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눅 10:1-20] 70 제자를 파송하심. 예수께서 성과 마을에 12제자를 파송한 뒤에(9:1),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1절).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군이 적었다(2절). 추수할 일군을 구해야 했다(2절). 제자들에게 귀신과 병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다. 12제자를 파송하시는 기사는 마태, 마가, 누가가 기록했는데, 70제자 파송은 누가만 기록하고 있다(1-20절). 누가는 복음이 왕성하게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70인의 제자들은 12제자와 동일한 매뉴얼로 활동했다. 집에 들어갈 때 평안을 선포했고, 평안을 받은 집에 머물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다(9절). 영접하지 않거든 거리에서 먼지도 떨어버리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고 전하도록 했다(11절). 70인 전도대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전했다(9, 11절).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성취하여 성령을 보내심으로 임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예수께서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 지역(거라사, 벳세다, 가버나움)에 대해서 회개하는 두로와 시돈과 비교하면서, 엄중한 심판을 선언했다(13-15절, 마 11:20-24). 현재 거라사 지역은 고대 유적물들이 있는 폐허 도시여서 관광에서 중요한 코스가 되었다. 복음 전도는 택자를 구원하는 유일한 수단이면서, 복음에 순종하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의 의미까지 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복음전도를 금지하는 개념까지 대두되는 실태이다. 복음전도는 관계전도라기 보다는 인격전도라고 해야 한다. 관계를 맺어 전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인격 교제를 이루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전도는 단도직입적으로 복음을 전도할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 예비된 자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한 잃은 양을 찾는 전도자도 필요하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인격 관계를 형성하며 삶 속에서 복음을 전도하는 방식이다. 복음전도는 잃은 생명을 찾아 천국백성을 이룸에 관점이 있다. 복음전도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이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면 수용자의 태도로 결정하는 것이지, 전도자가 다른 의도를 갖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니다.

예수께서 보내신 제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버리는 것은 예수를 버리는 것이다(16절). 예수께서 보내신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전했다. 오순절 이후 주의 사역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온 것(성령 오심, 십자가의 도, 고전 1:18)을 전한다.

70인은 활동을 끝낸 뒤에 예수께 기뻐하며 돌아와서 사역보고를 했다(17절). 예수께서 그들의 사역으로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18절). 그리고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결코 해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다(19절). 그리고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권면하셨다(20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음의 사람뿐이다. 복음의 사람은 하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의 이름도 하늘에 기록될 것이다. 전도자는 자기가 전한 사람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유익과 기쁨을 알고 있다.

2. [눅 10:21-2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예수께서 70인의 보고를 들으면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21절). 그리고 아버지께 기도했다(21절). 70인의 전도 보고로 삼위일체 현현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며 성령으로 기뻐하신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세상에 아들이 나타나고 아들을 믿는 것이다(요 3:16). 그 일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22절). 그리고 제자들에게 복을 선언했다(23절). 그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보고 싶고 사모했던 “그 메시아”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영접한 우리도 “그 메시아”를 보고 싶다. 그러나 12사도, 70인의 제자는 복된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완전한 계시를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복음의 실체이신 예수를 보고 함께 먹으며 만지는 복은 상상만 해도 떨리는 상황이다(24절, 요일 1:1). 사도들은 계시 전달자이며 예수를 직접 뵈었지만, 완전한 계시 체계를 보지 못했다. 완전한 계시 체계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실체(實體, homoousia)의 하나님, 삼위일체(Trinity)로 존재하신 것이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12제자는(바울 포함한) 야곱의 12아들이 12지파를 이룬 것처럼 한 명도 실족하지 않고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교회는 성령으로 세워졌고 300년이 지난 뒤에 구체적인 믿음의 대상을 고백했다.

3. [눅 10:23-37] 선한 사마리아 사람.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했다(25절). 그는 예수께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다(25절). 예수는 그에게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 반문했을 때,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라고 답했다(26-27절).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율법의 핵심에 대해서 당시 율법교사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그것을 행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다(28절). 그런데 율법교사는 율법을 어떻게 행할지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누가 이웃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율법교사는 자기 정당성을 위해서 이웃이 누구인지 여쭈었다(29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30-37절). 우리는 이 본문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한다. 이 원리를 채용해서 “선한 사마리아법”도 제정하기도 했다. 위기에 처한 시민을 조치하지 않았을 때에는 위법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폭행당해 거의 죽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고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대인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어 버려진 이 사람을 제사장, 레위인은 보고서 그냥 피해서 지나갔다. 그 다음에 온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갔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 사람을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35절). 예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자“에게 이웃이 되겠느냐?”(36절). 율법교사는 레위인, 제사장이라고 말하지 못했고,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선한 이웃”이란 종교와 국가와 민족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그러나 율법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복음은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사랑하는 법이다. 자비를 베푼 자는 친구로서 이웃이고, 나를 해롭게 하는 자는 원수로서 이웃이다. 율법과 복음이 차이가 없는 부분이다. 그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율법주의, 율법의 실체께서 오시기전 몽학선생으로 율법을 지키는 요한의 법(죄죽임만의 법)은 사랑과 자비가 없기 때문에 복음이 아니다. 율법이 부족한 것은 이웃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바른 믿음의 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복음은 나를 해치는 원수도 이웃이며, 복음의 실체(히 12:2)를 명확하게 알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하게 행할 수 있다.

4. [눅 10:38-42]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마르다와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가 있었다(38-39절).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서 말씀을 들었고,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로 분주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께 마리아를 보내줄 것을 청했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많은 일로 근심하지 않도록 권면하셨다(41-42절). 많은 일이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결정짓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마르다가 불평 없이 자기 일을 수행한다면 주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차이가 없다. 또한 마리아가 주의 말씀을 들으며 우월의식이나 비교의식을 갖는다면 마르다와 갖은 실수를 범한 것이다.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한 가지 일로 만족하면 자기의 평안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한 가지의 일을 성취하는 것은 많은 일을 하면서 한 가지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마리아는 주의 말씀을 듣는 일, 한 가지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언니의 힘듬을 보면서도 부정하고 한 가지 일을 이루었다. 마리아가 얻는 한 가지 일(주의 말씀을 들음)은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5.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복음을 심장에 주셨으니,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이 있음을 복음을 전함으로 알게 하옵소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택한 백성을 만나 생명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모여 잃어버린 주의 자녀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나에게 주어진 한 가지, 그 일을 생명이 다하기 전에 성취할 수 있도록 복을 주옵소서. 나의 생명과 호흡으로 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주의 교회와 이웃에게 유익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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