행함은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이므로 구원에 필요하이기 때문에 바울의 말에는 모순이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4-7에서 다음과 같이 사랑을 정의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15가지 품성(characters)을 의미한다. 처음 두 가지 사랑(오래 참고 온유하며)과 마지막에 나오는 5가지 사랑(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딤)은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긍정적인 품성들이고, 그 사이에 들어 있는 8가지 품성(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은 기독교인이 가져서는 안 될 부정적 품성들을 안 하는 것이다. 이 15가지 사랑을 실천하면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며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이 15가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고, 심하면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도 할 수 있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고린도전서 12:28-30 참고). 그러나 그들은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혹은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12:15-16) 하거나, 혹은 “눈이 손더러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고린도전서 12:21)고 하는 등 교인들 사이에서 갈등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그 이유는 이 15가지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13장에서 가장 큰 은사인(12:31) 15가지 사랑을 가진 기독교인이 되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런 사랑을 가지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13:1), “아무 것도 아닌 존재”(13:2) ‘생명 없는 존재’가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바울은 경고한다. 그래서 이 15가지 사랑은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의 기독교인이 반드시 행해야 할 필수적인 행함이다. 이 사랑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요, 구원이 없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이 말하려는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이신칭의 이후의 사랑 즉 행함은 믿음과 함께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7) 갈라디아서 5:16-23

갈라디아서 5:16-23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16a에서“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 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신칭의를 받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22-23절에서 말한 ‘성령의 열매’도 예수를 주(主)로 믿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다. 여기서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하는 말이다. 성령을 모르는 비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2:16에서“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안다”고 말한 바울이 5:19-21a절에서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될 범죄적 행함들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19-21a절에서 말하는 16가지 범죄적인 행동들 가운데는,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될 4가지 율법들(음행, 우상숭배, 주술, 살인)과 12가지 비윤리적인 범죄들(더러운 것, 호색,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이 있다. 이 16가지 에 대하여 차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될 4가지 율법들은 음행, 우상숭배, 주술, 살인 등이다. 음행(porneia)은 간통(fornication), 간음(Hurerei)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KJV, RSV: fornication). 음행 즉 간음은 율법이 금지하는 제7계명이다(출애굽기 20:14; 신 5:18; 고린도전서 5:1; 6:13; 고린도후서 12:21). 우상숭배는 제2계명으로서 하나님이 강력히 금지하는 중요한 계명이다(출애굽기 20:4-5; 신명기 5:8-9). 살인(phonos)이 일부 중요한 사본들(Alexandrianus, Ephraemi, Baezae Cantabrigiensis, Seidelianus)에서는 ‘투기’(phthonos)와 ‘술 취함’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이 사본들을 따라서, KJV, NKJV, Vulgate, 한글흠정역 등은 ‘투기’와 ‘술 취함’ 사이에‘살인’을 추가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으로서 가장 중요한 계명 가운데 하나다(출애굽기 20:13; 신명기 5:17; 민수기 35:17,31). 살인이 갈라디아서 5:19-21a의 육체의 일에 포함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세 가지는 십계명에 속하는 계명들이다. 주술(pharmakeia)도 구약에서 강력하게 금지하는 범죄 가운데 하나다(신명기 18:10-12).

