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

  • 입력 2020.12.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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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90) 파루시아(Parousia)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파루시아는 아주 흔히 사용되는 말로서 도착이나 도착해 있는 것을 가리키는 일상적인 단어이다. 전문적이거나 특수한 의미가 아니다. 중립적인 의미다. 헬라주의에서는 신들의 나타남과 오심 등과 마찬가지로 정부 고관들, 왕, 장군들의 방문에도 자주 사용되어 왔다. 신약성경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 파피루스 자료나 고대 헬라 문헌에 보면 이 단어는 황제나 왕, 총독과 같이 최고 지위에 있는 고관이나 유명인사가 어떤 마을에 도착하는 것을 나타낼 때 쓰이고 있다. 이 단어가 그리스도에게 쓰일 때는 틀림없이 헬라 시대에 그 말이 왕이나 어떤 귀인의 도착을 가리키는 것과 같이 다소 기교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말로써 쓰인다.

‘내가 오리라’는 약속이다. 높아지신 예수님의 엄숙한 약속이다. 그리스도가 종말을 개시하기 위해 곧 돌아오겠다고 하신 약속이다. 끝맺음 단락의 반복되는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요한계시록의 전체의 중요한 주제다.

1. 파루시아

예수님의 재림은 구속만큼이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이다. 재림은 시작할 사건들 곧 종말에 대한 진술들은 핵심적인 약속 자체로 끝맺는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속히 오실 것을 약속하신다. 재림은 요한계시록의 클라이맥스로 적절하다. 예수님의 오심은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와 하늘이 열리고 백마와 그것을 탄 자의 보다 자세한 묘사를 생각나게 한다. 파루시아는 단순히 한 인물의 육체적 도래나 ‘미래에 발생할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현재의 역사 과정과 단절된 새로운 질서를 도래케 함으로써 그 자체가 역사를 초월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고백한다(니케아 신경).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겸손과 은혜 가운데 오셨지만 영광과 능력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다른 언급들과 나란히 ‘내가 속히 오리라’라는 말은 5번 나온다. 오심의 절정을 가리킨다. 화자는 항상 높아지신 예수님이다. 재림에 대한 일련의 약속 가운데 최종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약속은 초기 교회 전승에 필수적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속히 오리라’고 했던 약속을 반복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재천명하신 것은 그의 증언의 정당성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 초림 때 약속하신 그의 재림이 곧 발생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계시하신 것을 완성한다고 보증한다. 완성된 환상의 진리를 확신시킨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할 일은 ‘속히 될 일’이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서론과 결론에 이 표현을 사용한다. 일어날 모든 일들이 이 책의 모든 환상들을 포함하고 있다. ‘속히’는 ‘지체 없이’의 뉘앙스다. 시간적 가까움과 구별하기 어렵다. ‘속히’와 ‘지체 없이’는 다르다. 전자는 연대기적으로 ‘곧’을 의미한다. 후자는 ‘내적인 역동성’을 뜻한다.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시간적 가까움을 염두하고 있다. 가까움이 초점인가. 두 가지 반응을 생각하게 된다. 조급함과 깨어 있음이다. 전자는 시험이 가깝고 개학이 가까울 때 발생한다. 특히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해당된다. 마태복음 24:42-44은 모든 세대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천 년이 하루 같다.’ ‘주의 약속은 더딘 것이다.’ 도둑같이 오실 지라도 깨어 있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환영할 일이다. ‘속히’라고 했을 때 ‘가까움’을 떠올리면 조급해 진다. 요한은 ‘파루시아’가 곧 일어나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사상은 상당히 복잡하다. 신약성경에는 파루시아가 임박했다는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말세의 징조는(예. 막 13장) 종말의 시간표를 계산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 파루시아가 임할 때까지 역사에서 분쟁들이 내내 발생하리라는 점을 경고하려는 것이다.

‘속히 오리라’라는 말씀은 두 번 이상 반복되었다. 중요한 이슈다. 기대감을 강화시킨다. 최후 희망이다. 완전한 성취다. 예수님이 도둑같이 오신다. 깨어 있는 자가 복이 있다. 언제 오실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속히 오신다. 긴박함이나 조급함보다 경성을 촉구한다. 깨어 있어야 필요성을 강조한다. 도둑에 관한 말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깨어 있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임박한 파루시아를 암시하는 단락들 곁에는 종말의 때가 알려지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는 단락들이 있다.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가까움 또는 임박성을 이해하는 것은 신약성경이나 코이네 헬라어의 전형적 용례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어근의 오류’를 범한 것이다. 다니엘은 종말론적 사건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강조한다(단 2:29). 필연성을 강조한다. 임박성은 없다. 예수님의 종말론 강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비인칭 동사 ‘dei'’(데이)는 ‘반드시...하다’이다. 필연성을 나타낸다. 임박성은 없다. 임박함을 암시하는 단락들은 현재와 미래 사이에 연대기적 관계보다 신학적 관계를 가리킨다. 그 단락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일으 완성하실 일에 관해 ‘때’가 아닌 ‘확실성’를 가리킨다.

