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47) 긍휼(mercy)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원형극장은 시민에게 검투기, 연극 등의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가 마련한 야외 시설이었다. 아테네 원형 극장의 경우 2만 명이나 되는 아테네 시민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마라톤전쟁과 살라미스전쟁에서 살아남은 참전 용사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연민, 동정이나 공포를 유발시키며 이것들은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 원인이 된다고 진술했다. 그리스 비극의 뮈토스에는 비극을 보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한 후, 그들의 삶을 이기적인 삶에서 공동체적인 삶으로 확장하려는 ‘자비’라는 삶의 원칙을 훈련시킨다. 영어로 번역될 수 없는 한국말 가운데 하나로 정(情)을 들 수 있다. 정을 영어로 사실대로 옮기는데 어려움이 있다. compassion을 연민(憐愍)으로 해석한다면 sympathy는 동정, empathy는 공감 내지 감정이입을 뜻한다. 성경에 나오는 덕목인 긍휼 또는 자비를 영어로 옮기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원래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영어보다 다른 단어로 번역되는 덕목들이 실제로는 구분이 불가능한 경우들이 있다. 긍휼 또는 자비는 연민에 해당하는 compassion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비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겨진 연민이라 생각하면 유익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도시의 원형극장에 행해진 비극공연을 보면서 관객들이 자비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은사로서 긍휼 또는 자비와 같지 않다. 비극에서 공감하는 자비는 구체적인 행위이기보다 오히려 감정적인 것이다. 이 자비는 종말론적 의미를 전혀 지니지 않는 것이었다.

1. 긍휼은 베풀어야 제 맛이다

‘자비’는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공감할 때 자신도 모르게 심연에서 움트는 감정이다. 자비는 상대방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간절히 원하는 것, 상대방이 사랑하는 것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다. 자비는 또한 상대방의 비극적인 상황에 함께 눈물을 흘릴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탈출하도록 노력하는 수고다. 그리스어에서 자비 또는 긍휼에 해당하는 엘레오스는 주로 이처럼 심리학적 개념이다. 하지만 성경에 사용된 개념은 이와 완전히 다른 사상적 배경을 나타낸다. 헤세드는 법률적인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자비를 이해할 때 헬라사상의 관점 또는 우파니샤드와 같은 흰두교 경전의 관점이 아니라 히브리 원어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고대 인도의 힌두교 경전인 우파니샤드에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을 ‘마이트리(maître)’라 설명한다. ‘자비’의 첫 번째 요소는 ‘자(慈)’로, 흔히 ‘사랑’으로 번역한다. ‘마이트리’는 고대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내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느끼고 가하는 감정이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고, 상대방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미리 살펴 아는 마음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그것을 마련해주려는 애틋한 마음이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마이트리’는 한자의 ‘자’로 번역되었다. ‘慈’라는 글자 자체가 나와 상대방의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물(玄)가물(玄)한 마음(心)’이다. 사랑은 타인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마음이다.

바울이 은사의 한 가지로 말하는 긍휼 또는 자비는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또는 불교의 개념이 아닌 히브리어 헤세드( חַסְד)ֵּ 의 번역어로서 해석해야 한다. 헤세드는 사랑, 자비, 불쌍히 여김의 의미를 포함하는 복합적 개념이다. 그 가운데 자비는 동정적인 사랑에 근거한 충성을 뜻한다. 이스라엘은 비록 언약을 멸시했으나, 그 언약을 보호하는 충성을 뜻한다. 하나님이 주기로 한 결정한 자비는 아무런 공로 없이 얻는 것이다. 헤세드는 성품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성실함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바울은 긍휼을 베풀 때 즐거움으로 할 것을 권면한다. 헤세드는 상호적 관계와 그 밖의 계약적 상호 관계에서 야기되는 태도를 가리킨다. 여러 세대 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비를 보이셨지만, 그와 같이 무시당하는 자비 뒤에 결국 심판이 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을 회복시켜 주는 하나님의 자비를 새롭게 경험하기를 소망했다.

