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과 여성들의 활약

<3.1 독립선언문>

일본에서 재일 유학생들에 의하여 일어난 2·8 독립선언은 한국에서 3·1독립운동이 발발하도록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고종황제의 인산일(장례일)인 3월 1일에 맞추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 고종황제 인산일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김 마리아(1892-1944)는 2·8 독립운동 후 2월 17일에 2·8 독립선언문 여러 장을 복사해서 비밀리에 부산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교육계와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들을 만나 2·8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하며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된 김 마리아는 심한 고문을 당하여 메스토이병에 걸려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병환으로 석방되었다. 퇴원후 정신여학교에 교사로 들어갔다.

▲ 김 마리아

 「3·1독립선언문」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작성하였는데, '기미년'에 쓰여졌으므로 「기미독립선언서」 또는 「민족대표 독립선언서」라고도 한다. 3·1독립선언문은 2·8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손병희·최린·최동진·오세창 등은 2·8 독립선언서에 있는 "영원한 혈전(血戰)을 불사한다" 등의 감정이 들어간 과격한 문장은 피하고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대한제국이 독립하는 것이 좋다는 등 전체적으로 온건하게 표현할 것을 요구했고 최남선은 그들의 요구대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최남선은 글만 작성하고 실제 독립운동 대표 서명에는 빠지겠다고 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독립선언문 민족대표 33인(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3·1독립선언문의 서두에서 "우리는 조선이 자주독립국이고,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라는 글을 통하여 이 선언문은 민족의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주권과 각 개인의 인권을 선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란 글을 통하여 자국민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보편적 행복을 선포하고 있다.

최남선은 이 글을 2월에 완성하였고, 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불교인 2명 등 33인이 서명한 뒤 천도교에서 운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하여 종교단체와 학생들 그리고 때마침 광무황제 국장을 위해 서울에 왔던 이들에 의하여 전국 각지에 전달되었다.

