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 상식이냐? 믿음이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단어가 있다. 상식과 믿음이다. 상식을 따라 신앙생활 할 것인가? 믿음을 따라 신앙생활 할 것인가? 단어의 차이가 처음에는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상식은 계산이 되지만 믿음은 계산 할 수 없다. 상식은 보이지만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믿음의 길은 영의 길이다. 상식의 길은 세상의 논리이며 넓은 길이다. 상식의 길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이해 가능한 길이다. 그러나 믿음의 길은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결단과 선택이 항상 놓여 있다. 믿음의 길은 항상 선택의 폭이 아주 좁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상식의 길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영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주 힘들게 느껴진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영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 늘 순종과 헌신이 준비되어 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주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지,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써주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 앞에 즉각적인 순종으로 응답한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항상 순종으로 결단한다.
"영적인 일, 지능이냐? 순종이냐?"
오스왈드챔버스는 말하기를,
“영적인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황금률은 지능이 아니라 순종이다. 상식의 세계에서는 지능에 의해 이해가 가능하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한 분별은 절대로 지능에 의해 얻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학적 지식을 원한다면 지적 호기심이 그 사람의 인도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깨닫기를 원한다면 오직 순종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 영적으로 우리가 어둡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적 어둠은 무지로 인한 것이지만, 영적 어둠은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영적인 길은 항상 순종의 길을 통해서 열린다. 영적 어둠은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이 말이 주는 의미를 누구나 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회피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거룩한 포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싫기 때문이다. 적당주의, 편리함이 너무 몸에 배었기에 온전한 순종이 힘든 것이다.
상식의 길을 선택할것인가? 아니면 믿음의 길을 선택할 것이가? 고난의 세월을 극복하는 길은 오직 믿음의 길을 따라갈 때, 영적인 세계가 열린다.
나의 아버지 최우용원장 기도처소
나의 아버지 최우용원장(변화산기도원)은 산간 벽지에 기도원을 설립하신 후 일생동안 그 곳에서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계절에 관계하지 않고, 매일 밤,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며 살다가 주님 나라 가셨다.
최근에 아내가 기도원 산 정상에 있는 아버지의 기도처소에 올라가보니, 40년 전에 지었던 조그마한 기도 처소를 사진에 담았다. 아버지가 사용했던 아주 오래된 찬송가와 성경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일생동안 기도의 자리를 지켰다. 이것을 사명으로 알고 사셨다. 상식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어떤 세상적인 상도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분은 이 땅을 떠났다. 어떤 사회적인 영광도 받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모든 낡은 것이 다 사라진 어느날, 그 기도와 믿음의 흔적이 생명처럼 살아났다. 하찮아 보였던 것이 지금은 소중함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다. 믿음의 길은 항상 우리에게 삶의 여운을 깊게 남긴다.
믿음의 길은 시간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고택의 진한 향취와 같은 흔적을 남긴다. 고택은 그 자체로 세월의 무게를 이겼기에, 그 우아함과 묵직함과 깊은 영감을 던져준다. 초고층 현대건물이 줄 수없는 진한 맛이 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흐르는 정서와 맛닿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같이 믿음의 길은 세대가 거듭될 수 록 더 깊은 영적 감동의 스토리를 제공한다. 영원히 살아움직인다. 시간이 깊어질수록 그 영적 진한 감동이 아침 이슬처럼 더욱 영롱하게 빛나게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의 길인가?
아버지의 삶의 흔적이 있던 곳이 세월의 풍파앞에서 초라하고 낡아버리고 잊혀져 버렸고, 사람들의 기억의 저장고에서 아주 사라져버렸다.
그 어느날, 그 낡은 기도의 처소에서 평생 쓰셨던 성경책과 찬송가를 보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다.
그리고 다시 그분의 투박했던 인생이, 초라했던 인생이, 들꽃처럼 환경에 순응하면서도, 그 자리가 역사의 중심인것처럼 믿음으로 외쳤고 섬겼던 삶의 자리 자리들이,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믿음의 길만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다시 던져주고 있다. 믿음의 길은 고난의 길이며 내려놓음의 길이며, 섬김의 길이며, 헌신과 순종의 길이다.
신앙의 길을 가면서 너무 가벼운 십자가만 지려고 하지마라, 너무도 편리함과 익숙함에 자신의 삶을 던지지마라, 돈에 자신을 팔지말라. 상식의 길만 따르면, 그 인생은 후손들에게 내놓을 것이 없는 빈 항아리로 전락한다. 신앙의 천박함은 쉬운 길만 선택했기 때문이다. 신앙은 삶이다. 삶의 이야기들이 있어야 행복이란 기쁨을 서로 공유하게 된다. 천박함의 결과는 어떤 신앙의 감동이나 스토리가 없다.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하라.
아브라함은 갈바를 알지 못하지만 말씀을 따라 갔다. 아브라함은 그에게 주어진 것이 없지만 오직 믿음으로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런 영적 도전이 필요한 시대이다. 고난의 시절에 믿음의 길을 굳세게 내딛는다면 반드시 영적 돌파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