이들 4가지 율법들 외에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될 12가지 비윤리적인 범죄들은 더러운 것, 호색,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 등 12가지다. ‘더러운 것’(akatharsia)은 주로 음란, 호색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성적인 범죄(로마서 1:24; 고린도후서 12:21; 에베소서 5:3; 골로새서 3:5)를 포함한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범죄들을 의미한다(마태복음 23:27; 로마서 6:19; 에베소서 4:19; 데살로니가전서 4:7). 개정개역에서 ‘호색’으로 번역된 헬라어 aselgeia는 ‘방종’, ‘사치스러움’, ‘음탕’의 뜻을 가지고 있다. aselgeia를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방탕’으로 번역하였고, NIV는 ‘debauchery’(방탕, 주색에 빠짐), KJV은 ‘lasciviousness’(음탕), RSV는 ‘licentiousness’(부도덕함, 음탕) 등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전적 의미와 번역들을 고려하여 볼 때 aselgeia는 음란과 관련된 방탕한 범죄행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로마서 13:13; 에베소서 4:19; 베드로전서 4:3). 그런 의미에서 ‘호색’보다는 ‘방탕’이라는 번역이 더 나을 것 같다. ‘원수 맺는 것’(echthra)은 말 그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로마서 8:7; 야고보서 4:4)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지 못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원수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이런 원수 맺는 삶을 살지 말소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말씀한다(레위기 19:18; 잠언 25:21; 마태복음 5:43-44; 누가복음 6:27,35; 로마서 12:19-29). ‘분쟁’(eris)은 사람들과 싸우고 다투는 행위를 의미한다. 원수 맺는 것은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로마서 1:29; 13:13; 16:17; 고린도전서 1:10-11; 3:3; 3:3; 12:25; 고린도후서 12:20; 디모데전서 6:4; 디도서 3:9). 그리고 ‘시기’(zelos: 로마서 13:13; 고린도전서 3:3; 고린도전서 13:4; 고린도후서 12:20; 야고보서 3:14,16; 4:2), ‘분냄’(thumos: 고린도후서 12:20; 에베소서 4:31. 잠언 15:18; 22:24), ‘당 짓는 것’(eritheia: 로마서 2:8; 고린도후서 12:20; 빌립보서 2:3; 야고보서 3:14), ‘분열’(dichostasia: 로마서 16:17), ‘이단’(hairesis: 디도서 3:10; 베드로후서 2:1), 투기(phthonos: 로마서 1:29; 갈라디아서 5:26; 디모데전서 6:4; 디도서 3:3), 술 취함(methē: 잠언 20:1; 23:20-21; 26:9; 이사야 5:22; 누가복음 21:34; 로마서 13:13; 고린도전서 5:11; 6:10; 에베소서 5:18) 등도 기독교인이 피해야 할 일들이다. 개정개역에서 ‘방탕’으로 번역된 헬라어 kōmos는 ‘바카스신 축제에서 흥청망첨 먹고 마시며 노는 행위’를 의미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은 kōmos를 ‘흥청거리는 연회’로, 공동번역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것’으로 번역했다. 기독교인들이 하는 kōmos는 바카스신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겠지만, 흥청대며 먹고 마시며 연회를 일삼고 방종한 삶을 사는 것은(로마서 13:13; 베드로선서 4:3) 기독교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19-21a절에서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될 죄들에 대하여 말한 바울은 21b에서 그 결론으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갈라디아교회의 교인으로서 예수를 믿고 이신칭의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이신칭의 이후에 19-21a절에서 말하는 육체의 일들을 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율법들을 범하고 기독교의 윤리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즉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바울이 19-21a절에서 말하는 것들이 육체의 일이라고 경고한 것은 이러한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악행들을 하지 않는 행함은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이요 이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다. 이 행함은 구원에 필요한 행함이다. 이 행함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22-23절에서는‘성령 의 열매’를 맺는 선행을 하는 행함이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육체의 일’을 하지 않고,‘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19-21a절에서 말하는 죄를 짓지 않는 행함이 있어야 하고, 22-23절에서 말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2:16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안다”고 말한 것을 잘못 이해하면, 구원을 얻는 데는 율법을 행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5:19-23에서 율법과 기독교인의 윤리를 지키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에서 확인한 사실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 율법의 행함이 필요 없지만(갈라디아서 2:16). 그러나 2)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이신칭의를 받은 이후에는 행함이 필요하다. 즉 기독교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부정적인 일들은 해서는 안 되고(19-21a절),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긍정적인 일들 즉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은 해야(22-23절)“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 여기서 이신칭의 이후에 ‘악행을 하지 않는 행함’과 ‘선행을 하는 행함’은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8) 에베소서 5:3-5
에베소서 5:3-5는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받은(이신칭의) 에베소 기독교인들에게 한 말이다. 바울은 에베소서5:3-4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pleonexia)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말한 다음, 5절에서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pleonektēs)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3절과 5절에서 바울은 다른 죄들과 함께, 십계명 가운데서 3가지 중요한 계명들 즉 제2계명인 우상숭배, 제7계명인 음행(간음), 제10계명인 탐욕(탐하지 말라)을 언급하면서 이런 죄를 범한 자들은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이신칭의)을 받을 때는 행함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이신칭의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는 행함이 필요하고, 이 행함이 없이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은 필요한 행함이요 구원의 필수조건임을 또 한 번 확인한다.