A.D. 2세기 인도 사상가 파탄잘리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잡념을 제거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도록 수련하면서 네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했다. 이는 후대 불교인들에게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셀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한 마음 네 가지’로 전수됐다. 두번째는 ‘카룬나(karuna)’다. 카룬나는 한자 ‘슬플 비(悲)’로 번역된다. 슬픔이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서로 등을 대고 함께 울 수 있는 마음이며 그 이웃이 슬픈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헤아리고 그 방안을 마련해주는 용기다. 그리스 비극엔 ‘자비’를 훈련시키는 뮈토스, 즉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성경의 자비는 비극공연에서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자비와 다르다.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보이신 자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비를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로 목격하고 묘사할 뿐만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긍휼을 베푸는 것은 구약에서 종종 함께 언급되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이건, 장애자, 병든 사람, 죽어가는 자들이건 곤궁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돌보는 일이다.

헤세드는 사랑과 불쌍히 여김과 친절을 뜻하는 말로,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러한 것에 근거하여 성립되었다. 헤세드는 타당한 계약 행위, 즉 계약 당사자들 상호간의 연대 책임을 의미한다. 계약은 동등한 사람 사이에 맺어질 수도 있지만 상대방보다 더 강한 사람에 의해 체결되기도 한다. 둘 중 어느 경우든지 계약은 곤경에 처한 상대편에게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헤세드라는 뜻을 내포하는 엘레오스의 함축 의미는 계약에 대한 충성심에서 친절, 자비, 동정에 까지 미칠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하나님, 즉 긍휼을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예, 12:1) 언약의 백성인 우리 또한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긍휼을 여겨야 한다.

2. 불쌍히 여기는 자 vs 자비를 베푸는 자

로마시대 의사들은 고대 그리스 의학 기술을 승계 받았다. ‘의학의 아버지’라는 그리스의 Hippokrates는 의사란 환자를 과학적으로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복될 때까지 가족처럼 아끼고 돌봐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치료를 ‘정성 들여 아끼고 돌봐준다’는 의미에서 curare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여기에서 cure, care, curator 등이 나왔다. 사람들 특히 자신과 이미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 자를 향해서 자비를 베풀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는 자비가 결핍된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상처 입은 사람을 정성 들여 돌봐줄 뿐만 아니라 회복될 때까지 가족처럼 아끼고 돌봐 준 사람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사마리아인에게 자비란 연민의 감정이며 동시에 그로 인한 행동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자비를 베푼 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올바른 응답으로서 참다운 영성의 표지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제의적 정결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에 더 가치가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선한 사마리아인’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서 있는 장면이 아닌 환자를 말에 태우는 장면을 담았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사랑에는 진정한 힘이 있다. 사랑으로 한 일은 무엇이든 잘 한 일이다.” 프롬에 따르면 사랑도 그렇다. 삶의 중요한 가치인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과정이고, 사랑의 주체가 되는 내적 행동이다. 사랑에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사랑하거나 사랑에 빠지지 않고 사랑마저 소유하려 할 때 갈등이 생기고 싸움으로 비화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사람과 그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같을 수 없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불쌍히 여김이 동기로 시작하지만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자비를 베풀므로 사람들을 온전하게 만드는 가시적인 결과들을 산출해 내는 지를 잘 보여준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 말은 ‘마음이 사람을 향하다’, ‘마음이 상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동정이나 연민은 감정적인 색채가 농후한 반면에, 그 동의어 자비는 종종 적극적으로 구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비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비를 베푼 로서 행동으로 옮겼다(눅 10:37). 우리는 사마리아 사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는 결정적인 행동, 즉 사마리아 사람이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본다.

『The good Samaritan』,Vincent Willem van Gogh(1853-1890),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이방인의 위치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이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한다(롬 9:15-18). 즉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비롯되며, 이러한 선물이 이방인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표현된 또 하나의 측면인 것이다. 구원의 중심에는 자비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들임을 인식하고 새로운 자비를 베푸는 것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의 증표인 것이다.

바울은 ‘긍휼을 베푸는’ 은사가 있는 사람들, 아마도 다른 이들의 필요에 특히 민감하고 아픈 자와 다른 고난당한 자들을 방문하는데 헌신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직업의 종말’을 쓴 작가 Taylor Pearson은 저서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거나 다른 사람이 지시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긍휼을 베푸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따라하거나 다른 사람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현재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서, 교회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통로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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