▲유관순 열사. 아일랜드계 미국 화가 모린 개프니 울프슨의 작품

 <3·1 독립선언문> 전문
조선민족대표 삼십삼인(朝鮮民族代表 三十三人)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여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여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의 권위(權威)를 장(仗)하여 차(此)를 선언(宣言)함이며, 이천만(二千萬) 민중(民衆)의 성충(誠忠)을 합(合)하여 차(此)를 포명(佈明)함이며, 민족(民族)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自由發展)을 위(爲)하여 차(此)를 주장(主張)함이며, 인류적(人類的) 양심(良心)의 발로(發露)에 기인(基因)한 세계개조(世界改造)의 대기운(大機運)에 순응병진(順應幷進)하기 위(爲)하여 차(此)를 제기(提起)함이니, 시(是) 천(天)의 명명(明命)이며, 시대(時代)의 대세(大勢)이며, 전인류(全人類) 공존동생권(共存同生權)의 정당(正當)한 발동(發動)이라, 천하하물(天下何物)이든지 차(此)를 저지억제(沮止抑制)치 못할지니라.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物)인 침략주의(侵略主義), 강권주의(强權主義)의 희생(犧牲)을 작(作)하여 유사이래(有史以來) 누천년(累千年)에 처음으로 이민족(異民族) 겸제(箝制)의 통고(痛苦)를 상(嘗)한지 금(今)에 십년(十年)을 과(過)한지라. 아(我) 생존권(生存權)의 박상(剝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심령상(心靈上) 발전(發展)의 장애(障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민족적(民族的) 존영(尊榮)의 훼손(毁損)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으로써 세계문화(世界文化)의 대조류(大潮流)에 기여보비(寄與補裨)할 기연(機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幾何)이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抑鬱)을 선양(宣揚)하려 하면, 시하(時下)의 고통(苦痛)을 파탈(擺脫)하려 하면, 장래(將來)의 협위(脅威)를 삼제(芟除)하려 하면, 민족적(民族的) 양심(良心)과 국가적(國家的) 염의(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신장(興奮伸張)하려 하면, 각개(各個) 인격의 정당(正當)한 발달(發達)을 수(遂)하려 하면, 가련(可憐)한 자제(子弟)에게 고치적(苦恥的) 재산(財産)을 유여(遺與)치 아니하려 하면, 자자손손(子子孫孫)의 영구완전(永久完全)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 하면, 최대급무(最大急務)가 민족적(民族的) 독립(獨立)을 확실(確實)케 함이니, 이천만(二千萬) 각개(各個)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통성(人類通性)과 시대양심(時代良心)이 정의(正義)의 군(軍)과 인도(人道)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今日), 오인(吾人)은 진(進)하여 취(取)하매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여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丙子) 수호조규(修好條規) 이래(以來)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금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였다 하여 일본(日本)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려 아니 하노라. 학자(學者)는 강단(講壇)에서, 정치가(政治家)는 실제(實際)에서, 아(我) 조종세업(祖宗世業)을 식민지시(植民地視)하고, 아(我) 문화민족(文化民族)을 토매인우(土昧人遇)하여, 한갓 정복자(征服者)의 쾌(快)를 탐(貪)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기초(社會基礎)와 탁락(卓犖)한 민족심리(民族心理)를 무시(無視)한다 하여 일본(日本)의 소의(少義)함을 책(責)하려 아니 하노라. 자기(自己)를 책려(策勵)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怨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現在)를 주무(綢繆)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懲辨)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소임(所任)은 다만 자기(自己)의 건설(建設)이 유(有)할 뿐이오, 결(決)코 타(他)의 파괴(破壞)에 재(在)치 아니하도다. 엄숙(嚴肅)한 양심(良心)의 명령(命令)으로써 자가(自家)의 신운명(新運命)을 개척(開拓)함이오, 결(決)코 구원(舊怨)과 일시적(一時的) 감정(感情)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아니로다. 구사상(舊思想), 구세력(舊勢力)에 기미(羈靡)된 일본(日本) 위정가(爲政家)의 공명적(功名的) 희생(犧牲)이 된 부자연(不自然), 우(又) 불합리(不合理)한 착오상태(錯誤狀態)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여, 자연(自然), 우(又) 합리(合理)한 정경대원(正經大原)으로 귀환(歸還)케 함이로다. 당초(當初)에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로서 출(出)치 아니한 양국병합(兩國倂合)의 결과(結果)가, 필경(畢竟) 고식적(姑息的) 위압(威壓)과 차별적(差別的) 불평(不平)과 통계수자상(統計數字上) 허식(虛飾)의 하(下)에서 이해상반(利害相反)한 양(兩) 민족간(民族間)에 영원(永遠)히 화동(和同)할 수 업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巨益深造)하는 금래(今來) 실적(實績)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眞正)한 우호적(友好的) 신국면(新局面)을 타개(打開)함이 피차간(彼此間)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捷徑)임을 명지(明知)할 것 안인가. 또, 이천만(二千萬)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威力)으로써 구속(拘束)함은 다만 동양(東洋)의 영구(永久)한 평화(平和)를 보장(保障)하는 소이(所以)가 아닐 뿐 아니라, 차(此)로 인(因)하여 동양안위(東洋安危)의 주축(主軸)인 사억만(四億萬) 지나인(支那人)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濃厚)케 하여, 그 결과(結果)로 동양(東洋) 전국(全局)이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悲運)을 초치(招致)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조선독립(朝鮮獨立)은 조선인(朝鮮人)으로 하야금 정당(正當)한 생영(生榮)을 수(遂)케 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으로 하야금 사로(邪路)로서 출(出)하여 동양(東洋) 지지자(支持者)인 중책(重責)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支那)로 하야금 몽매(夢寐)에도 면(免)하지 못하는 불안(不安), 공포(恐怖)로서 탈출(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東洋平和)로 중요(重要)한 일부(一部)를 삼는 세계평화(世界平和), 인류행복(人類幸福)에 필요(必要)한 계단(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區區)한 감정상(感情上) 문제(問題)이리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時代)가 내(來)하도다. 과거(過去) 전세기(全世紀)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人道的) 정신(精神)이 바야흐로 신문명(新文明)의 서광(曙光)을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 신춘(新春)이 세계(世界)에 내(來)하여 만물(萬物)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呼吸)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이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의 세(勢)이니, 천지(天地)의 복운(復運)에 제(際)하고 세계(世界)의 변조(變潮)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무 주저(躊躇)할 것 없으며, 아무 기탄(忌憚)할 것 업도다. 아(我)의 고유(固有)한 자유권(自由權)을 호전(護全)하여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自足)한 독창력(獨創力)을 발휘(發揮)하여 춘만(春滿)한 대계(大界)에 민족적(民族的) 정화(精華)를 결뉴(結紐)할지로다.
오등(吾等)이 자(慈)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幷進)하는도다. 남녀노소(男女老少) 없이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여 만휘군상(萬彙群象)으로 더불어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케 하도다. 천백세(千百世) 조령(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全世界) 기운(氣運)이 오등(吾等)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着手)가 곳 성공(成功)이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光明)으로 맥진(驀進)할 따름인저.
공약 삼장(公約 三章)
一.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생존(生存), 존영(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이니, 오직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一.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一.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여,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조선건국(朝鮮建國) 사천이백오십이년(四二五二年) 삼월(三月) 일일(一日)
조선민족대표(朝鮮民族代表)
손병희(孫秉熙)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백용성(白龍成) 김완규(金完圭) 김병조(金秉祚) 김창준(金昌俊) 권동진(權東鎭) 권병덕(權秉悳) 나용환(羅龍煥) 나인협(羅仁協) 양순백(梁旬伯) 양한묵(梁漢默) 유여대(劉如大) 이갑성(李甲成) 이명룡(李明龍) 이승훈(李昇薰) 이종훈(李鍾勳) 이종일(李鍾一) 임예환(林禮煥) 박준승(朴準承) 박희도(朴熙道)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신석구(申錫九) 오세창(吳世昌)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최성모(崔聖模) 최 린(崔 麟) 한용운(韓龍雲) 홍병기(洪秉箕) 홍기조(洪其兆)

