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의 원 이름은 공구(孔丘)이다. 그의 유년시절은 매우 불우하였다. 그러나 그는 식당 등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줄곧 홀로 공부(獨學)를 하였다. 흔히 그를 생이지지(生而知之)라한 것도, 그가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을 터득(格物致知) 했기때문이리라.

때는 하(夏)은(殷)에 이어 중국을 호령하던 주(周)나라가 쇠미해지니, 중국 천하는 삽시간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쟁명(爭名)하는 춘추시대(春秋時代)가 되자, 중국천하는 더욱 어지러워져 갔다. 그때 노(魯)나라 출신 공자가 제자들을 훈육하며 천하를 주유하면서, 군왕들에게 왕도정치를 설파하였지만, 군왕들마다 부국강병책을 주장하는데, 왕도정치가 그들의 귀엔 우이독경이었다. 공자는 그나마 제자들이 하나둘씩 여러나라의 관리가 되어, 왕도정치를 펴는 것을 흐뭇해 하였다.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자유(子游) 역시 노(魯)나라의 무성(武城)고을의 성주가 되었다. 이에 공자는 제자 자유가 이 고을을 잘 다스리는지를 보고 싶어서 무성엘 갔다. 무성에 이르니, 고을에서 예악(禮樂)소리 가 들려왔다. 원래 예악은 궁중이 있는 큰 도읍에서나 연주하는 것인데, 자유는 공자에게서 배운 예악을 무성고을에 가르쳐서, 무성고을의 백성들이 큰 도(道) 즉 예악사어서수(禮樂祀語書數)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그 예악을 듣고 자유에게, “소 잡는 칼로 닭을 잡고 있구나(牛刀割鷄)”라고 평한다. 자유가 무성을 잘 관리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큰 인물을 또는 예악이라는 큰 도(道)를, 이 작은 성에서 쓰기에는 너무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리라. 이 이야기는 논어(論語)양화편(陽貨篇)에 나오는 이야기로, 우도할계(牛刀割鷄)란, 작은 일을 하는데 지나치게 큰 수단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이다. 자그마한 일에 엄청난 노력을 쏟는 사람들의 잘못된 행태를 언급할 때도 이 말이 쓰여지기도 한다.

흔히 요즘을 스마트시대(smart age)라고 한다. 그래서 핸드폰도 요즘에는 스마트 폰(smart phone)이라고 불린다.날이 갈수록 스마트 폰의 성능이 좋아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자동차의 기능도 단순히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의 성향에 따라서 많은 기능이 추가되고 있다. 모든 가전제품도 그 기능이 참으로 다양해 졌다. 그리고 기술이 좋아지면 값도 따라 오른다. 내가 어느 날 스마트폰을 사용하다가 문득, ‘비싼 돈을 들여 구입한 이 스마트폰의 기능을, 구입한 돈에 걸맞게, 제대로 알고 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젊은 사람들이야 그 기능을 십분 활용할 줄 아니까, 폰 값 내는 것이 아깝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같은 늙은이에겐, 솔직히 우도할계(牛刀割鷄)란 생각이 든다. 

요즘 공권력의 정점에 있는 법무부장관과 검찰총장의 힘겨루기가 마치 내 눈엔 우도 할계처럼 보이는 것은 한갖 기우일까? 똑같은 대한민국 법인데, 어찌 법무장관의 법적용이 다르고, 검찰총창의 법적용이 왜 이렇게 다른가? 무릇 법이란 법적 안정성과 구체적 타당성 이 있어야 살아있는 법이될터인데 말이다. 법조인은 법을 타는 법 곡예사인가? 아님 살아 있는 당위의 법을 세우는 자들인가? 왜 빈대잡자고 나라의 근간을 허무려는가? 왜 이렇게 서로 초심을 잃어버리고 법을 무기삼아 우도할계하는 우(愚)를 범하려 하는지 참으로 개탄스럽다.

목회자나 성도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신앙의 법도가 있고, 동시에 신앙인이 마땅 히 버려야 할 '세속적인 안목들'이 있다. 어떤이는 집사가 되자 바로 장로가 되고, 그리곤 장로가 되더니 바로 목사가 되고, 그래야만 성이차는가 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잃어버린 나를 찾기 보다, 신앙이나 인간됨의 본질은 망각하고, 겉 모습 즉 자기 과시욕만 채우려고 한다.

옛 선인은 "사람됨의 그릇은, 그 사람이 선호하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모양 (인격)이 형성된다."고 하였고, "의복과 같은 겉 모습에만 마음이 쏠리는 것은, 마음과 인격 이 잠들어 있기때문이라" 하였다. 말씀이 은혜가 되어 삶이 변화되면, 이전에 좋았던 세상적인 안목이 다 바뀌어 질텐데, 세상 것에 깊숙히 물든 인생들은, 오로지 더 큰 욕망을 향하여 줄다름 친다.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재물과 함께 지혜를 주셨다. 그런 그가 처음에는 이를 지켜 나라를 잘 치리했지만, 그가 처음 마음을 잃고난 뒤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탕진해 버린다. 그러나 그의 삶은 결론적으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부를 허락하신 것이, 자신의 궁궐을 짓는 데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인가? 많은 여자를 거느리며 살라고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신 것인가?

삼손도 마찬가지다. 나귀 턱 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일 정도의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삼손은 들릴라 여인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진실로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데 사용한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그 누구든지 초심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됨 즉 사람됨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하는가? 혹여 세상의 만족을 얻기위해 기도하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가? 진실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 명예를 구하는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가? 혹 내 욕망을 채우려는 데 있는가?

옛말에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란 말이 있다. 치리자는 치리자다워야 하고, 관료는 관료 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이 말은 각자 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리라. 나랏 일을 잘못하고 있으면 그것을 감추려 들거나,  이러한 정부의 행태만 고발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직도 세상적인 안목과 세상적인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있는 우리 자신의 행태도 고발하자! 하나님을 위한 큰 꿈을 가지시라! 그 크신 하나님을 작게 만드는 것은 아직도 세속적 삶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

난세에 태어난 공자는 인의(仁義)정치를 펴고자 천하를 주유 하였지만, 그의 큰 그릇을 쓸 군주가 없었다. 공자는 칠십에 이르러서 자기에 대하여,
삼십이 입(立), 홀로서기를 하고, 
사십이 불혹(不惑), 혹하지 아니하며,
오십이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알고,
육십이 이순(耳順),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소화하며,
칠십이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諭矩), 내가 하고싶은대로 행하여도, 전혀 법도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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