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에덴교회 목사, 2020년 예장합동 제105회 총회장  

소강석 목사는 전북 남원군 이백면 초촌리 태생이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에서 자란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군산제일고를 다니던 때였다. 2학년 때 예쁜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군산의 모 교회에 나가게 된 후 3학년 때 수련회 차 용화산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굴에서 밤샘기도하다가 목사가 되겠다는 소명을 품게 되었다.

그로인해 한학에 조예가 깊은 무신론자 아버지와 어머니, 큰 형 등의 지속된 큰 핍박에 가출을 하게 된다. 집을 나온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감화를 따라 난생 처음 광주(光州)로 갔다. 광주중앙교회 정규오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던 예장개혁교단 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에 입학해 고학(苦學)으로 학교를 마쳤다. 재학 중에는 양복이 없어 설교할 기회를 놓치자 “양복 한 번 입게 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주말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광주신학교 시절 소강석 목사
광주신학교 시절 소강석 목사

오직 기도에 올인했던 그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꿈, 꿈틀거리는 광야의 야성을 품고 21세 청년 때에 모두가 다 반대하던 전남 화순군 백암리에 들어가서 헛간을 빌려 교회를 개척했다. 초기에는 미신을 신봉하는 마을 유지들이 교회 가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물리고, 교회에 분뇨를 뿌리는 등 엄청난 방해를 했지만 “꿈 없이 잠든 적 없고, 꿈꾸지 않고 눈뜬 적 없다”는 그는 3년 6개월을 고생한 끝에 마을에 교회를 건축하였다. 그 과정 가운데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믿음의 배경이 없는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고, 그 때에 후일 장모가 된 정금성 권사를 만났고, 결코 목사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는 정 권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광신대학교 졸업 후 대학원 공부를 위해 화순 백암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 온 그는 교단에 인맥이 없어 애초부터 큰 교회 전도사는 꿈도 꾸지 못하고 스스로 개척할 각오를 다졌다. 26세였던 지난 1988년에 서울 가락동의 23평짜리 지하점포를 1,000만원 보증금에 48만원 월세로 얻었다. 첫 예배를 건물주인과 간판집 주인 등 달랑 4명이 인사차 참석한 가운데 드렸다. 그는 나의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믿으며, 더 많은 신자를 보내달라고 호소하며 아예 집에 들어가지 않고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밤을 지새고, 또 낮에는 전도하는 반복된 생활을 했다. 소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비전을 확신하는 가운데 사생결단하듯 목회에 매달리며 고달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버텨나갔다.  4년째가 되었을 때 25평의 지하 예배당에서 120평 상가 예배당으로 옮겨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지난 1994년에는 분당에 400평의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우선 130평 지하점포에서 예배를 시작했으나, 교회 부지 위로 국내 최고의 고압선이 지나가고 있어서 건축을 할 수 없게 되자 토지공사, 한전과 합의를 하여 다른 장소를 분양받았으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와 시공회사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설상가상 소 목사에게 협심증으로 인한 심장마비 증세가 찾아왔고 교통사고까지 당했지만 그는 병원이 아닌 교회 건축현장에서 버텼다. 그 결과 까다로운 준공검사를 끝내고 드디어 1996년 11월 16일에 45억원을 들여 1030평의 예배당을 완공해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교인이 1,000명을 넘어서서 분당 예배당의 한계를 체감하고 다시 분당을 떠나 죽전시대를 준비하게 된다.

죽전 새에덴교회 전경
죽전 새에덴교회 전경

특히 소강석 목사가 죽전시대를 계획하게 된 것은 2001년 평양 창광유치원 방문을 통해 북한의 주체사상 교육에 충격받아, 통일 한국을 위해서는 인성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소 목사는 2002년에 죽전동 산 50번지에 대지 2000평의 새성전 부지를 구입했다. 2003년 기공예배를 드리고 연면적 1만 평, 지하 3층 지상 10층 규모의 교회를 건축한다. 교회 본당이 4500석이지만 대신 다목적홀, 독서실, 인터넷룸, 식당, 피트니스클럽 등을 개설해 평일에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배치했다. 그리고 교회당을 약속의 복합건물이라는 뜻으로 ‘프라미스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이고 건축을 시작해 2005년 10월 22일에 성전 완공과 입당을 거쳐 죽전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프라미스 콤플렉스 시대 개막과 함께 한국교회의 영적 장자 교회를 꿈꾸며, 통일한국시대를 준비하는 민족 성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대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야생마처럼 불타는 소명감 하나로 달려온 소강석 목사의 끊임없는 열정과 헌신은 새에덴교회 모든 성도들의 가슴 가슴 위에 불씨로 옮겨져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새에덴교회는 이제 코로나로 이동이 제한되고 모임이 어려운 시대에 한국교회를 되살리는 "세움"을 기치로 교회와 사회의 밀알이 되고자 한다.

소강석 목사는 2019년 9월 제104회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에서 단독후보로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마침내 2020년 9월 21일 제105회 총회에서는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코로나19로 정부와 교계의 관계, 반기독교적인 사회 분위기는 매우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커넥팅 허브(connecting hub)형 리더십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회는 기독교를 압박하는 대 정부 관계와 반기독교적 사회분위기를 개선하기 위해 통합된 교단연합기구를 만들어 유연하고 전략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앉고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 생태계 복원을 추진해왔던 그의 커넥팅 허브 리더십이 교회 내외부의 열악한 상황 속에서 더욱 빛날 것을 기대한다. 더군다나 크고 작은 모든 교회가 주변을 돌 볼 여유가 없는 교회위기 상황에서 대사회적인 대응과 교회의 단결이 시급한 현실이다. 이제 일방적 추종을 강요하는 follow me형 리더십은 꼰대 리더십이다. 지금은 소통을 강조하는 Connecting hub형 리더십이 딱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소강석 목사를 좌파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정치적 프래임의 산물이다. 그는 이 땅의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소인배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올인하는 대인배이다. 그는 여당도 야당도 아닌 예배당이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파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소망하며, 오직 주님의 종이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예수를 왕으로 섬길 뿐이다.

◆ 소강석 목사 특집다큐 기획 및 제작 지원 내역

 

①2015.12 KBS다큐 “일사각오” 주기철목사

②2016.08 KBS다큐 “다시 코리아로 그들의 마지막 귀환”

③2016.12 KBS다큐 “밀림의 크리스마스”

④2017.03 KBS다큐 “시인과 독립운동” 윤동주 100주년 특집 (2부작)

- 1부: 윤동주는 저항시인이었다 / 2부: 행동하는 시인, 별이 되다

⑤2017.06 SBS다큐 “한국전쟁특집 전쟁과 기억” (2부작)

1부: 장진호 전투, 그 겨울의 기억 / 2부: 사선을 넘어, 67년의 우정

⑥2017.12 SBS다큐 “발굴추적! 예수” (2부작)

- 1부: 메시아 탄생의 비밀 / 2부: 십자가 죽음을 넘어 메시아가 되다.

⑦2018.03 KBS다큐 “이방인과 3.1운동” (2부작) 3.1절특집

- 1부: 1919년, 그날을 증언하다. / 2부: 항일의 길에서 하나가 되다.

⑧2018.12 SBS다큐 “오방 최흥종” 성탄특집

⑨2019.12 KBS다큐 “걸레성자 손정도” 성탄특집

⑩2020.03 SBS다큐 3.1절 다큐 “서북 지역의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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