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 7:27) 왕은 애통하고 고관은 놀람을 옷 입듯 하며 주민의 손은 떨리리라 내가 그 행위대로 그들에게 갚고 그 죄악대로 그들을 심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심판으로 끝날 때에라도 여호와를 알도록 권면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여호와는 착각이었고, 그들은 사마리아 종교(사마리아 오경)을 만들었다. 이는 예루살렘도 동일한 패턴이다. 유대인들도 여호와를 착각해서 유대교(율법주의, 혹은 언약적-신율주의)를 만들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구원 지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이 구축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오류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먼저 사마리아인이 형성시킨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착각이라고 규정하자. 그럼에도 가장 오래된 사본은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Torah)이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 오경만을 정경으로 확정하고 있다.

유대인의 종교는 무엇일까? 여호와의 종교와 유대교는 동일한 것일까? 필자는 여호와의 종교와 유대교는 다른 종교라고 주장한다. 여호와의 종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형성된 종교이고, 유대교는 여호와를 착각(혹은 반역)해서 만들어진 지식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에 대한 정통된 지식은 율법주의였고, 1970년대에 샌더스로 말미암아 언약적 신율주의로 재구성되었다. 율법주의는 바벨론에서 갈라진 분파이고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주도적인 견해였다. 그러나 언약적 신율주의는 아브라함의 종교에서부터 1세기 유대인까지 변함없이 유지된 유대인의 중심 사안이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을 주장했다. 필자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세계의 종말을 믿는다.

그렇다면 왜 유대교(율법주의, 언약적-신율주의)가 착각이라고 규정하는가? 그것은 여호와인줄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스겔 7:27에서 심판받음에서 여호와의 심판을 알고 고백하기를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심판, 공동체 해체는 인정했지만 그들이 원하는 종교를 구축해서, 자기 공동체를 유지시켰다. 율법주의에서 질문은 언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됩니까?에 대한 질문이다. 즉 끊임없이 의문(疑問)하고, 하나님께 질문(質問)하고 있다(비교, 시 37:7, 애 3:24-26, 사 30:15, 사 62:5, 합 2:20).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능력으로 땅끝까지 이르러 자기를 증언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첫째, 언약적-신율주의는 최소한 예수가 가르친 내용을 반복하려고 한다. 예수 이름을 증언하지 않는다. 이름의 권세가 아니라, 내용의 정당성을 제시한다.

둘째, 예수가 가르친 내용은 신학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 사도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주와 구주이신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사도 직분의 계승을 주장하지만, 개혁된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선포하고 교육한다.

셋째, 기독교의 지향점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하나님 보좌 우편, 십자가,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좌정하신 곳을 지향한다. 언약적-신율주의의 지향점은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것을 추구한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이 질문에서 지형만 확대되었을 뿐 차이가 없다. 지향점은 믿음의 대상이 계신 곳인가? 믿음의 실체가 실현되는 장소인가? 기독교는 지향점이 현재와 미래에서 차이가 없다. 그리고 지향점에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근원이고 종결점이다(히 12:2). 기독교는 확실한 지식(explicit faith)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지식의 근원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참고 마 16:16-17). 가장 확실한 지식은 자기 믿음의 주의 이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믿음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그 믿음의 주께서 세상 만물을 통치하시고 운행하신다. 그 오묘함과 난해함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앞에서 잠잠할 수 밖에 없다.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 그리고 서양인들처럼 경솔하고 교만하게 “하나님이 없다”라는 말을 상상하지 못하고 감히 내뱉지 못한다.

19세기 칼 마르크스는 종교(기독교)를 아편(阿片, Opium)이라고 했고, 21세기 도킨스는 망상(Delusion)이라고 했다. 두 연구자 모두 기독교 사회에서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비판은 정당하다. 기독교가 자기 믿음의 주를 정당하게 고백하고 증언하지 않는다면 그런 평가를 받을 것이다. 믿음의 주를 고백한다면 그리스도인(1세기 안디옥), 언약도(17세기 스코틀랜드)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믿음의 주를 고백하는 주의 백성이 자기 주 앞에서 경거망동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믿음의 주를 고백한다면 복될 것이다. 믿음의 주를 고백하고 서로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믿음의 주를 고백하면 결코 하나가 된다. 아무리 사이가 좋을 지라도 다른 믿음의 주를 믿는 사람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자기 믿음의 주의 이름을 고백하고 증거한다면, 자기에게 누가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그 분이 세상을 통치하는 만유의 주(主)이심을 알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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