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게,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 입력 2020.12.01 08:45
  • 수정 2020.12.02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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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87) 거룩(Holiness)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인간의 직관적 사고는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크다.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는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모이면 잘못된 판단과 정책 실수를 할 가능성이 커진다. 불의한 자는 불의한 꾀를 쫓는다. 불의한 길에 선다. 불의한 자와 자리를 함께 한다. 불의한 삶이 지속되는 이유다. 불의한 자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들린다.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말만 받아들인다. 무한 정보 시대다. 대중은 쏟아지는 정보를 ‘선택 삭제’한다. 편집하고 취향에 맞는 정보의 재구성한다. 새로운 ‘사실’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틀에 대상을 두고 열성적인 숭배를 보낸다. 불의한 자는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인다. 율리우스 가이사르는 저서 ‘내전기’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다’고 했다. 신념에 배치되는 정보는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불의한 자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자기 확신을 더욱 강화하는 ‘확증 편향’이다. 온라인 소통이 일상화하면서 더욱 심화하고 있다.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는 불의한 정보와 가짜 뉴스만 받아들인다. 불의한 일과 더러운 일이 지속된다. 불의를 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는 악한 행위들과 부합된다. 악한 행위를 요약하는 말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불의를 행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무시하는 그들의 불의가 강조되는 말이다.

1. 거룩한 자의 삶의 패턴

듣기는 듣는다. 깨닫지 못한다. 보기는 본다. 알지 못한다. 왜 마음이 둔하고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되었는가. 오늘날의 유튜브가 잘 말해 주고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소통과 이해보다 불통과 단절을 심화시키고 있다. 인터넷 정보제공 사업자가 이용자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용자는 제 입맛에 맞게 ‘걸러진 정보’만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렇게 확증편향에 빠져 있는 자를 ‘반역하는 족속’이라고 한다. 에스겔 3:27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는 반립적 형태의 권면이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하였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앎(知)이다”라고 하였다. 자신을 객관화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불의를 행하라’ ‘더럽게 하라’ ‘의를 행하라’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은 수사학적이다. 직접적이다. 아이러니한 권고다. 의도하는 바가 있다. 현재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 있다. 의롭게 사는 자 또는 거룩하게 사는 자가 계속 그렇게 살아라는 권면이다. 반면 불의하고 더러운 삶을 사는 자는 회개하라는 압박이다. 물론 시간이 많지 않다. 경계선은 정해져 있다. 변화되기에는 너무 늦다. 송(宋)대 유학자 주희(朱憙)의 ‘주자십훈(朱子十訓)’은 인생에서 저지르기 쉬운 열 가지 후회를 뽑은 것이다. 그 중 한 가지다. ‘춘불경종추후회(春不耕種秋後悔)’.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이 되어도 거둘 곡식이 없다. 적합한 때를 놓치지 말라는 공자의 삼계도(三計圖)와 통한다.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시간이 따로 있다. 그게 바로 ‘물때’다. 조금과 사리, 밀물과 썰물에 따라 물고기의 먹이 활동은 다르다. 종말의 때가 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이 오면 상황 종료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의 뒷 늦은 수고는 헛되게 된다. 아무리 많은 기름을 사더라도 때는 늦다. 슬피 울며 이를 간다. 핵심은 무엇인가. 종말이 가까웠다.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합당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변화가 불가능한 때가 온다. 불의한 자든 의로운 자든 임박한 종말의 때를 맞게 된다. 너무 신속하게 임하기 때문에 변화 받을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요한 당시의 독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심리학자 최인철 서울대 교수의 책 ‘프레임’은 “우리가 마음의 창을 통해서 보게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프레임을 통해 채색되고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룩하는 자는 하나님이 나를 구별하셨다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반응한다. 다니엘의 예언이 요한계시록에서는 명령 모드로 전환된다. 예언이 요한 당대에 성취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 거룩한 자는 이 계시를 깨달아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예언에 대한 성취의 시작을 분별한다. 통찰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응답한다.

