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평균적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

동역의 기쁨은 비단 사역만이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도 이루어진다. 영의 좋은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육의 좋은 것을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다. 쉽게 말하겠다. 기도와 말씀을 통한 영적인 필요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으면 물질의 나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초대기독교는 원시공산사회를 실현함으로 천국공동체의 기쁨을 함께 경험했다. 서로 통용함은 삶의 전반에 걸쳐 일어나야 한다. 왜 수도원에서의 삶에만 국한시키려 하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수도원에서 가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가정에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수도원생활과 같은 삶을 살았다.

교회 안에서 평균적 삶을 실천함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고린도교회가 애찬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나가면서도 부자와 빈자의 간격을 메우지 못해 교회 분위기를 음울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야고보 사도는 교회신자들이 앉을 좌석에 차별을 두는 현상을 꼬집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기에 더더욱 힘이 들지언정 이런 삶을 실천하는 노력은 아름답다. 천국에 가서 자연스럽게 누릴 삶을 지상에서 리허설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리허설을 실제처럼 산다면 우리는 성인의 삶을 이룬다. 지금껏 ‘어찌 살아 왔는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어떻게 사느냐?’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양식에 변화를 꾀하라! 한 손 마른 자의 팔이 펴졌던 것처럼 자기에게로만 굽던 팔이 이제는 타인을 향해 펴져야 한다.

현대교회의 속사정을 가만히 살피면 피곤이 누적된 상태다. 사역자는 많은데 일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자질구레한 일들은 금세 해결되지만 미결상태의 문제들이 교회의 전진을 막고 건강한 교회 형성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러한 문제들 중에서 가장 밑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 사역자들 간의 틀어진 관계다. 동역의 기쁨이 부재한 것이 현대교회의 비극이다. 누구보다 함께 있어 즐겁고 더불어 사역함으로 기쁨이 배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찬바람이 불고 녹록치 않은 상처들이 서로를 부담스럽게 만든다. 여기에는 말세적 징조인 자기애와 극단적 이기주의의 성향이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Vatopedi monastery, Agio Oros, Greece

 

건실한 자애에 바탕 둔 진정한 타애

건전한 자기애는 사랑의 계명 완수에 있어 핵심이다. 원수 사랑이나 이웃사랑의 전제가 바로 “내 몸같이 사랑”이다. 자애가 없으면 타애도 없다. 타애가 크려면 자애도 커야만 할까? 꼭 그렇지 않다. 자기 사랑은 본능이기에 타인 사랑도 본능적이 될 만큼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자애를 언급했다. 자애가 지나치면 타애가 아예 불가능해진다. 자애에는 적정선이 있다. 자애가 과하면 이기적이 되고 자기중심의 삶과 사역이 연기를 피운다. 가늘게 퍼져가는 하얀 연기가 애초에는 아무렇지도 않다. 이것 역시 어느 상태에 이르면 검은 연기로 색깔이 바뀌고 무취의 상태에서 매캐한 냄새로, 다시 독성 강한 악취로 변한다. 자애를 절제하고 상대를 사랑함에서 동역이 꽃핀다.

뜻을 같이하면 마음의 일치도 견고하다. 마음이 하나면 말을 맞추기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사물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 느낌이 다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 다른 환경에서 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볼 때 여출일구(如出一口)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을 극복함이 관건이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역보다 가까운 것은 삶이다.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없으면 동역의 길은 요원하다. 동역은 꼭 같은 교회에서 사역을 함께 해야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니다. 다른 교회를 섬기면서 서로 기도와 말씀으로 교감하며 삶의 좋은 경험들을 나누면 얼마든지 동역의 기쁨을 나눌 수 있다.

 

누가 흥하고 누가 쇠해야 하나?

동역의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치 못하면 동역이란 말의 성찬(盛饌)에 불과하다. 바울 일행은 은혜 속에서 결속이 되었기에 사역에서 기쁨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었다(God's fellow workers). 아, 언제면 이런 고백을 담대히 할 수 있을까? 혼자만이 아니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 외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동역자이면 사람 간의 동역은 어렵지 않다. 사람과의 동역이 어렵다면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동역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동역 관계를 확립하고 복원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다.

주님이 당신과 나를 하나님나라 사역에 필요한 동역자로 삼아주시기를 바란다. 바나바는 바울과의 동역을 온전히 기뻐했다. 마가 문제로 긴장의 수위가 높아지긴 했어도 피차 갈등을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는 계기로 삼았다. 바나바는 바울이 다소에서 은거 중일 때 그를 찾아내어 자신의 후임자로 삼을 만큼 인재 발굴에 적극적이었으며 하나님의 사역에 사심이 없었다. 대국적인 관점에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존재로서 작용했다. “권면과 위로의 아들”(휘오스 파라클레세오스)이란 뜻을 지녔던 바나바의 이름은 보혜사 성령(파라클레토스)의 인격과 결코 무관치 않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본격 사역이 시작되면서 추종자들에게서 균열이 생겼음을 알았다. 제자들 중에 세례요한을 등지고 주님께로 가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안타깝게 여긴 누군가가 세례요한에게 제자층의 이반 현상을 고했을 때 “그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며 친구의 혼인을 기뻐하는 들러리 입장에서 신부가 제 신랑을 찾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진정한 동역자는 이런 것이다. 상대의 흥함을 기뻐하고 자신의 쇠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저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은사와 재능이 다르고 일할 역량과 시기도 정해졌기에 열매가 시원치 않고 반응도 없다며 볼멘소리를 할 필요가 없고 뭔가 해보려 안달복달할 이유도 없다.

