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선친의 눈물의 우물을 다시 파낸 이삭

이삭은 우물 파는 자였다. 에섹을 파고 싯나를 팠으나 원주민인 블레셋과 다툼이 생기자 다른 곳으로 옮겨 르호봇을 팠다. 원수가 더 이상 집적대지 않자 하나님이 넓혀주신 그곳에서부터 번성의 씨앗이 물줄기처럼 번져갔다. 어찌 보면 웃음의 근원이었던 이삭의 생애는 다른 족장들에 비해 고난의 흔적이 역력하지 않다. 하지만 이삭의 삶을 역추적해보면 그라고 해서 어찌 눈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상 이삭에게는 드러난 눈물보다 숨은 눈물이 많았다. 조부와 아버지의 생애를 통해 이삭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눈물 젖은 사연들이었다. 늦둥이로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이복 형인 이스마엘과의 관계로 인해 얼마든지 우울한 성품을 형성해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눈물에 삭고 아픔에 절은 삶을 조화로운 성격으로 잘 승화시켜 웃음이 자신의 존재 천명이 되게끔 했다. 사라의 비웃음(laugh)을 미소(smile)로 바꾼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불신에서 태어난 비웃음을 사장시키고 믿음 안에서 미소를 탄생시킨 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이삭이 왜 우물 파는 자로 부각되었을까? 물론 우물이 목축민들에게 생명의 젖줄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삭은 자신의 우물을 파지 않았다. 아버지가 파서 눈물로 지켰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 그는 오랫동안 모래에 파묻혔던 옛 우물들을 파서 거기에다 아버지가 붙인 이름을 따라 불렀다. 빼앗기면 또 파고 빼앗기면 다시 팠다. 아마 르호봇도 빼앗겼으면 다른 우물을 팠을 것이다. 원수의 괴롭힘이 그칠 때까지 이삭은 줄기차게 우물을 팠다. 우리는 우리의 우물을 파기 전에 우리의 아버지가, 신앙의 선배들이 파 놓은 눈물의 흔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선조의 지계표를 옮겨서는 곤란하다. 웃음의 근원인 이삭의 쌍둥이에게서 세상을 피와 눈물로 적실 원수의 후손들이 태어났으니 하나님의 뜻은 인간으로서 헤아릴 길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의 샘이다.

 

과거를 잊은 성공자의 포장된 눈물

약자의 눈물에 젖어 살다 강자의 보좌에 오른 자들에게도 눈물은 있다. 나는 그들의 눈물을 거의 믿지 않는다. 그들이 지금 흘리는 것은 예전의 눈물이 아니다. 그들의 눈물에는 촉촉함이 없다. 마른 눈물이다. 고통이 마른 장작 되어 삶을 거칠게만 했던 기억을 떨쳐버리고자 눈물에서 점액질을 제거시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물을 만지는 순간 먼지처럼 퍼석거리기만 할뿐 젖지 않는다. 눈물의 촉촉함과 끈적거림이 사라졌다. 대신 그들의 눈물에는 색깔이 있다. 투명함마저 사라졌다. 가난을 기억하지만 가난을 느끼지 못한다. 고생담을 늘어놓지만 무용담에 가깝다.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면 실패의 거름무더기에서 썩어갔을 잡다한 얘기가 승전가의 노랫말이 되어 청중을 휘어잡는다. 사소한 것들을 부풀려 대단한 것으로 단장한다. 눈물을 쏙 빼고 질탕한 웃음을 안긴다. 얘기 하나로 울리고 웃기니 대단한 기술이다.

