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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진짜 성공은, 이 땅에서 영광의 면류관이 보장되지 않았더라도 순종하며 걸어가는 삶이 소중하다.

최근에 선교사님의 편지를 받았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9월에 바이올라 대학교 입학 예정이다. 그런데, 학생 비자를 바꾸려면 미국 밖에 있는 대사관에서 비자 신청을 해야 한다. 멕시코에 있는 대사관에서 비자를 신청을 했는데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잔고증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교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미국의 높은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 과정을 생각하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현실적인 절벽앞에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는 가난한 선교사의 눈물을 헤아려보았다. 차를 끌고 돌아오는 먼 길이 참으로 무겁고 버거웠을 것이다. 가난한 선교사는 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궁색했을 것이다.

주님이 너에게 또 다른 길을 예비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함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뚫고 나가자. 한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열린다. 사방이 우겨쌈을 당해도 하늘은 열려있다.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 밖에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희망이 전혀 안 보이는 현실앞에서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왔던 그 길을 후배들은 더듬거리며 또 걸어가고 있다. 진짜 성공은 무엇인가? 삶의 자리가 때로는 너무 힘들어도 그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외치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말씀앞에서 평안과 기쁨과 사명으로 다시 바라보는 장소일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비의 마음을 조금이나 알기에 이런 위로가 있기를 기도했다.

용화산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소나무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 전도 사역에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셨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세상 일이 아니라 선교이다. 그런데 성령님이 막았다. 그때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바울이 환상을 본 것이다. 바울은 즉시 선교 일정을 수정하고 마게도냐로 떠났다.

바울의 결단을 보면서, 바울이 영적으로 깨어있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환상을 본 후 곧 바로 선교 행선지를 유럽으로 바뀐다. 선교를 출발할 때 일정을 철저하게 정한다. 선교팀들과 함께 일정을 정하기 때문에 쉽게 행선지를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환상을 본 후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선교지를 수정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성령님의 역사에 마음이 열려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가 되기 전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을 했다. 그것을 유대 청년으로서 해야 할 사명으로 생각했다. 다메섹으로 예수님의 잔당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행9:1-9). 이 사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뀌어 놓았다. 생각의 관점과 삶의 방향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지식의 체계가 바뀌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구약의 말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메섹 사건은 바울의 인생을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이끌어가는 출발점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은 구약과 신약의 구분점이며, B.C와 A.D의 경계선과 같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평생 잊지 않고, 주님의 부름앞에 늘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 살았다.

바울은 일생동안 다메섹의 부르심을 기억하고 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찾아오신 그 사건을 잊지 않았다. 바울은 늘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았다. 그래서 늘 성령 하나님의 소리에 깨어 있었던 것이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자신이 가졌던 철학이나 가치관이나 종교적 신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철저하게 내려놓았다. 인본주의적 가치 철학과 사상을 다 버렸다. 오직 주님의 소리에, 말씀에 자신을 다 던졌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오직 예수님만 전하고, 오직 예수님이 곧 하나님아들이심을 전하는데 자신의 전부를 걸었다. 바울은 일생동안 다메섹 사건의 그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바울은 늘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고 했다. 주님과 함께 늘 동행하니, 성령님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덜 만나면 의심과 불신이 늘 지배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주님앞에 꼬꾸라지면 의심과 불신과 원망과 후회와 염려는 그 만큼 줄어들 것이다.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했다. 유럽에 가면 누가 기다린다는 아무런 약속도 보증 받은 것이 없지만 무조건 말씀에 순종해서 행선지를 바꾸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

역사가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곧 마게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였다”(10절).

성경의 진리중의 진리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격언이다. 마태복음 21장에 두 아들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다. 맏아들에게 가서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맏아들이 네 아버지 가겠습니다. 하고 가지 않았다.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똑 같이 말했더니, 나는 싫습니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주님이 대세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질문을 했다. 그들이 대답하기를 둘째 아들입니다.

두 아들의 비유의 결론이 무엇인가? 맏아들은 종교지도자들이다. 종교지도자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셨던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가 왔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죽이려고 했다. 세례요한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선포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둘째 아들의 비유는 당시 창녀와 세리이다. 창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음란하게 하는 행위 때문에 멸시를 받았다. 세리는 동족을 착취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죄인으로 불리었다. 그런데 창녀와 세리는 예수님의 천국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순종하였다.

