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사슬(Golden Chain)”은 청교도 연구자들이 작성한 구원에 관한 도식이다. 황금 사슬은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가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퍼킨스는 1590년에 황금사슬‘(Armilla aurea)을 출판했고, 1591년에 증보해서 A Golden Chain으로 출판했다. 그의 제자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는 『신학의 정수』(The Marrow of Theology, 1623년, 우리말 번역, 서원모, CH북스)가 있다.

네덜란드의 헤르만 렌네헤루스(Herman Rennecherus, 1550-1605?)가 1589년에 󰡔구원의 황금사슬󰡕(Aurea Salutis Catena)을 출판했다. 잉글랜드의 퍼킨스와 짝을 이루는데, 공통점은 예정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인 서술이 있다. 청교도들은 예정을 강조하면서 함께 십계명을 준수하는 생활을 연결하는 경향이 있다. 퍼킨스의 『황금사슬』은 59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십계명이 포함되어 있다. 퍼킨스는 십계명을 “선택의 작정을 수행하는 외적 수단”으로 규정했다.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교류했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존 낙스, 앤드류 멜빌은 제네바와 교류했다. 칼빈 이후 유력한 계승자는 베자와 낙스가 있었는데, 베자는 예정론을 매우 엄밀하게(타락전선택설, supralapsarianism) 개진했다. 루터는 예정에 대해서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신칭의가 확정되면 예정으로 논리가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이신칭의도 두 부류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이신칭의를 이룬 하나님의 의지(예정)이고, 둘째는 이신칭의를 이룰 인간의 상태(죄인을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에 대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예정으로 놓고 황금사슬을 만들었고, 후기 청교도주의자들은 사람의 상태, 믿음 탐구, 죄 탐구 등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루터에게서 시작된 이신칭의는 루터의 제언처럼 이신칭의 그 자리(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를 지켜야 한다. 칼빈은 이신칭의를 “힌지(hinge)”라고 했는데, 이탈하지 않고 연결하여 있으라는 제언이다. 예정론을 강조하는 “황금사슬”을 추구할 때에 하이퍼 칼빈주의로 경도될 확률이 매우 높다. 예정을 강조하면서 이신칭의에서 이탈할 수 있다. 루터가 예정에 대해서 소극적인 이유일 것이다. 루터는 노예의지를 강조하면서 십자가에 전적으로 부착되기를 바랐다. 칼빈은 전반부는 동의하지만 강대상(선포된 복음)에 부착되기를 바랐다. 칼빈은 예정이 성도에게 주는 위로는 교리 자체가 아니라,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내용으로 진행되도록 했다.

예정론은 바른 교리이지만, 알미니안이 나올 정도로 비판이 가능한 합리적 성향이 있다. 그러나 칼빈파들은 칼빈의 이중예정(선택과 유기)을 바른 교리 체계로 확립하고, 진영에서 배제했다. 그런 과정에서 과도한 예정을 주장하는 유형을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라고 한다. 개혁파 진영에서 자기를 알미니안, 무율법주의, 하이퍼 칼빈주의라고 평가받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필자는 17-18세기 개혁파들이 알미니안과 무율법주의를 거부하는데 민감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을 거부하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오웬과 에드워즈는 “무율법주의”를 “솔리피디안(Solifidians, 오직믿음주의)”으로 부르며 거부한다.

“황금사슬”은 구원을 구도화시킨 것이다. 구원의 도리를 가시적으로 구도화시킨 것에 우려가 있다. 구원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을 합리적으로 구도화시킨 것은 구원에 대한 메커니즘(mechanism, 설계도)을 밝힌 것이다. 구도화된 메커니즘은 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을 인간의 방법으로 설득할 수 있다. 구원은 신비이기 때문에 인간의 합리로 구도화시킬 수 없다. 만약 구도화시켰다고 해도 그것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합리적으로 제시할 수 없는 체계는 기독교 교육의 난제이다. 천주교 유치원에 다니면 개신교 신자가 되기 어려운데 반해서, 개신교 유치원에 다니면 무엇이든지 가능한 이유일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종말론에서 지상천년후재림(후천년설/재림전천년설)을 견지했다. 후천년설은 이 땅 위에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시켜 천년동안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그 때 유지하는 주체는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후천년주의 종말론은 명맥이 없을 정도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청교도주의가 여전히 팽배한 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메커니즘(합리적 구도화)의 위력일 것이다. 메커니즘은 이해가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취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합리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계시자의 계시에 근거한다. 청교도주의처럼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 공동체 건설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교회가 이루어진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법령이 아니라, 인내와 사랑의 법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참고. 전천년설(재림후천년설)에서 주체는 그리스도이지만, 현존하는 땅은 아니지만 “임시적인 천년 통치”이다. 천년 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는 끝이 없다”고 고백했다.)

중세 시대에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스콜라주의”를 만들었고, 종교개혁 후 개혁파 중에서는 “황금사슬”로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만들었다. 황금사슬에서 바울의 로마서를 모범으로 제언하는 경우도 있는데, 로마서는 황금사슬이 아닌 로마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다시 듣고 믿음을 정진하도록 하는 계시이다(롬 1:16-18). 교리는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깊음과 넓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생활의 부조리와 한계에서 고백하는 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교리이다. 생활의 거룩이나 변혁이 교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고 집중하는 것이다. 교리는 이단자의 훼방에 의해서 발생된 소극적인 산물이다. 신앙고백서들도 유사하다. 교리는 이해된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치 중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결의하고, 다른 것을 이단으로 결의했다.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 거부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다(Christotokos)”는 지금도 이해되지 않은 결의이다. 공회의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다(Theotokos)”를 정통 신앙으로 결의했다. 마리아를 숭배한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예수의 성육신(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토론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아 교리로 이끄는 것은 신성모독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놀라운 업적들을 범인(凡人)이 파악하기는 어렵다. 범인은 천재의 경건의 깊이나 지식의 넓이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거룩에 비견할 수 없다. 신학에 참 신학은 없다.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신학이 참 신학이다. 325년 니케야 결정처럼 예수를 높일 수 없다. 황금사슬, 청교도주의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높이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의도를 찾지 못했다. 논쟁은 피할 수 없지만 허탄한 신화가 보일 때에는 중지하고, 본연의 의무인 예수를 증거하는 것에 착념하면 좋겠다(딤전 4:6-16). 체계적인 진술이 아니라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께서 증거되고 증진되길 합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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