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가운데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답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

박홍섭 목사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고통에 대해 인간은 하박국처럼 "어찌하여" "왜" "언제까지" 이런 관점으로밖에 물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니 거의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평가할 때 우리의 기준은 진리나, 옳고 그름의 관점이 아니라 언제나 나에게 유익인가? 그렇지 않은가로 평가합니다. 과거에 주저하고 미루었던 일이 지금 잘 되어있으면 그때 주저하고 미루었던 것은 신중함이 되고 좋지 않은 결과로 나타나면 우유부단과 미련함으로 해석됩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도 언제나 그렇게 접근하고 해석하는 무지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들입니다.

사도바울이 고전13장에서 사랑과 은사에 대해 말하면서 이땅에서 우리가 알고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지극히 부분적이며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한 것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인생의 유한성을 잘 지적한 말씀입니다. 고린도교회가 풍성한 은사 가운데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깨닫는 것처럼 느껴도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과 비교하면 지극히 부분적이며 희미한 것이며 나중에는 다 없어질 적은 것에 불과한 것들이죠.

이런 우리가 고통에 대해 "어찌하여" "왜" "언제까지"라고 묻지만 하나님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아니 뭐라고 답하신들 이런 수준의 우리가 납득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언제나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이며, "내가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했다"입니다.

20대 초반에 찾아온 지독한 가난은 이런 물음을 수없이 던지게 했습니다. 대학 졸업후 어렵게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20대 후반에 찾아온 질병은 의문을 더하게 했었죠. 목회 현장에서 맛보는 고통은 가난과 질병과 비교할 수 없는 또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이제는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로 주어지는지 조금씩 이해가 됩니다. 왜 욥기와 하박국이 그렇게 기록되어야 하는지도 알아갑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해와 상관없이, 나의 고통과 상관없이 선하시고 미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인 나의 수준과 다르며 온 우주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그분의 지혜는 내가 무지한 말과 이치로 깨달을 수 없는 무궁한 지혜임을 말입니다.

결국은 믿음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의 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리로 이끌어가십니다. 우리의 평생은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에 대해 눈뜨며 마침내 이해가 안되고 납득이 안되어도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자리로 이끌려 가는 은혜의 나날들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은혜입니다. 관념이 아니라 온 몸으로 인생에 대해 묻게 하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에 대해 묻게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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