세리 마태는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즉시 따랐다. ‘나를 따르라’ 이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창녀는 자신의 향유옥합을 깨서 주님의 장사를 예비했다. 누가 진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는가? 둘째 아들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머리는 커지는 데, 몸이 안움직인다. 아는 것은 많은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말씀과 삶이 따로 따로 놀고 있다. 어느듯 자신도 모르게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동사이다. 믿으면 아멘 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면 즉시 일어나 움직이는 것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대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믿음은 순종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 기독교는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종교이다.

반도체에 사용하는 일본산 불화 소수의 순도는 99.99%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 제품은 99.9%라고 한다. 그 미세한 차이로 인해 불량품이 발생한다고 한다. 당신의 순종의 강도는 어떤가?

바울과 함께 했던 모든 선교 일행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소리를 듣고 즉시 선교 행선지를 유럽으로 돌렸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변화산기도원 협력원장,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왜, 하나님께서 아시아에서 일하는 바울에게 나타나서 유럽으로 가라고 하셨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성령님이 아시아의 사역을 막으시고 환상중에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셨다. 어떤 누구와도 연결된 것이 없다. 그러나 무조건 순종하여 갔다. 그 결과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바울이 드로아(현재 터키지역)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가서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다. 네압볼리는 항구도시이다. 그리스 지역인 네압볼리에서 빌립보까지는 14km정도이다. 거기서 빌립보에 도착을 했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의 첫 번째 성이다.

빌립보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만났다. 바울 일행이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으려고 문 밖 강가에 나가서 거기서 모여 있던 여자들에게 말했다. 그 곳에 자색 옷감 장사를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가 있었다.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듣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했다(16:13,14).

루디아가 바울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해서 온 집이 다 세례를 받고 강권하여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서 머물게 했다. 이것이 최초의 유럽교회 탄생이야기이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러나 과정은 때로는 길이 전혀 안보이는 깜깜한 밤 하늘 같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전부를 다 걸고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이 걸어야할 거룩한 숙명이다. 하나님의 뜻 대로 산다고 해서, 미래가 화려한 면류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거칠은 광야를 걸어가도, 이 땅에서 화려한 면류관으로  보상을 받지 못한다하더라고, 그 자체로 그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날 주님의 일꾼들이 너무 인간적인 지혜로만 계산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인간의 계산으로는 측량이 불가능하다.

복음전도자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주장한 핵심은 아주 단순하다. 나는 복음을 전할 때에 인간의 말과 수단과 지혜로 하지 않았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했다.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했다는 것이다. 사명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진리의 기준이다. 

믿음의 세계는 적당하게 거래하는 것이 아니다. 전부를 다 거는 것이다. 전부를 다 걸 때 주님은 일하신다.

마태복음 13장에 천국에 대한 비유가 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보화와 진주와 같다고 했다. 밭에 감추인 보화가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사야한다. 밭을 사면 그 보화는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은 좋은 진주와 같다고 했다. 사업가가 좋은 진주를 발견했다. 어떻게 해야하는가?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사야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좋은 진주와 보화와 같은 것이다. 자신의 전부를 다 던져 사야 한다. 그래야 천국이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천국을 소유하면 이 땅에서 얼마나 누리고 사는가에 대해 그리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이 부요하면 모든 것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적당한 신앙생활은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공급받지 못한다. 영적 부요함을 누리지 못한다. 적당한 신앙생활은 신앙의 간증이 없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전부를 던지는 것이다.

바울도 자신의 전부를 성령님께 던졌다. 그 결과 그의 인생에 보석같은 믿음의 간증들이 있는 것이다. 바울도 하나님이 선교를 막으시고, 환상으로 보여주실 때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다 던졌다. 그 결과 선교의 새바람이 아시아를 뛰어넘어 유럽으로 가서 빌립보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성령님이 강권적인 역사이다. 성령님께 나의 삶을 흔들림 없이 전부 맡기고 싶다. 그분이 써 가실 미래가 늘 기대가된다. 그 자리가 영광의 면류관이 아니어도 좋다.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있다면 그 자리가 천국이기 때문이다.

발행인 최원영  jho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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