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경북 의성경찰서 감옥에서 투옥됨)

주기철(朱基徹, 1897-1944)은 한국 교회에 순교자로서 가장 큰 위인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사람들은 한반도 전역을 왕래하며 거주했다. 신학교는 평양에 장로회신학교가 있었고, 주기철도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한 뒤에, 1925년 2월 19회로 졸업 그 해 12월에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주기철의 동기생에는 홍택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회는 1922년 양산읍교회에서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사역했고, 부산 초량교회(1926-1931) 1월에 위임목사로 취임했고, 마산 문창교회(1931-1936), 그리고 평양 산정현교회(1936-1944)에서 사역했다.

주기철 목사는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에 대해서 초지일관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한 사역을 평양에 있는 조만식 장로가 보아 산정현 교회로 청빙한 것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인사가 조선교회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일제에 큰 가시였을 것이다. 주 목사는 1938년에 장홍련 사건으로 일차 검속을 당했다. 장홍련 사건은 평북노회장이었던 김일선이 1938년 2월에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그 소식을 들은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기숙사 앞에 있는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절단했다. 이에 대해서 배후조종자로 주 목사를 지목해서 검거한 것이다. 그러나 혐의가 없기 때문에 곧 석방되었다.

주기철 목사가 투옥되었을 당시로 추정되는 의성경찰서 사진

전국 노회들은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분위가 확산되었다. 일제는 마지막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허용 가결을 주도했다. 이에 주기철 목사를 1938년 8월에 의성농우회 사건으로 검속하여 7개월을 의성 구치소에 구금시켰다. 의성농우회는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농촌경제활성화 사업으로 야학, 농사개량, 협동조합 등을 진행했는데,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일사상 혐의로 사건화한 것이다. 이 일에 평양에 있는 주기철 목사를 연루시켜 검거한 것이다. 1938년 9월 10일 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선교사들은 그 열흘 후인 개강을 앞두고 있었는데, 평양장로회신학교의 개강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39년 2월에 의성경찰서에서 석방되었다. 다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사역했고, 일제는 담임목사를 해임시키기 위해서 3차 검속을 진행했고, 평양노회는 목사직을 면직하고 사택에서 가족까지 추방시켰다. 1940년 석방되었지만, 곧 4차 검속되어 1944년 4월 21일에 형장에서 순교했다.

만약 우리나라 전체가 자유민주주의 체계였다면 평양은 주기철의 순교지로 큰 감화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38선 이북이 공산주의 체제가 되면서, 1950년 9월 주 목사의 장남 주영진 전도사는 순교했고, 몇 자녀들만 월남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의 출생지인 창원에 기념관이 있다. 그리고 주기철이 구금되었던 의성경찰서가 보존되었고, 유일하게 주기철의 구금 현장이 보존되어 있다.

경북 의성군 의성읍 동서1길 17(후죽동 678-2)에 위치한 “옛 의성경찰서”는 일제강점기 주기철 목사가 수난을 받았던 유일한 사적이다. 2018년 예장(합동) 총회는 “옛 의성경찰서의 터와 건물”를 제4호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했다. 주기철은 한국 교회의 사역자이다. 이에 의성 지역의 경중노회는 2015년부터 “순교자 주기철 목사 수난기념사업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일을 진행하는 사무국장 추성환 목사는 어떻게 도심지에서 그 건물이 파손되지 않고 보존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전한다. 모든 건물들을 헐고 그 위에 새로운 건물들을 지었지만 옛 의성경찰서 건물만큼은 일부 훼손되었지만 일부를 유지하고 있다. 의성경찰서는 주기철 목사 외에도 더 많은 항일 애국 지사들이 감금되었고 고문을 당했던 곳일 것이다. 당시 정운권은 의성읍 폐문 문제로 구속되었었고, 출소한 뒤에 자기가 갇혔던 곳을 기념한 사진이 있는데, 현재 있는 건물이다. 추 목사는 자료 고증을 통해서 현재 있는 후죽동 와가가 일제 강점기 의성경찰서 건물이었다고 사료와 증언으로 입증시켰다.

주기철 목사의 출생지인 창원도 의미있는 곳이다. 그러나 주기철의 행적이 살아 있는 곳인 의성경찰서는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사역이 아닌 부당하게 구금되어 고초를 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주기철은 장로교 목사로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적 결단으로 사역했고 순교했다. 그 향취가 뜻밖에 의성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곳이고, 그 흔적이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는 것도 특이하다.

주기철 목사 수난지 (구)의성경찰서 단체 순례

NO JAPAN이 뜨거운 시점에 “의성경찰서”에서 부당한 종교탄압을 온 몸으로 저항했던 순결한 사역자의 발걸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역자는 자기 의지가 아닌 타력에 의해서 움직인다. 평양으로 간 것도, 평양에서 의성으로 간 것도.. 전자는 주의 부름심에 후자는 일제의 폭압에 의해서 움직였다. 그 고난과 순교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와 사회는 힘을 다해서 NO JAPAN을 외칠 수 있다. “옛 의성경찰서 터”가 잘 보존되고 활성화되어 순교자의 순수한 길과 애국 열정의 길을 체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추 목사가 사역하는 의성철파교회는 동계올림픽 컬링으로 유명한 “의성마늘소녀”들이 섬기는 교회이기도 하다. 컬링과 마늘소녀는 내륙의 숨은 도시 의성을 모두가 알게 만들기도 했다.

자세한 문의는 010-3815-0802(추성환 목사, 의성철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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