▲3·1독립선언문

 <대한독립여자선언서>(大韓獨立女子宣言書)

2·8독립운동을 시작으로 3·1운동이 계속해서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을 위시하여 노령(露領) 및 만주 등 해외에 있던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여성들로 구성된 '대한부인회'를 조직하였다.
간도에 있는 대한부인회의  김인종(金仁宗)·김숙경(金淑卿)·김오경(金五卿)·고순경(高順卿)·김숙원(金淑媛)·최영자(崔英子)·박봉희(朴鳳姬)·이정숙(李貞淑) 등 8인은 4월에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작성하여 국내외에 보내면서 한국 여성들도 독립운동을 할 것을 고취했다.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동포시여"로 시작하는 선언서의 내용을 보면, "필부함원에 오월비상이라 하였거늘 하물며 수천만 창생의 억울 불평한 애소를 지공무사하신 상제(하나님)께서 통촉하심이 없으리요? ... 우리도 비록 규중에 생활하여 지식이 몽매하고 신체가 연약한 아녀자의 무리나 국민됨은 일반이오, 양심은 한가지라... 우리 여자 회에서도 동서를 물론하고 후생의 모범 될 만한 숙녀 현원이 허다하것마는 특별히 금일에 우리의 본받을 선생을 들어 말하면 ... 우리나라 임난 때에 진주의 논개씨와 평양의 화월씨는 또한 화류계 출신으로 용력이 무쌍한 적장 청정과 소섭을 죽여 국가를 다시 붙든 공이 두 분 선생의 힘이라 하야도 과언이 아니니, 우리도 이러한 급한 때를 당하야 겁나의 구습을 파괴하고 용감한 정신을 분발하야 이러한 여러 선생을 본받아, 의리의 전신갑주를 입고 신력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유진무퇴하는 신을 신고 일심으로 일어나면, 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이 하감하시고 우리나라 충혼 열백이 명명 중에 도우시고 세계만국의 공논이 없지 아니할 것이니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 없으며 두려할 것도 없도다.”라고 되어 있으며, 다른 독립선언문과 달리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만 쓰여졌다.

