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스(SARS), 메르스(MERS) 등의 바이러스보다 더 강한 확산 현상을 갖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대한민국에 감염 확증자가 증가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을 입국 허가하지 않겠다는 국가들이 증가하고 있는 상태이다. 국가는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49조 제1항의 감염병 예방을 위해 도심 내 집회를 제한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강제 규제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문재인하야 범국민투쟁본부’(범투본)은 광화문 광장 야외 집회를 강행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집회를 주도하는 한기총 회장 전광훈은 집회를 강행하면서 광화문 예배에서 오히려 걸렸던 병도 낫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연합뉴스에서).

신천지는 코로나19 유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들의 대부분은 신천지 소속 사람들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신천지 측은 즉각 집회장소를 폐쇄했다.

신천지와 범투본은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을 놓고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신천지는 매우 민첩하게 적응하며 대처하고, 범투본은 뚝심을 갖고 돌진하는 형태이다. 신천지의 행동은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으며, 교회에 더 심각한 피해와 위협을 주고 있다. 두 집단은 모두 ‘믿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전광훈의 말을 보면 어떤 패턴을 가진 문장이 있다. 그것은 “광화문 예배에 참석하면 걸렸던 병도 낫는다”는 주장이다. 조건에 따른 당위성은 아니라 가능성이겠지만, 문장에는 당위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문장은 한국 교회에 만연한 문장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범사가 형통하다”, “하나님께 순종했더니 문제가 해결되었다”, “선교를 했더니 기업이 더 발전했다” 등의 문장이다. 옛날에는 부흥사 목사들이 자주 사용했지만, 이제는 평신도들이 간증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문장은 사실 관계를 치장하여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위험한 발상이다. 신학적으로는 특별은혜와 일반은혜를 혼합시킨 문장이기 때문에 부당하다. 광화문 예배에 참여해서 병이 낫는 것과 예배의 목적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목적 외에 다른 것을 밝히는 것은 단체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이다. 병원에서 하나님께 예배해서 환자가 나았다고 한다면 의사의 처방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예배에서 환자가 치유될 수 있지만, 그것을 밝히면 자기 목적을 부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기업의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다. 거룩은 거룩 자체에 목적이 있지, 세상 유익에 목적이 있지 않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더니 기업이 망했다”는 주장을 들어 본적이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더니 기업이 발전했다”는 문장은 동의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은 “흥황과 폐망”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두 말을 함께 들었을 때 차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부자로 살도록 하는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세상에 유익을 위한 도구가 된다면 세상에 포함된 하나님이 되어 우상숭배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단순화된 도식을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의무가 있다. 거룩은 세상 영화와 어떤 관련이 없다. 세상에서 풍성하게 살기 위해서 거룩하게 사는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혼인할 때 부(富)하거나 가난에서도 결코 분리의 이유가 없음을 서약한다. 사도 바울은 가난과 부요의 모든 상황에서 일체의 비결을 가졌다(빌 4:12-14). 비록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복음의 능력이 약하면 세상의 유익으로 이끌 수 밖에 없다. 복음은 이 땅의 가치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가치로 거룩을 평가하려는 것은 너무나 부당하다. 복음은 그 자체로 능력과 영광을 갖고 있다. 복음은 복음의 사람에 의해서 평가받는 것이지, 세상의 평가를 초월한다. 세속가치로 복음을 평가하는 것은 맘몬주의(mammonism)로 우상숭배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이다(엡 2:8). 이 선물은 막힌 담을 허는 능력이 있으며, 나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막힌 담이 허물었고, 이웃과 막힌 담이 허물었다. “잘되는 나”는 여전히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시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더 내려놓거나” “거룩하게 살거나” “잘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훈련을 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자기 직업의 전문 지식 증진과 동역자와 협력 관계를 증진하는 것은 추천한다. 삶은 치열한 것이다. 믿음은 그 치열한 삶을 세상 물질을 획득하는 승리를 돕거나 주도하는 도구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파악하여 잡을 수 있는 손이며, 순종하여 진행하는 능력이다(계 1:3). 중세 로마 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을 맹목(盲目)으로 이끌었는데, 20세기 이후에는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맹목으로 이끄는 부류가 있다. 개혁된 교회는 믿음으로 확실한 믿음(explicit faith)을 얻도록 했는데, 어떻게 믿음으로 중세 로마교회보다 더 심각한 맹목적인 현상이 발생하는가? 선한 도구를 악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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