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족이란 어떠한 형편도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합당한 것이라는 확신이자 감사하는 태도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 연구회 회원)

운동선수들이 큰 국제경기를 앞두고서 가해지는 심리적 압박감은 가히 엄청나다. 특별히 오랜 기간 동안 준비해온 것들이 단 한 순간, 혹은 단 한 가지의 동작이나 실수로 말미암아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 불안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운동선수들에게 자신의 생각과 행동, 감정, 마음 등을 절제하고 조절하는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과 같은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어 있어서, 이를 기반으로 하는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보편화되어 있다.

그런데 특별히 개신교 신앙을 지는 운동선수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빌 4: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다. 아마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있어서 이 구절만큼 효과적인 것도 드물 것인데, 그러나 그와 같은 태도는 로마가톨릭 교도들이 성호를 긋거나 주문을 외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고, 심지어 신앙이나 종교심과는 무관한 심리요법의 ‘자기암시(Autosuggestion)’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실 초보적인 성경중심의 신앙을 지닌 많은 신자들에게서 유명한 몇몇 구절들만을 따로 떼어 암송하거나 심지어 한 해 혹은 하루의 말씀으로 삼는 경우를 흔히 볼 수가 있는데, 그와 같은 태도는 Q·T(Quiet Time)에 있어서 성경을 자의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심지어 기도하는 가운데 떠오른 성경구절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계시(revelation)’라고 생각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가 있는데, 그런 태도들의 공통점 또한 자기암시나 마인드 컨트롤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빌 4: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을 때에, 그 뉘앙스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어떤 일이든 주 안에서 해낼 수가 있노라’는 자신감을 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앞선 11절의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말씀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2절에서 사도는 이르기를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존 칼빈은 빌 4:13절에 대한 주석에서 한 가지 중요한 언급을 하는데, 그것은 “……바울이 모든 것이라고 한 것은 자기의 소명에 속한 것들의 범주에 속한 것들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사도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으로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처하더라도 결코 흔들림이나 넘어짐이 없이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각각의 일에……그리고 모든 일에(έν΢παντὶ……καὶ὆ἐν΢πασιν)’대해 ‘자족(αὐτάρκης)’하는 비결에 한정하여 그처럼 강한 능력을 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처럼 강한 확신 가운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빌립보에 있는 교우들이 그가 궁핍함으로 말미암아서 넘어진 것처럼 생각하지 말도록 함이다. 비록 빌립보에 있는 교우들이 바울 자신의 고난에(θλίψει) 동참하였으며, 친절을 베풀었어도 그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으므로 자족하는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6절에서 말한 것처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어도 바울은 그들에게 “선물을 구함이 아니(17절)”었다.

그러면 바울 자신에게 있는 능력과 확신 있는 자신감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에게 “능력 주시는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울러 나폴레옹과 같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여서 그 사역을 끝까지 감당할 만한 일체의 비결(혹은 능력)을 확신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빌 4:13절에서 말하는 확신과 자신감은, 단순히 불가능은 없다는 식의 말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도 굴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의뢰함으로 그에게 맡겨진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리라는 소명의 확신인 것이다.

필자는 최근에 그와 같은 확신을 지닌 그리스도의 종(진리의 종)을 대면한 적이 있다. 아주 작고 초라한 예배당에서 몇 안 되는 교우들 섬기고 있는 한 소신 있는 목회자에게서 빌 4:13절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본 것이다. 그 분의 말씀에 따르면 자신도 한 때에는 좀 더 큰 교회의 청빙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기다리는 가운데서 이제는 오히려 자신이 전하고 확신하는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교회는 자신이 개척하여 섬기고 있는 그 작은 예배당 외에는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비록 결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의 사역이지만, 개혁주의의 신학을 만끽하고 있는 지금 그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다는 강한 확신을 얻었기에, 그는 끝까지 그 곳에서의 사역을 감당하리라고 말했다. 더 좋은 것은 진리이지, 결코 더 나은 사역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자족이란 적당하게 주어진 형편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족이란 어떤 형편도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합당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자 감사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잠 30:8)”는 말씀은 적당한 중산층의 삶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서 마땅히 행할 바 온전한 것을 행하기를 바라는, 빌 4:13절과 같은 자족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로 살아간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행복이나 감사하는 마음은 늘 한 발짝씩 멀리 있음을 보곤 한다. 마치 다가서면 더 멀어지는 신기루(mirage)와 같이 행복과 감사는 늘 조금만 나아가면 닿을 것 같은 위치에 있을 뿐, 정작 행복하지 않으며 감사치도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확신하여 이르기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으니, 그것은 우리들이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자기암시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당장에 자족하며 고백할 수 있는 감사와 기쁨의 말씀이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뢰하는 견고한 신앙의 말씀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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