▲독립기념관에 소장중인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송죽회 및 대한부인회>

송죽회(松竹會)라는 명칭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와 대나무를 말하며 '송죽비밀결사대'라고도 부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송죽회는 평양 숭의여학교의 교사 김경희(金敬熙, 敬喜)·황에스더와 졸업생 안정석(安貞錫) 등 3명이 재학생 중 애국심이 투철한 박현숙(朴賢淑)·황신덕(黃信德)·채광덕(蔡光德)·이마대(李馬大)·송복신(宋福信)·이효덕(李孝德)·김옥석(金玉石)·최자혜(崔慈惠)·서매물(徐梅勿)·최의경(崔義卿)·이혜경(李惠卿) 등 20명을 선발해 조직하였다.

▲ 송죽결사대 (앞줄 왼쪽) 김경희, 김신희

이들은 조직을 확장하기 위해 창설자 3명 중 김경희는 학교에서, 황에스더는 서울에서, 안정석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민족정신의 함양과 정신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매주 1회씩 기숙사에서 기도회 형식의 비밀집회를 통해 토론회와 역사강좌를 가졌다.

▲ 평양 숭의여학교(1907)

숭의여학교는 새뮤얼 마펫 선교사(마포삼열)가 1903년에 평양에 세운 기독교학교이다. 1916년부터는 회원들이 졸업하면서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서 장로교 계통 여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평남, 황해, 전남, 전북, 경남, 제주 등에 지역 조직을 만드는 활동을 펼쳤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점조직화 했고, 이문회(以文會)·유신회(維新會)·공주회(公主會)·기도동지회(祈禱同志會) 등의 다른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본부를 평양에 두고 1명의 회장이 전조직을 관장하였다.

▲ 평양 숭의여학교

 3·1운동 이후 임시정부요원으로 활약했던 송죽회 초대회장 김경희(金敬熙, 1887~1919)에 대한 임시정부의 추도사에 의하면, 이 회에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저축한 금액이 600여 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것만 보더라도 송죽회가 얼마나 착실하게 운영, 발전해갔는가를 알 수 있다.
김경희는 1915년에 지리를 가르치던 중, 하얼빈을 가리키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으로, 독립하면 그 곳에 안중근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이듬해에 발각되면서 1916년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이후 김경희는 송죽회 활동을 이어가면서 서문밖교회에서 권사로 활동하였다. 
3월 1일에 기독교계 여성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에 나선 김경희는 이로 인해 일본군에 쫓기자 샹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하였으나 건강이 나빠져 7월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김경희는 평양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부인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결성 준비를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고문으로 얻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19년 9월 19일 32세에 작고하였으며, 대한애국부인회는 두 달 후인 1919년 11월에 결성되었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1920. 3. 1.일본 경찰에 체포된 배화여고학생들)

송죽회의 활동은 회원들이 일본·미국 등지로 유학을 가면서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까지 확산되었다. 3·1운동 당시 지방에서 여성들이 많이 참여한 것은 송죽회의 조직이 크게 작용한데 기인하며 송죽회는 대한애국부인회로 이어졌다.
한편, 황에스더(황애덕)는 1918년 선교사 홀(R.S. Hall)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하여 김마리아·현덕신(玄德信)·송복신(宋福信)·정자영(鄭子暎) 등과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해 유학생 간의 친목과 더불어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에 힘썼다. 
2.8독립선언 주동자로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된 황에스터는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가던 3월 19일 일본경찰에 잡혀 그 해 8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여성계의 독립운동이 부진함을 개탄하던 김마리아와 더불어 애국부인회를 확대 재조직하고 총무직을 담당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 임원들. 최선화, ?, 김순애, 권기옥, 방순희

 한편 1908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부인회가 조직되었으며, 1917년에는 새크라멘토에서 '한인부인회'가 조직되었다. 그 당시 미국 전역보다 10배 이상 한인이 많았던 하와이에서는 신명부인회와 부인교육회(신학과 가정학 교육) 등 몇개의 단체를 통합하여 1913년 4월 19일에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으며, 첫 회장은 황마리아였다.

