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는 깡통하나 외엔 아무 밑천 없이 밥을 빌어 먹고 산다.

내가 30여년전에 어머님을 모시고 하동에서 목회할때의 일이다. 한달에 한번정도 서울을 올때면 서울역에 새벽 3시쯤에 도착 하는데, 다시 지하철 역으로 오면 그곳에도 가장 밑바닥 인생들인 노숙자들이 있었는데, 그 패에도 두목과 쫄병의 서열이 있음을 보았다. 그곳은 나이로 서열이 생기는게 아니고, 주먹센 이가 '형님'이었다.

일제 시대 때 부터 지난 1970년대 까지, 최귀동 거지 할아범은 달랑 깡통 하나로 구걸을 해서, 음성 읍내의 다리밑 꺼적때기 천막에서, 열한명의 지체부자유자들과 같이 살면서, 그들의 생계를 홀로 감당해 왔다.

1970년대 초, 이제 막 음성 성당으로 부임해온 오웅진 신부가, 이 스토리를 듣고 그 걸인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베푼 자리에서, 걸인들에게 양복 한벌씩을 선물했더니, 유독 최귀동 걸인은 양복을 반납하며, "내가 이 양복을 입게 되면 내게 딸린 이 식구들이 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오신부는 큰 울림을 받았다.

"내가 신부가 되기 위하여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지금까지 주의 종으로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저분이야말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소명받은 참된 종이다. 지금까지 저 분이 깡통으로 이들을 부양했다면, 이제 나는 더 큰 거지가 되자!" 그후 오 신부는 음성 읍내 강변에서 시멘벽돌을 만들어, 다닥 다닥 달 동네를 세운 곳이 오늘의 '꽃 동네'가 되었다.

이 '꽃동네'의 단초를 연 최귀동 걸인의 동상이 '음성 꽃 동네'에 있다. 그 동상 비문에 "빌어 먹을 힘만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다". 최귀동 이 걸인의 생애가 '구차한 삶'이었을까? 나는 이 최귀동 걸인을 떠 올릴 때마다 성 프란치스코가 생각 난다.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과연 어떤 삶이 섦기는 '종된 삶'이고, 또 어떤 삶이 '욕된 삶'일까? 똑같은 걸인 인데도 서울역 앞에 있는 인격 없는 양아치 같은 노숙자 걸인도 있고, 자신을 던져 평생을 지체 부 자유자를 돌 보아 온 최 귀동 같은 걸인도 있다.

진정 부끄럽고 불쌍한 인생은 어떤 인생 일까? 그것은 권력에 눈이 어두워 
이를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도 전혀 참회가 없는 자가 있는가 하면, 교묘하게 국민을 우롱하듯 속이고, 선거법에 따라 붓뚜껑으로 정권을 잡은 '이명박'도 있다.

최고 권력자가 물러난 후 가장 큰 치욕은 측근들로 부터 무시당하는 것이리라.

소위 이 명박 전 대통령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똑똑한 것 같지만 오로지 나만 있고 우리는 없는, 상생의 정치를 몰랐던 최고 통치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마치 생생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40年 지기이며 MB의 집사로 알려진 김백준 청와대 전 총무기획관까지 MB의 부정을 있는 그대로 털어 놓고 있으니 말이다. 한때 MB의 대통령선거 대책본부장이었던 정두언 전의원은 '이 명박'은 돈을 너무 밝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며칠전 재판 과정에서도  드러난 우리금융지주회장 "이팔성"의 메모는, 이 명박 전 대통령의 재직시에, 그의 적나라한 매관 매직의 작태를 보여주고 있어 참 '어이'가 없다. 산은 총재(産銀 總裁)자리나 혹은 국회의원 시켜달라고 19억 6,230만원, 우리 금융지주회장(金融支柱會長)연임 대가로 3억원, 그리고 퍼스트레이디인 김윤옥(金潤玉) 여사 에게도 3억원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구나 이팔성은 이 돈을 부어 넣고도 감투가 주어지지 않자, “이명박과 인연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야 할지 괴롭다. 나는 그에게 30억원을 지원했다. 그 내외에게 들어간 옷값만도 얼마냐? 최소한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 족속들은 모두 파렴치한 인간들이다” 라는 메모까지 남겨놓고 있다.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는다.

그런데 청와대 살림을 맡아 보았던 제1부속실장 김희중(金熙中)이 “이팔성의 메모는 거의 사실 이다”라고 증언을 한 것이다. 지난 주 측근들의 이와 같은 증언으로 이 명박 변호인단은 지금 MB의 변호(辯護)를 제대로 못하고 있을 정도다. 

‘이명박’이 '서울시장'만 하고 은퇴했으면 청계천 업적(淸溪川 業績)과 함께 오랬동안 서울市政史에 이름이 남았을 텐데 분수를 모르고 대통령 자리까지 욕심을 부리다가 저렇게 비참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 들이 많다. 

민주주의에서는 품격이 떨어져도 무엇으로든 대중을 사로잡는 인기만 있으면 대통령 될 수 있다. 이게 민주주의의 최대 약점이다. MB의 인사는 주고 받는 식(Give and take)으로 매관 매직을 했기 때문에 측근들이 그를 어떤 마음으로 대했겠는가! 이명박은 소망교회 장로였다. 그를 잘 아는 모장로가 "역대 대통령들이 명예로운 은퇴를 못했으니, 오로지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청와대를 나올때, 온 국민들로 부터 박수 받고 나오는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간절한 충언에 약속까지 해 놓고, 하나님도 국민도 속이는 몰 염치한이 되고 말았다.

무릇 지도자는 비록 적일지라도 상대의 마음을 사로 잡아야 유능한 지도자다. 
제갈공명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란을 일으킨 남만(南蠻)의 맹획(孟劃) 을 왜 일곱 번이나 잡았다가 일곱 번을 놓아 주었겠는가? 오로지 맹획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였다. 

힘으로 다스리면 맹획이 언젠가 또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신의를 지키는 자 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 맹획은 그 후 제갈공명을 죽을 때까지 섬겼다. 지식이 많다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아니다. 너무 똑똑하면 되려 오만해 지기 마련이다. 지혜롭다는 것은 고개를 숙일 줄 안다는 뜻이다. 

작금 중국에서 마오쩌뚱(毛澤東)보다 저우엔라이(周恩來)를 더 존경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일까? '저우엔라이'의 겸손이 그리고 인민을 사랑하는마음이 인민들의 마음에 녹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상당히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자칫하면 돌이킬수 없는 길을 갈뻔했던 것을, 고 박정희대통령의 눈에 띠어, 현대그룹 고 정몽주회장에게 부탁해서 현대맨이 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정치에 입문하여,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나, 박근혜에게한 것을 보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철면피의 인간이었다. 지근 거리에서 그를 보필했던 심복들로 부터도 외면을 당한 신세가 되고말았으니, 사필귀정이 아니겠는가! 지난 날, 한때 이나라를 좌지 우지 했던 그가, 이제 그는 측근들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 로부터도 외면당하는 몸이 되었다.
 

잠언서6장 20절 이하에서
"내 아들아 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에서 떠나지 말고 그 말씀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라 그 말씀이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 하고 네가 깰 때에 네게 말하리니 대저 말씀은 등불이요 빛이요 생명의 길이니라".

고려대, 총신대학원 졸업, 광운대 정보복지대학원 졸업, 서울 용산소망교회 경남 하동교회 부산 영도교회 시무. 현재, 행복이 가득한 교회(예장합동)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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