9) 출애굽기 19:8; 24:3,7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출 24:1-11). 이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준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출애굽기 24:3,7). 이 단계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아직 준행하겠다고 약속하였을 뿐 아직 준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이나 계명을 지키거나 어떤 공로를 세워서 된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었다. 다만 이 언약을 할 때에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준행하겠다”고 약속하였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준행하겠다”고 약속만 하고 아직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례를 이미 지킨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마치 우리가 세례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사생활에 있어서나 공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적인 행동을 하시고저 약속하십니까?”하고 목사가 물을 때“예”하고 약속하고 이 약속을 아직 지키지 않아도, 세례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에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였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모두 책임을 지는 쌍무언약(雙務言約)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의무를 다 해야 이 언약이 계속 유지될 수 있는 언약이었다.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의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말씀과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복주실 것이지만(신명기 28:1-14), 만약 여호와의 말씀과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갖가지 저주를 내리고 결국은 망하게 하여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다른 땅에 가서 살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실 것이라고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신 28:15-68).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는 행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과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여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망하고, 주전 586년에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는 아직 율법을 지키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지만, 시내산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가나안 땅에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율법을 지키면 가나안 땅에서 복을 받으며 살 수 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 세계에 흩어질 것이라고 신명기 28장과 레위기 26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만 하고 아직 지키지 않았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지만, 율법을 행함이 언약의 조건이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을 때는 율법을 행함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다음에는 율법을 행함이 필요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영원히 복을 받고 사는 필수조건임을 알 수 있다.

10) 소결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두 종류의 행함에 대하여 말한다. 첫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때(이신칭의)의 행함인데 이 때에는 행함이 필요 없고, 둘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이후의 행함인데 이 때에는 행함이 필요하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두 종류의 행함이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다음에는 성경이 말하는 계명과 율법과 기독교윤리를 지키는 것이 구원의 필수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라고 매도하고, 여전히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루터의 말을 성경의 말씀 위에 놓는 사람들이요, 루터를 예수님 위에 놓는 사람들이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경우만을 말하고, 이 경우에 행함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이 경우에 행함이 필요 없다는 루터의 말은 맞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의롭다함을 받음’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신칭의의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의 경우도 있는데, 루터는 이 후자의 경우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이후의 행함이 필요하고, 이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는 두 종류의 행함 가운데서 하나만을 말했기 때문에, 절반의 진리만을 말했고 할 수 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다음에 행함으로 얻는 의(義) 즉 이행칭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루터의 칭의론을 따르는 사람들은 구원에 행함이 필요하다는 성경의 진리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얻음에는 믿음으로 얻는 의(義) 즉 이신칭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 이후에 행함으로 얻는 이행칭의의 의(義)도 필요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신칭의만 있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이행칭의도 함께 있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치는 구원의 길이다.

11) 행하는 방법

우리는 성경이 말씀한 행함들,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행함들을 세례 받자마자 다 행할 수는 없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믿음에는 젖을 먹는 단계도 있고(고전 3:2; 히 5:12-14), 모든 것을 먹을 만한 성숙한 믿음도 있다(롬 14:2; 히 5:14). 현재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부터, 낮은 단계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차례차례 행하도록 노력해가다보면, 점점 더 높은 단계의 계명과 율법까지도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1) 우리의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누가복음 10:27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마태복음 22:37-38; 누가복음 10:27-28). 이것이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2)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행함은 우리 힘만으로는 안 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율법과 계명들을 다 행할 수 없다. 바울사도도 고린도전서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울부짖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절망에 가까운 울부짖음을 토해 냈으나,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로마서 8:3-4에서 이렇게 말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육신으로는 연약하여 할 수 없지만, 성령의 도움을 받으면 율법의 의(義)가 이루어 질 수 있다. 즉 율법을 행함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바울이 롬 8:3-4에서 한 말이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계명들을 행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계명들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 3:10)는 바울의 말을 앞세우면서, 어차피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을 바에야, 아예 지키려고 시작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지키려고 하지 말고,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지금 단계에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지킬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 단계적으로 행하면 된다.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지만,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율법의 의(dikaiōma tou nomou)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롬 8:3-4). 어린이가 어른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어린이는 어린이의 단계에서 일을 하고, 조금 더 자라면 소년의 일을 하고, 그 다음에는 청년, 장년의 일을 하듯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3) 회개하여 용서를 구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지만,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로는 십계명을 어기기도 하고, 형제를 미워하고(레위기 19:17), 형제에게 노하고,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일(마태복음 5:22-28) 등의 죄를 범하게 된다. 이럴 때마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용서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죄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매일, 아니 범죄하는 매 순간 하나님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마태복음 18:22에서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는 것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인간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도 490번까지 만 아니라 무한히 우리 인간을 용서하실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 없이는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출애굽기 34:6-7; 느헤미야 9:17; 이사야 55:7; 다니엘 9:9; 에베소서 4:32; 골로새서 3:13; 요한일서 1:9). 우리는 날마다, 아니 수시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매일 새롭게 율법과 계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4) 날마다 두루마기를 빨아야 한다