수많은 악어새끼가 바다로 들어가면 자라기까지 대부분은 고기밥이 된다. 형제들에 대한 원한 때문일까? 살아남은 악어는 잔인한 포식자가 된다. 가난을 딛고 일어선 소수의 사람들에게선 이런 잔인함이 엿보인다. 구박 받던 며느리가 절대로 나쁜 시어머니는 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시어머니가 되었을 때 가장 악명 높은 시어머니로 돌변한다. 소형교회 목회자가 웬만한 크기의 사역지에서 목회를 하면 대개 예전의 가난하고 겸손했던 영성이 사라진다. 옛 우정을 부끄러워하고 정다운 눈빛에 감춰진 야멸찬 시선 한 조각에 친구의 마음은 가라앉는다. 그들의 망은(忘恩)은 씁쓸한 현실이다. 그래서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는 개구리는 위대하다. 소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생각하는 자들에게 진심어린 충고 한 마디 건네고 싶다. 부디 옛 눈물을 잊지 말라! 성공과 자족의 새 친구를 사귀고자 빈한(貧寒)의 옛 친구를 버리는 우(愚)는 범치 말라!

 

눈물샘의 밑바닥을 드러나게 하는 애끓는 기도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은 없는가? 피눈물을 짜내며 긴 밤을 밝힌 눈물지기는 어디에 있는가? 나도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누군가 내 눈물을 닦아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서로를 위해 눈물 흘리고 모두를 위해 눈물을 쏟고 쏟으면서 통곡의 깊이를 재고 싶다. 슬픔과 고통으로 높이 치솟고 깊이 패인 이 삶의 골짜기를 헤쳐나려면 그 심연을 눈물로 채워야 한다.

불어난 눈물로 수위가 찼을 때 작은 통나무에 실린 지친 몸이 비로소 바깥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만큼 눈물을 쏟아내려면 기도만한 방도도 없다. 애끓는 기도만이 눈물샘의 밑바닥을 드러나게 만든다. 나라와 민족의 거창함도 필요 없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사역이라는 굵직한 제목이 아니어도 좋다, 한 영혼의 돌이킴을 위해 울며 기도하고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부둥켜안고 축복을 비는 울부짖음이 애곡성이 되고 애통성이 되는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

 

교회여! 야곱과 에서의 화해의 눈물을 배우라

20년을 원수로 지냈던 야곱과 에서가 서로를 품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쌍둥이였다. 남북이 싸우는 것은 동서가 하나 되지 못함이요, 교회가 시끄러운 것은 신자들의 싸움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며 이런 싸움은 목사와 장로들의 치고 박기에서 배운 못된 버릇이다. 술자리에서 시비 끝에 옥신각신하자 한 취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기가 교회냐? 싸우려면 교회에 가서 싸워!” 이전에는 교회에 분쟁 사건이 생겨도 교회 안에서 해결책을 강구했다. 이제는 대놓고 세상 법정에 하소연이다. 상대가 먼저 세상 법에 의지하고 싸우려드니 나머지 한편도 별 수 없이 법정으로 간다. 부끄러운 각축장으로 돌변해버린 이런 교회들로 인해 세상은 아예 대놓고 손가락질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정신으로 만들어진 교단 헌법이 세상 법에 의해 논단된다. 판사의 방망이가 내리쳐질 때 패소한 이들을 바라보며 웃는 이들은 누구인가?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법을 준행치 못한 사람들은 세상의 판관에게서 유리한 판정을 기대한다. 서로 십자가를 높이 들고 성령을 운운하며 예수와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워 지저분한 싸움을 벌이는 사이비 지도자들은 화의 일군들이다.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지옥으로 직행시킬 망동에 내모는 거짓 선지자들의 받을 화는 지옥의 거센 불길로도 모자랄 정도다. 싸움에 이골이 난 세상의 싸움꾼들조차 두 손 두 발 모두 들어버렸다는 예수쟁이 싸움꾼들! 이런 빈정거림은 들어도 싸다. 정신 차려라!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다. 싸울 상대도 잘못 골랐다. 우리는 웃음의 근원에서 출발한 쌍둥이들이다. 평생을 원수처럼 지냈을지라도 서로의 얍복을 지나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 그래야 원수 같던 에서와 부둥켜안을 수 있다. 웃음의 근원인 이삭이 이삭 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지금은 함께 울 자를 찾아야 할 때다.