2.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 속에서 다시 오실 것이다

‘속히’라는 단어는 독자들에게 희망 중에 끝까지 인내하라, 최후 승자가 되기까지 견뎌내라는 사인이다. 환상의 시간과 일상적인 시간 사이의 차이가 있다. 연기대적 언어로 ‘속히’를 생각하면 준비하는 쪽에서 급하고 조급성이 생기고 마르다처럼 분주해지나 아예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오실 것을 확신하면 일상에서 부지런히 준비한다. 등불에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깨어 있다. 잠시 졸다가 일어나 눈을 비비며 신랑을 맞는다. 당황하지 않는다. 기뻐한다. 늦게 오든 속히 오시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상이 못하게 신속하게 거행된다. 어느 때든 오실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속히’는 급하게, ‘빨리빨리’를 떠올리게 된다. 일상적인 시간 계산이다. 환상의 시간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이다. 지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늦다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시간에는 결코 더딘 것이 아니다(벧후 3:8). 어느 나라건 그 나라의 사회적 성격이나 문화적 특징을 규정하는 용어가 있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중국의 ‘만만디’, 프랑스의 ‘톨레랑스’, 유대인의 ‘후츠파’가 상징적이다. 파루시아는 빠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다. 파루시아의 ‘속히’는 속도가 아니다. 섭리다. 그리스도인은 산전, 수전, 공중전 위의 속도전의 전사들이 아니다. 세상은 빠름을 위해 신중함과 깊이는 포기한다. 미래의 시간까지 미리 당겨 갈아 넣으면서 유지되어 왔다.

긴급함과 지연 사이의 긴장이 증가되었으나 환상들에 의해 해소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긴장에서 독자들은 증인으로서 소명감을 가지고 살도록 요청받는다. ‘속히’에 해당하는 ‘ταχύ’(타퀴)는 언제 오느냐, 그 때가 언제냐에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미래 강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가 안달이 나서 속히 임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실 이가 신이 나서 속히 오겠다, 즉 정한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오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현대 조직신학은 ‘재림’을 다루는 종말론을 맨 마지막의 교리로 삼는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 교리의 부록처럼 여기고 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속히 오실 예수님에 대한 언급이 서너 차례 나온다. 그러나 2000년 전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의 재림에 대한 교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요한계시록 22:6-21에는 분명한 사상의 흐름은 없다. 요한계시록의 앞의 내용에 근거하여 일련의 반복된 권면이 있을 뿐이다. 각각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재림를 대망하는 감탄으로 마무리된다. 에필로그에서 예수님은 ‘속히 오실 것’을 반복해서 강조된다. 중요하게 강조되고 있다. 수많은 반응들을 일으켜왔다.

세상 주문은 당장 눈앞에 이루어져야 한다. 신속성과 조급성이 따른다. ‘아브라카다브라’가 대표적이다. 고대 히브리어로 ‘내가 말한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는 뜻이다. ‘자기 충족적 예언’이다. 판타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의 주문이다.

히브리어 ‘אברא’(abra), 즉 ‘이루어지리라’와 ‘כדברא’(cadabra) ‘내가 말한 대로에서 나온 것이다. 중세에는 열병을 다스리기 위해, 그 뒤에 마술사들이 사용했다. 마법사들의 주문이라고도 알려진다. 주술 파피루스의 주목할 만한 특징이 여기에 있다. 초자연적 존재들에게 행동하라 또는 오라고 요청할 때 주문을 외울 때 흔히 성미 급하게 ‘지금, 지금, 속히, 속히’에 해당하는 ‘ἐδε ἐδε ταχύ ταχύ’(에데 에데, 타퀴 타퀴)와 같은 말을 외우는 것으로 주문을 끝맺었다. 예수님은 분명 속히 오실 것이다. 급하게 오신다는 아니다. 조급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주술사처럼 지금 여기에 당장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가 되야 일어난다. 하나님만 그 때를 아신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오신다는 말이다. ‘처리하다, 질서를 세우다’의 의미론적인 어근이다. 타퀴는 ‘속히’가 아니다. 역사의 정해진 질서에서 다음에 있을 것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에게 속히 오시라고 조급하게 기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높아지신 예수님이 주술에서 전형적을 사용하고 있는 ‘속히’를 뜻하는 타퀴를 사용해서 자기가 속히 올 것을 알리시고, 즉 하나님의 정한 시기에 올 것을 알리는 것이다. 요한은 지금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이루어질 것에 대해 ‘아멘’으로 화답한다. 수동적 역할에 머문다. 지팡이를 든 주술자는 도전적이고 공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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