1909년 4월에 "부인교육회"가 조직되면서, 6월 <신한국보>에 그들의 조직 목표를 발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 인류로 생겨나서 남녀를 무론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는 일반이다. 고유한 권한이 풍부하여 성질 총명이 차별이 없거늘 사업상 능력에 어찌 우열이 있겠는가?... 여자는 국민의 주모이다.... 여자의 자녀를 기르는 공적이 어찌 장부가 세상을 건지는 사업에 사양하겠는가? 여자 교육은 현재 세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들은 자녀의 국어교육을 장려하며 모든 용품에서 일본제품을 배척하며 교회와 사회단체를 후원하고 재난을 당한 동포를 구제하는데 노력하자는 목표를 세워 재봉소를 만들어 옷을 만들어 팔아서 그것으로 열심히 전도사업을 하며 기금을 모았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를 위한 재판 경비를 보내기도 했다.

▲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이며 독립운동가 권기옥

 자금이 모아지자 1914년 지부를 설치하고 그 해 4월 17일에 이승만 박사가 교장으로 있는 한인중앙학교에서 설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1919년 독립운동 소식을 들은 하와이의 여성들은 "대한부인구제회"를 조직하였다.

▲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1919)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여성들은 나라와 후손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혜롭게 선교와 애국운동에 힘썼다. 
"3.1만세운동"이라고 하면, 누구나 "유관순"을 떠올리듯 성경을 보면, 어려운 때에 지혜로운 여성들의 활약으로 국난을 비롯한 대소사를 극복한 예가 많다. 
왕비 에스더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라는 모르드개의 말에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라며 금식하고 그의 민족을 구했다.

또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아벨 성에 숨은 세바를 그 성의 지혜로운 여인이 나서서 그 성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를 죽이고 그 성을 구원하기도 했다(삼하 20장).

가나안 왕 야빈이 20년간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여선지자 드보라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 이길 것이라는 응답을 받은 상태였으며, 드보라의 참모이며 군대장관인 바락은 드보라에게 함께 전쟁에 나갈 것을 부탁한다. 그래서 여선지자 드보라는 함께 전쟁에 나갔으며, 전쟁에서 쫓겨가는 가나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헤벨의 아내 야엘이 그의 장막으로 정중히 모셔서 편히 잠들게 한 뒤에 말뚝으로 그를 죽였고 이스라엘이 승리했다(삿 4-5장). 
이때 드보라는 노래를 지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동시에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삿 5:7)라고 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사진

오늘날 대한민국의 어미들은 어떠한가? "죽으면 죽으리라"면서 금식하며 민족을 구하는 에스더와 드보라처럼 "내가 일어나서 대한민국의 어미가 되었도다"라고 할 만큼 우리나라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응답을 받고 있는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을 인하여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 31:30-31)

아니면,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비롯한 성평등을 외치며 선악과를 먹여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놓은 하와 그리고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온 민족이 맘몬신을 섬기게 하는 동시에 거짓 증인을 내세워 포도원 주인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남편 아합왕에게 준 이세벨처럼 충동질로 가정과 교회와 대한민국을 죽음의 골짜기로 끌고간 아내와 어미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왕하 9:22)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계 17:5)

대한의 어미들아, 대한민국을 기독교나라와 민주주의 나라로 세우기 위하여 온갖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과 보이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노고가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을 앞서 먼저 가서 준비하시고 때론 뒤에서 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가?

이제 더이상 육체의 가증한 열매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어떠한 풍파에도 넘어지지 않을 반석위에 지은 집을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물려주자!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대한 독립 선언서(1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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