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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칼럼】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자가 아름답다【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9) 만찬(晩餐)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D.Min.),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빵은 이집트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져 로마제국 시대에 서양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로마는 매달 시민들에게 빵과 콜로세움 입장권을 무료로 배급해줬다. 제빵사들은 왕의 지시를 받아 식권을 나눠주는 공무원이었다. 군주를 뜻하는 ‘lord’의 어원이 고대 영어 ‘loaf-guardian(빵을 구해오는 사람)’에서 유래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고대 중국에서 재상(宰相)은 원래 요리사였다. 주나라 재상인 '천관총재(天官冢宰)'는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쓸 음식을 마련하는 직책이었다. 먹는 것이 하늘(以食爲天)인 까닭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는 일이 재상의 역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하루에 세 차례 음식을 먹는 것은 관습이다. 신약시대 때 세 번의 식사 중에 만찬은 중심이 되었다. 아침식사는 포도주에 적신 마른 빵 한 조각으로 간단하게 해결한다. 점심은 주로 외식을 한다. 요즘은 ‘일과 삶의 균형’이란 화두가 청년 세대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라 부른다. 일과 삶을 조화시키려면 ‘저녁이 있는 삶’이 필수적이다. 한국 기업들은 개인 삶의 질보다 직장인의 역할에 방점을 둔다. 하지만 삶의 균형이 무너지면 생산성도 떨어진다. 유대인들에게 저녁 식사는 선택사항이 아니다. 만찬은 그날 하루의 가장 중요한 식사다. 하루 일과가 끝난 뒤 해가 저물 때에 시작한다. 모든 식구들이 참석하였다. 밤새 오랫동안 대화하며 즐겁게 식사하였다.

 

1. 주님을 기념하는 자는 주의 죽으심을 전한다.

누가와 바울에 의하면 성찬의 두 요소는 모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중성을 띠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고난이 그들을 위한 의도적인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다른 나라 잔치에 관해서도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가올 메시야의 잔치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잔치이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잔치로 시작될 것이다.

예수님은 예레미야 31:31-34에 의거하여 이스라엘의 언약을 갱신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를 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사역을 감당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성취하시는 역사적이며 중요한(crucial) 사건이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것을 마실 때까지 다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셨다.

독일의 신경생물학자 한나 모이어(Hannah Monyer) 와 철학자 마틴 게스만(Martin Gessmann)이 함께 쓴 ‘기억은 미래를 향한다’에서 ‘기억’을 ‘마법 냉장고’에 비유하고 있다. 기억은 과거 경험을 보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재처리해서 미래에 유용하게 쓰이도록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주님의 만찬에 참석하는 것은 단지 성찬의 떡과 잔이 주님의 몸을 상징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기억하고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그 죽으심을 미래에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성찬의 목적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몸과 피를 기념하는 자로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구속된 날을 기념하는(출 12:14) 유월절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다.

주님의 만찬에 참석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떡과 잔을 먹고 마시면서 주의 죽으심을 생각하는 것, 즉 기억하는 것으로 만찬을 잘 한 것이 아니다. 주의 죽으심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사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여 은혜를 받는 것은 현재이다. 이제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체험한 것을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기초가 된 유월절 식사처럼 성찬은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됨을 강하하는 경험으로서 역할을 했다.

최후의 만찬(The-Last-Supper), 1495,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 주의 만찬의 중심 동작이라면 중심적인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그가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님이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을 하신 뒤에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종말론적 선언을 기록한다(막 14:25).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주님과 연합한 자로서 해야 할 복음 전파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 영어 번역들은 일반적으로 만찬(supper)을 세 가지 주요 사건들에만 엄격하게 사용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 성만찬, 그리고 어린양의 결혼 만찬이다. 성만찬과 최후의 만찬이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먼저 다른 점은 제자들이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한다. 같은 점은 둘 다 재연이다. 전자는 유월절 식사 후자는 최후의 만찬의 재연이다. 또 하나는 둘 다 마지막 만찬을 지향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서 포도주를 먹을 것을 전망하며 제자들에게만 만찬의 식사를 하게 하였다. 성만찬 역시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책임을 고취한다.