2.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행하라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는 명령이다. ‘너는 거룩한 자다’라는 프레임이 형성된다. 인간은 어떤가. 항상 객관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미리 정해진 ‘틀’을 기반으로 세상을 받아들인다. 정보를 받아들이기 전 이미 특정 편견과 해석을 갖고 있다. 그만큼 더 빠른 반응을 할 수 있다. 프레임을 통해 잃는 것이 바로 객관성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신자들은 제사장으로 간주되고 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길 자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역사상 이스라엘에 존재하였던 제도들은 무효화된다. 제사장, 거룩한 자, 성전 그리고 거룩한 성 따위의 개념을 생동하는 영적 방식으로 사용한다. 고난 받고 박해 받는 교회가 거룩을 유지해야 할 근거다. 성도들의 거룩함의 기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격에 있다. 성경에서 ‘거룩’에 해당하는 ἅγιος(하기오스)는 양면을 가진다. 구별과 헌신을 의미한다. 거룩한 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되고 그리고 헌신하는 사람이다. 윤리적 속성을 암시하지 않는다. 거룩한 자는 계속 거룩할 것이다. 수양과 고행을 통한 성화가 아니다. 하나님에 의해 성화된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다. 특별관 관계로 이끄신다. 죄악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해 주신다. 그들은 성화되거나 혹은 거룩하게 산다.

구별된 자, 즉 거룩한 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다. 모세가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본다. 그 곳이 거룩한 땅이다. 하나님이 계신 장소, 즉 하나님이 거룩하게 사용하신 땅이다. 다니엘은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는 많은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말한다. 천사는 ‘의로운 자’ 또는 ‘거룩한 자’라고 한다. 자칭 지혜자, 의인, 성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욥을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하신다(욥 1:8). 하나님이 쓰시는 종이기에 거룩한 자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땅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하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에게 거룩함은 거룩한 자와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시고 홍해에서 세례를 받게 한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하신다.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일차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거룩한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한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살아간다.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거룩한 자답게 살아야 한다. 거룩한 자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고 목적이다. 거룩한 자는 단순히 프레임이 바뀐 사람이 아니다. 신분과 존재 전체가 바뀐 사람이다. 다니엘이 그랬다. 장소와 시대의 틀을 거부한다. 거룩한 자로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뜻을 세운다(단 1:8).

프레임은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계획, 행동 방식, 우리가 행동한 결과의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세상을 향한 마인드 셋(mind set), 세상에 대한 은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프레임의 범주에 들어간다. 거룩한 자는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대로 거룩하게 산다. 하나님의 거룩은 전능, 영원성 및 영광을 포함한다.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하나님은 거룩한 아버지시다(요 17:11). 거룩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을 요구한다(벧전 1:15-16). 거룩한 자로서 거룩한 삶을 요구한다. 의로운 자가 되고 거룩한 자가 된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어린 양의 피로 흰 옷을 입게 된다. 그의 속량으로 거룩한 자가 되었다. 의롭게 살므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게 살면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의인이기게 믿음으로 산다(롬 1:17). 거룩한 자이기에 구별되게 사는 것이다.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다. 거룩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탈퇴(withraweal)와 헌신(consecreation)이다. 일반적인 것이나 부정한 것으로부터 탈퇴다. 신성하고 거룩하고 순수한 것에 대한 헌신을 뜻한다.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 살지 않는다. 거룩한 자로서 거룩한 삶을 지속하고자 힘쓴다.

‘불의을 행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라’ ‘거룩한 자는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누가 불의한 자며 거룩한 자인지 아실 뿐 만 아니라 누가 어린 양에게 속할지, 짐승에게 속할지를 결정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락하거나 거절함으로 반응한다. 천사는 불의한 자와 더러운 자들에게 명령한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비춰 말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삶의 패턴을 깊이 생각해 보라고 경고하고 있다. ‘들을지어다’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라는 요구는 재림의 임박성을 내포하고 있다. 끝까지 인내하라는 뜻이다. 그대로 거룩하게 사는 자가 이기는 자다. 하나님의 나라가 거의 가까이 왔는데 끝까지 참으라는 권고다. 핍박이 있고 고난이 거친 파도처럼 몰려올 때 거룩을 멈추고 불의하게 아무렇게나 살고 싶을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욥처럼 삼중고를 한꺼번에 당하면 아내의 말대로 하늘을 저주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소지가 있다.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선택이 아닌 명령이다. ‘거룩하라’는 반복된 명령이다. 에필로그의 요지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망하는 감탄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성품은 일생동안 반복된 행동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종말의 도래는 어떤 변화의 가능성도 미리 막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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