율법 지키는 일을 비유로 말해보자. 진흙탕 길을 가는 A, B라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 모두 깨끗한 흰 옷을 입고 십리의 진흙탕 길을 조심조심 걸어갔다가 되돌아왔다. 진흙탕물이 묻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지만, 어쩔 수 없이 흰 옷에 진흙탕물이 묻었다. 그 다음날도 똑 같이 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B는 “아무리 조심히 걸어도 진흙탕물이 묻는 것을 피할 수 없으니, 나는 더 이상 조심하지 않고 마음 놓고 편안하게 진흙탕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고 날마다 그렇게 걸었다. A도 똑 같이 날마다 진흙탕 길을 걸었지만 조심조심 걸었고, 갔다 와서는 날마다 옷을 세탁해 입었다. 이렇게 A와 B는 1년 동안 십리의 진흙탕 길을 걸었다. 1년 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B는 진흙탕물로 범벅이 된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A는 깨끗한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A는 B와는 달리 진흙탕물이 묻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조심 걸었고, 갔다 와서는 날마다 옷을 세탁해 입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진흙탕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죄짓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최대한으로 죄짓지 않도록 노력하되, 혹시 잘못해서 죄를 지으면 즉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면 일곱 번식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18:22). 이렇게 날마다 범죄할 때마다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A와 같이 깨끗한 흰옷을 입고 주님 앞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시록 22:14) 라고 말씀하셨다.

 

제4장 전체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믿음에는 한 종류의 믿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과 행함 없는 믿음의 두 종류의 믿음이 있다(마태복음 7:21; 24-27; 25:31-46; 고린도전서 6:8-11; 13:2; 갈라디아서 5:16-26; 야고보서 2:14-26; 이사야서 1:10-20; 아모스서 5:4-27).

우리가 가져야 할 의(義)에는 한 종류의 의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의(로마서 3:26-28; 4:1-25; 갈라디아서 2:16)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행칭의(以行稱義)의 의(야고보서 2:14-26; 마태복음 5:17-48; 12:36-37; 25:31-46; 로마서 8:1-4; 13:8-10; 신명기 6:25) 등 두 종류의 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행함에는 한 종류의 행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는 필요하지 않는 행함(로마서 3:20-28; 4:1-3; 갈라디아서 2:16; 에베소서 2:8-9)과,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신칭의 이후의 행함(창세기 17:1; 18:19; 마태복음 19:16-19[마가복음 10:17-31; 누가복음18:18-30]; 누가복음 10:25-28; 로마서 13:8-10; 고린도전서 6:8-11; 13:1-13; 갈라디아서 5:16-23; 에베소서 5:3-5; 출애굽기 19:8; 24:3,7) 등 두 종류의 행함이 있음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통해서 우리는 루터가 말한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 아니라,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진리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제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을 주장하는 루터의 제1종교개혁을 넘어서서,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으로의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믿음으로만‘을 주장함으로써 행함 없는 죽은 믿음의 기독교인이 되고, 이런 행함 없는 기독교인들로 채워진 교회가 비어가고 죽어가는 교회가 되어서 오늘의 교회의 위기가 왔다.

이제 ‘오직 믿음으로만‘의 구원론을 뒤로하고, 성경이 말씀하는 ‘행함 있는 믿음’의 구원론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행함 있는 믿음의 기독교인들’이 되고 ‘행함 있는 믿음의 교회들이’ 될 때, 비어가고 죽어가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살아나게 될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행함 있는 믿음’(fide cum opera)의 제2종교개혁이 필요한 절실히 시대이다. 한국과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제2종교개혁의 대열에 참여하여, 비어가고 죽어가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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