 

심판의 눈물을 피하기 위해 지금 정결의 눈물을 흘려야

주님의 통곡을 기억하는가? 창조주가 자기를 버린 피조물들을 위해 친히 눈물을 쏟으셨다. 큰 소리로 울부짖으셨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울부짖으셨다(loud cries).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많은 기도들을 올리셨고 탄원을 아뢰셨다. 자신을 육체의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빌지 않으셨다. 순전히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울고 울며 계속해서 우셨다. 주님이 남몰래 흘리신 눈물을 우리가 어찌 감히 측량할 수 있겠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온 밤을 지새우며 몸부림치셨을 모습을 상상만 하면 편히 쉬고 잠자리에 몸을 눕힌 자신이 한없이 미워진다. 왜 우리는 울지 않는가? 울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약 5:1)던 야고보 사도의 일갈은 단지 재물이 많은 부자들만을 위한 경고였을까? 우리 위해 생명 바치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치 못하는 우리 모두가 부자들이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믿음과 기대와는 달리 울며 통곡하게 될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날에 이르러 비극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지금 영혼의 정결을 위해 울고 통곡해야 한다.

 

주님의 눈물에도 코고는 교회

지렁이 같은 야곱(사 41:14)을 구속하신 하나님은 타오르는 불꽃이셨다(사 10:17).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계 1:14)께서 벌레만도 못한 너와 나를 위해 고귀한 눈물을 흘리셨다. 인간의 영혼을 지옥으로 합법적으로 데려갈 수 있는 증표였던 죄를 없애기 위해 주님은 심히 통곡하셨다. 범죄한 인간을 다시 천상의 영화로움으로 회복시킬 길은 달리 어느 곳에도 없었다. 천상의 슬픔이 사라지고 지옥의 기쁨이 그치는 그날의 성사를 위해 주님은 모든 눈물을 아낌없이 쏟으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 미세한 혈관을 따라 흐르던 모든 피를 다 쏟아 부으셨다. 천지가 개벽하고 우주의 질서가 다시 새로워지는 순간이었다. 눈물이 피를 흘리게 했다. 피가 생명을 쏟게 했다.

가슴 치며 통곡하고 싶다. 심장이 터지고 간이 녹아 물같이 흐를지라도 주님이 크게 울부짖으셨던 그 눈물에 한 번 젖고 싶다. 그 잊을 수 없는 밤에 세 제자들은 함께 통곡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돌 던질 만큼의 가까운 거리에서 대성통곡을 하시던 주님과 더불어 울부짖을 수 있는 시간을 지나쳤다. 깊은 잠이 그들의 귀를 먹게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그들의 귀는 먹고 눈은 감기고 입도 닫혔다. 작은 흐느낌도 없었다. 아, 거룩하신 주님이 울며 통곡하던 그 시간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최측근들마저 졸았음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염연한 현실이었다. 세 제자의 코 고는 소리와 주님의 울음소리가 동산을 채웠다. 주님은 십자가를 회피하려던 전반부의 기도를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는 후반부의 기도로 마감하셨다.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는 거룩한 의지에 모든 눈물과 통곡이 일순 멈추었다.

 

조국과 교회의 암담한 현실 앞에 촛밀처럼 울라

주님이 “기름 짜는 틀”(Gethsemane)에서 기름을 짜고, 포도주 틀을 밟듯 그렇게 영혼을 짜내는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그들의 영혼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누가는 진액을 짜내는 주님의 기도를 적절히 표현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그들은 주님이 안으신 극도의 슬픔과 마음의 고민과 죽게 된 상황(마 26:37-38)을 들었고 기도에 동참할 것도 부탁받았다. 눈물 대신 쏟아진 것은 잠이었다. 개인적으로 철야기도를 좋아하는 것은 그 메마른 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마르지 않는 눈물의 근원이 되어 기도하고프다. 한밤의 공간에 부르르 떠는 소리의 파장이 우주의 끝자락까지 퍼져가도록 통곡하고프다. 온 몸이 울림통이 되어 울리다 터져버린다 해도 진정을 주님 앞에 토하고프다.