 

정말 존재와 삶이 온통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는가?

동역의 기쁨을 성령님과의 사역에서 찾아야 하는데 영적 현상에서 찾는 세태가 위험스럽다. 영적 은사의 나타남과 성령을 통한 표적과 이적은 교회를 강건한 영적 공동체로 세우는 그루터기였다. 조국교회의 영성에는 현란이 돋보이지만 현명한 관리가 허술하다. 성령이 기쁨의 원천인가? 성령의 은사가 기쁨의 원천인가? 대답은 분명히 성령이 기쁨의 원천이라 말한다. 하지만 성령이 누구신지도 모른다. 찬양하고 고백하고 인용하지만 성령과의 친밀한 관계도 없다. 성부와 성자에 비해 덜 인격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함부로 부르고 막 대한다.

목회자가 성도의 기쁨이 되고 성도가 목회자의 기쁨이 되는 교회는 복되고 아름답다. 동역의 관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들과 나눈 우정을 바탕으로 기쁨을 주고 받으셨다. 주님은 제자들과 동역하셨다. 부활을 전후해서 동역의 질과 정도에 차이가 났을 뿐이지 주님이 그들을 동역자로 제외시키신 적은 생전에 없으셨다. 그들은 처음부터 주님과 함께 있었다(요 15:27). 그러하다. 서로에게 기쁨이 되면 동역자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면 환상의 동역자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가 진정한 고백이라면 당신은 주님의 동역자다.

『Jesus and his Disciples on the Sea of Galilee』, Carl Oesterley(1805-1891)

 

동역의 영원한 키워드는 “함께”

함께 기도하는가? 동역의 기쁨이다. 함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며 나누는가? 동역의 기쁨이다. 함께 생사를 같이 할지 몰라도 고락이라도 함께 하는가? 동역의 기쁨이다. 골로새교회에 바울을 대신해 파송된 두기고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바울의 동역자였다.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소개되었다. 주인을 배신하고 도주했던 오네시모도 바울의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자 바울의 동역자가 되는 즐거움을 누렸다. 내게는 마음의 동역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다.

동역이 아름다우려면 동역하는 당사자들의 삶이 진솔해야 한다. 진솔함이란 현실에서 동역의 삶이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동역은 단순한 구호나 외침이 아니다. 피 터지는 현실처럼 실제여야 한다. 필자는 참으로 누군가의 동역자가 되기 원하고 지금도 동역할 누군가를 기다린다. 동역은 삶으로 무르익을 때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사역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사역인 목회자에게 있어 동역은 꿈이기에 추구하지만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무척 이상적이다. 꿈이 꿈만으로 남지 않으려면 실천의 작은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산꼭대기에 오르려면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통장을 모두 공개한다. 옷도 체형이 비슷하면 나눠 입는다. 모든 수입을 일원화하여 규모 있게 살림을 꾸린다. 한 집에 서너 가족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서너 집에 한 가족과 같은 스타일을 따른다. 침실은 독립적이고 가족만의 주방시설이 있지만 정기적으로 돌아가면서 애찬을 나누거나 외래객들을 위해 널찍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좋다. 영적 생활은 공동생활수칙을 철저히 지키도록 한다. 여행도 함께 하고 쉼과 진지한 주제도 성의 있게 다룬다. 더불어 살뿐만 아니라 공동생활에서 발생하는 시너지효과를 주변의 동역자들에게 나눌 수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천한다. 젊게 살아 사라지지 않는 노병이 된다.

 

필수는 아니어도 필수만한 선택적 삶-동역

젊은 목회자들로서는 어렵지만 은퇴를 앞둔 목회자들은 가능한 일이다. 자녀들도 결혼을 했거나 독립을 해서 양육의 짐도 덜은 상태다. 많은 목회자들이 공동생활을 하기란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작은 공동체가 좋다. 서넛 정도가 함께 모여 살면 이상적이다. 그런 단위로 계속 늘여 가면 된다. 연령도 비슷하고 색깔도 너무 다르지 않아 뜻이 맞는 사람끼리 구성하는 것이 편하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옛날의 총기와 넉넉한 마음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도 동무들이 함께 하면 모두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친구가 오래 친함을 이어온 사이라면 동무야말로 친구 중의 친구다.

당신이 지금 처해 있는 환경에서 함께 있는 이가 있는가? 혹은 함께 하고 싶은 이가 있는가? 있다면 당신의 삶은 동역의 구역 내에 머문다. 연령이나 삶의 구체적인 환경으로 인해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이의 존재는 당신의 삶과 사역을 활력 있게 만든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당신 곁에 동역자가 없다면 당신이 누군가의 동역자가 되어줌으로 당신은 동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동역의 삶은 선택이다. 선택되어질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당신이 먼저 선택할 수 있음이 실제 은혜다. 얼굴을 대하거나 한 마디 얘기를 나누진 않았어도 글을 통해 난 당신을 나의 동역자로 선택했고 나를 당신의 동역자로 내놓았다. 당신과 나는 자간과 행간을 넘나들며 또는 시차를 극복하며 모바일신문의 공간에서 “함께” 있다. 그것이 마냥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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