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의 성경본문 사용 유감, 성경적 본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 연구회 회원)

얼마전까지 흥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영화 「곡성」은 눅 24:38-39절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는 말씀의 자막으로 시작된다. 하여 영화는 당연히 기독교 신앙과 관련한 생각을 바탕으로 전개되는데, 영화의 종반부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 악마가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반복하며 자신의 손바닥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흔적(stigma)을 재현함으로써 완전히 뒤틀린 성경에 대한 상상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라는 정체를 밝히고 있다.

사실 이제 영화가 흥행몰이를 다 끝내고 한국 영화사의 한 획으로 남아버린 상황에서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은 순전히 필자가 영화를 뒤늦게(혹은 저렴하게) 보게 된 결과이지만, 영화에서 사용한 성경 구절에 대해서는 아주 명확하고도 간단한 유감을 표명할 수 있기에 많은 신자들이 상한 기분으로 보았을 영화 속 성경 본문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도모해보고자 하는 취지이다.

먼저 영화는 눅 24:38-39절 가운데서도 특히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라는 문구에 집착하여 그에 대한 상상과 해석을 시각화함으로써 전형적인 문맥 뒤틀기를 이뤄내고 있다. 그러나 잘 아는 바와 같이 눅 24:38-39절 말씀은 37절에 이른 것처럼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Resurrection)을 명확하게 확신시키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 본문의 핵심과 취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와 그러한 부활의 확신으로 말미암는 평강과 복됨에 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을 때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이다.

한마디로 눅 24:38-39절 말씀의 취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확실함과 그 사실로 말미암는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평강에 있는 것이다. 때문에 살과 뼈를 지닌 부활체에 대한 언급은 신자들의 육체적인 삶과 전혀 동떨어지고 신비적인 부활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연계(連繫)되되, 새롭고 온전하게 된 부활체로 말미암는 소망과 그로 말미암는 평강을 기대하도록 하는 본문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곡성」은 성경본문의 취지와는 상관이 없이 지나친 상상력에 집중한 나머지, 살과 뼈를 지닌 악마의 확실함 만을 부각시키는 결과로 결말지어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로 말미암은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소망 따위에는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체, 살과 뼈를 지닌 악마의 확실성만 의심 없이 강조하게 된 것이 영화의 전반적인 맥락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전 15:12-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어떤 자들의 주장을 일소하며 이르기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확신하고 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부활이야말로 신앙의 소망이요 영광이 되는 중요한 확신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신자(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영화에서 실성한 것이거나 선한 영(靈)으로 묘사된 하얀 옷의 처녀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우리들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야 비로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의심과 두려움이 짙게 깔려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앙의 은혜는 확고한 확신이자 복된 소망이요 기쁨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택자)들에 대한 구원의 서정 전체는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되며 풍성하게 되는 전적인 인도하심이다. 때문에 참된 신자들은 이 땅에서 당하는 어떠한 환란과 고난 가운데서도 견고하게 되며 인내하는 가운데서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참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들 자신의 부활과 영광에 대하여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영화는 살과 뼈를 지닌 영적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지만, 우리들은 전혀 그런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서 확신하는 가운데서 그야말로 평강 가운데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평강과 기쁨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그 가운데서도 그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본 도마가 분명하고도 확실한 증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경의 진리와 그 풍성함을 깨닫고 확신하는 신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얼마나 되는 신자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확신하며 소망하는 모습으로 있는가? 그러나 사도 바울은 더욱 확실하게 이르기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고 했으니, 사망의 쏘는 것과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모든 부패와 무능력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평강이요 영광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니 신자에게 두려워 할 것이나 의심할 것이 무엇인가? 성경의 진리와 이생의 두려움 가운데 무엇이 중하며, 무엇이 확실한가?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41-43).”

▲ 영화 <곡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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