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눅 13:1-9] 회개가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두어 사람이 예수께 빌라도의 만행을 보고했다(1절). 예수께서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도 회개하지 않은 유대 사회의 모습을 개탄했다(4-5절). 빌라도의 만행보다 갈릴리 사람들의 죄가 더 크다. 갈릴리는 이방의 빛이 될 최적화된 장소였는데(사 9:4), 그 이방의 빛이 결국 예루살렘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 포도원 주인이 왜 포도원을 경작했겠는가?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포도를 수확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사 5장, 6절). 이방 갈릴리에 극상품 무화과가 심겨졌는데 갈릴리에서 어떤 열매도 맺히지 않았다. 그래서 삼년을 힘써 더 거름을 주고 관리했지만 열매를 맺지 않았다(7절). 주인이 파버리려고 할 때 포도원지기가 일 년 유예를 부탁했다. 그 후에도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찍어버려도 좋다고 약속했다(8-9절). 갈릴리는 유대 땅이 아니지만 유대인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예수께서 이 지역에서 3년을 활동하셨다. 그런데 이방에 비쳐야 할 빛들이 참빛을 거부하며, 세상과 탐욕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일 년을 유예했고, 오순절에 임할 성령으로 참과 진리를 분리될 것이다. 세상에 관심을 둘 때는 회개할 수 없고, 탐심을 채우지 못한 것에 대한 새로운 계획만 도모할 것이다. 회개는 땅의 것을 포기하고 하늘의 보화를 볼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 땅에 오신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먼저 된 자가 더 죄가 된다(2절). 예수께서 죽으신 뒤에 예수를 믿지 않는 갈릴리는 찍어버릴 것이다. 갈릴리는 끝내 회개하지 않아 폐허가 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 폐허가 된 돌무더기를 성지순례라고 거닐고 있다. 예수의 숨결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갈릴리를 심판하신 주님의 엄위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2. [눅 13:10-17] 안식일에 18해된 귀신들린 여인을 고치심.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칠 때에 18해 동안 고신 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진 여인을 보시고 불러 말씀으로 선언하시고, 안수하자 허리가 펴졌고 그 여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0-13절). 회당장이 분노하여 예수와 모두에게 여섯 날에 할 것과 안식일에 할 것을 주장했다(14절). 회당장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6일 중 한 날에 하고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회당장의 지도에 대해서 외식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거부하셨다. 그들은 안식일에 외양간의 소에게 물을 먹이면서, 사람을 고지는 것을 거부하는 행동은 외식이다. 작은 것을 걸러내고 큰 것은 통과시키는 망(판단)이 외식이다. 큰 죄는 용인하면서 생명은 부정하는 것이 외식이다. 외식으로는 생명을 살릴 수 없다.

예수께서는 18년 동안 사탄에게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푸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셨다(16절). 사탄에게 매인 딸을 푸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본문의 의도가 아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사탄에 매인 아브라함의 딸들을 속량시키는 구속주이심을 계시하고 있다. 그 속량하는 방법은 자기몸을 대속물로 내놓아 이루신다. 구속의 사역은 모든 사람은 비방하고 거부하고 외면했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이루신 은혜이다. 참된 안식은 구속주의 구속의 은혜로 주어진다.

3. [눅 13:18-21] 겨자씨와 누룩.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으로 비유하셨다(18-21절). 누가가 제시하는 겨자씨는 이스라엘에 있는 겨자 농사법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들에 겨자를 재배할 때 한 알을 뿌리는 것이(19절) 아니라 다수의 씨앗을 뿌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가 “한 겨자씨앗”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특이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수 많은 겨자 나무 속에서 한 겨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자 군락은 결국 한 겨자 나무가 모여 구성한다. 보이지 않지만 전체는 한 겨자씨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것이다. 겨자 군락에서는 굵은 겨자와 얇은 겨자가 큰 의미가 없다. 그 한 겨자씨가 모여 이룬 군락에 새들이 깃들인다. 큰 고목인 나무에 있는 새집이 아니라, 한 겨자씨들이 모인 겨자 군락에도 새들이 깃들이다. 누룩 한 덩어리도 보이지 않지만 결과는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과정은 보이지 않지만 결과는 반드시 보인다. 그리스도인 한 명은 보이지 않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모이면 겨자 군락이 될 것이다. 은혜의 백성들이 합당하고 규모 있는 모습을 이 땅에서도 보이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하는 일은 주의 자녀들의 몫이다.

3. [눅 13:22-30]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며, 제자들에게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22-24절). 그 좁은문이 닫힌 뒤에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열린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닫힌 뒤에 아무리 친밀성을 주장해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좁은문 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이 있다(28절). 새관점학파는 아브라함의 가족을 말하지만, 기독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녀인 이스마엘과 이삭의 자녀인데 에서는 유기된 사람이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 사람 헤롯은 명맥이 없지만,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현재 지구에 많이 있다. 그러나 야곱의 12아들은 유기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명이 꼭 빠진다. 단 지파가 빠지고, 12사도에는 가룟 유다가 빠진다. 믿음의 가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이고(28절), 사도들이다. 사도들은 그들이 배척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예수를 향한 적개심이 가득한 것이다. 사도들은 무수한 박해에서 자기의 고난당함이 아닌 예수를 향한 적개심을 보았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모욕받고 박해받으면 너희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 성령을 보내심으로 산헤드린과 바리새인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며 박해했다. 그 박해자 중 한 사람 사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어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동서남북에서 와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29절). 잔치의 주인은 아브라함은 아니다. 아브라함은 잔치에 초대받은 유력한 사람이다. 그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동서남북에서 모여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한다(29절). 그 잔치는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인은 주 예수 그리스이시다. 그런데 그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역사가 있다(30절). 한국 교회는 나중된 지역지만 세계 교회에서 먼저 된 자로서 구원의 복음을 감당하고 전파해야 한다.

4. [눅 13:31-35] 선지자를 죽였던 예루살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바리새인들이 와서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는 계책을 보고했다(31절). 그러나 예수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을 말씀하셨다(33절).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선지자를 죽이는 터전라는 주장은 충격적이다. 그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암탉이 병아리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호하셨다(34절). 그런데 백성들은 많은 하나님의 보호를 원하지 않음으로(34절),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소가 되지 않을 것이다(35절). 가시적인 징표가 70년에 성전이 파괴되었고, 그 성소의 자리에 이슬람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은 모스크를 제거하려고 하지 말고 회개하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더 이상 선지자를 박해하고 죽이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박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배척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헤롯과 대제사장에 의해서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다. 예루살렘, 예수께서 죽으신 성묘교회는 기념하여 순례할 코스가 아니라, 부끄러움과 회개의 코스가 되어야 한다. 성묘 교회는 교회를 우상의 터전으로 만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오리엔탈 정교회들이 분할하여 소유하고 있다.

6. 전능하신 하나님, 주의 은혜를 입을 자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주옵소서. 몸을 구피며 조아려 회개하여 죄사함의 은혜와 겸손을 갖게 하옵소서. 좁은문으로 들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선지자와 사도들과 믿음의 성도들과 만날 수 있도록 복을 주옵소서. 겨자씨 나무와 같이 누룩과 같이 성장하며 변화하여 세상 사람이 알 수 있는 성과를 갖게 하옵소서. 좁은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믿음의 정진을 주옵소서. 주를 박해하는 무리가 박해할 때 두려워하지 않고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죽으신 세상에 혼자있나이다. 주여 위로와 도움과 능력을 주셔서 주님과 함께 세상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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