 

2. 재림 때까지 십자가의 복음은 계속 전해야 한다

성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의 해설 간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제 1, 2세기 유대인의 관습을 보면, 식사 중의 모든 행동은 매우 강렬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애굽기 12장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유월절의 구속적 체험을 먼저 기억하고 또를 이를 사실상 마치 이집트에서 구출된 사람인 것처럼 재현하는 것이다. 시제로 보면 과거에 대한 기억 그리고 현재 다시 체험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 미래를 지향하게 한다. 북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는 ‘과거라는 감정(The Sense of the Past)’이라는 책에서 과거의 유산의 소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에게는 과거 유산의 소유가 단순히 물건, 항목, 혹은 목록이 아니다. 차라기 그것은 기억과 소속감이라는 공동 감정으로 진입할 때 생긴다.” 성찬은 상상력의 산물은 아니다. 과거의 회상이나 현재의 체험에 머물러 있지 말고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재림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유월절 식사가 완성되어 주님과 함께 식사를 할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

‘주의 만찬’에 해당하는 ‘kuriako;n dei'pnon’(퀴리아콘 데이프논)에서 만찬은 일반적으로 잔치, 연회, 그리고 식사 등으로 번역된다. 특별히 저녁 식사를 의미한다. 바울은 주의 만찬을 단지 고린도전서 10:14-22; 11:17-34에서만 언급하고 있다. 두 가지 점에서 주님의 만찬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주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 만찬의 연속적인 종말론적 강조, 비록 그 강조가 별로 강하지 않다고 해도 바울 자신에 의해서 첨가된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을 재림 때까지’는 부분은 해설적인 주해와 매우 흡사하게 보인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유월절 희생제물에 비교된다.

요한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뼈가 부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유월절 희생과 유사하다고 관찰하였다. 이러한 연관은 바울에 의해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7에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월절양이라 설명한다. 바울은 성찬에 대한 기사에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의 핵심 요소를 언급할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형태를 강화한다. 파루시아에 대한 전망과 함께 책임을 강조한다. 주의 죽으심을 재림 때까지 전하는 것이다. 앞서 문제를 제기했던 기억과 기념의 개념 차이를 다시 한 번 논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는 유월절과 관련이 깊다. 유월절은 ‘기념하여’ 지켜야 할 야훼의 절기이다. 유월절은 분명 ‘기념일’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파라오의 굴레에서 구출하여 낼 뿐만 아니라 제2의 출애굽을 바라보게 하는 절기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마지막 성찬을 행하신 까닭은 평상시에 행하던 식탁의 연장이요, 구원을 이루신 십자가를 통하여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 공중 연회에서 참석하여 잔치상을 받을 것을 바라보게 하는 의도가 있다.

주님의 만찬에는 두 가지 주제가 대두되어 있다. 하나는 대속적인 죽음이라는 주제고 또 하나는 종말론적 주제다. 전자는 이사야 53장의 예언을 따라 예수님이 친히 주신 떡과 포도주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많은 사람들 대신하여 죽으시므로 죄를 사해 주시는 대속적 제사라는 점이다. 후자는 공관복음 저자 모두가 이 주제를 언급한다. 그 중 누가는 보다 분명한 어조로 언급한다.

예수님께서 성찬의 마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것과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이 이루어질 것이란 말씀에서 나타난다(눅 22:16). 마가는 14:22-25에서 주의 만찬 기사와 함께 수난, 속죄, 언약, 재림 등의 굵직한 주제들을 모두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 이 식사에서 가장 중요한(crucial) 포인트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지정된 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거의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에서 베풀어질 메시야의 종말론적 잔치에 미리 참여케 하시는 사실이다. 음식코너에서 시식을 하듯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를 시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나의 피’를 언약의 피로 말씀하므로 예레미야 31:31의 종말론적 관점과 이사야 53:12의 대속적 주제가 아울러 자신의 죽음에 적용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이스라엘 구속을 촉진시킬 것이다. 예수님은 단번에 십자가에서 혹독한 죽음을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혹독함을 완화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재촉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확신 속에서 사역을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고 머지않은 장래에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서 메시야로서 드실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강조하였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눠 주신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실 자신의 몸과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희생제물의 피였다.

 

 

이승희  titeioslee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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