예레미야는 울었다. 하나님이 우시는데 종 된 그가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침 없이 멸망당할 자기 백성 까닭에 우셨다(렘 14:17). “내가 내 백성의 파멸을 바라보고 밤낮으로 운다!”는 말을 듣고 울지 않을 종이 어디 있겠는가? 우실 수 없는 하나님이 우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거룩한 눈물샘을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눈물을 본 자는 눈물의 사람이 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몸뚱이가 온통 눈물샘이 되기를 원했다. 멸망은 이미 정해졌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은 피할 길이 없다. 예레미야는 열매 없는 사역의 현장 끝자락에서 민족의 어두운 운명을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치는 큰 칼을 보았다. 하나님의 종이라 일컬음 받는 그대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작은 눈물샘이 되려는 마음은 들지 않는가? 그대 앞에 조국과 교회의 암담한 현실이 있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장담할 수 없는 미래의 일들이 그대의 눈물샘을 자극하지는 않는가? 덮은 우물, 봉한 샘 같은 그대의 차디찬 마음을 긍휼의 촛밀로 녹일 맘은 없는가? 고난 받으신 주님의 심경이 그대로 반영된 시인의 탄식조 노래가 우리의 영혼을 녹이기에 충분치 않은가?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시 22:14)

 

조국과 교회를 위해 몸이 마르도록 흘릴 눈물

재앙의 죽음을 앞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심정이 기가 막혀 예레미야도 덩달아 울었다. 오늘 우리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이 없는 것은 평안과 축복의 복음에 길들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볼 수 없으니 울 까닭이 없다. 하나님의 눈물이 보이지 않으니 굳이 울 이유도 없다. 때를 따라 우는 시늉을 하지만 눈물이 없다. 애곡 소리는 있는데 눈물방울이 맺히지 않는다. 남을 위한 뜨거운 눈물도 없고 자신을 위해 울부짖지도 않는다. 아, 흐르는 눈물에 젖고 싶다. 눈물이 아니라면 뜨거운 피라도 흘리고 싶다. 필자의 체중이 70kg을 웃도니 혈액량은 약 6리터를 넘을 것이다. 이 정도 양이면 한참을 울 수 있다. 피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은 이 심정을 과연 누가 알려나?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나는 울다 죽어갈 것이다. 피와 수분이 다 빠져나가 마치 마른 장작처럼 오그라진 내 시신을 내려다보며 눈시울 붉힐 사람은 있을 것이다. 내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릴 사람도 꽤 될 것이다. 내가 죽어가면서까지 누군가를 위해 피눈물을 흘리는데 그런 나를 위해 울어줄 자는 없는 것인가! 그렇게라도 아직 살아 있는 날 위해 눈물 흘릴 사람, 나와 함께 가슴 치며 오열할 사람은 어디 있는가? 내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내가 흘릴 눈물을 나눠 울어줄 사람은 어디 있는가? 세상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있다. 조국교회를 위해 외치는 울부짖음이 있다. 영혼을 위해 가슴 치는 오열이 있다. 내 사랑하는 벗과 가족, 함께 길을 걷는 동료를 위해 아껴둔 눈물이 있다. 주님을 위해 언제라도 흘릴 눈물이 있다. 이 모든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배경그림 설명 : 『The Agony in the Garden of Gethsemane/겟세마네 동산의 고통』, Andrea Mantegna(1431-1506), 1458~1560년 추정 작품, 임박한 체포 앞에 통곡하며 기도하시는 주님과 깊이 잠든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날 조국교회를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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