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과 오늘의 기시감(旣視感)
사무엘상 3:1-14절에는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을 향하신 구원 의지와 자신의 종을 폐하시고 세우시는 섭리에 관한 기사이다. 이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깊은 묵상과 함께 앞으로 한참 전개될 것이다. 본문 말씀의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음미하면 할수록 마치 기시감(旣視感, Déjà vu)에 젖어든 느낌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시대적/영적 정황이 오늘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이다. 메신저의 메신저다움을 견지하면서 난제와 현안들로 뒤범벅된 혼돈의 시대 상황을 직시하며 변화무쌍한 세상 한 가운데서 불변의 진리를 힘차게 외치려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의지를 통해 각 시대마다 자신의 뜻하시는 바를 이루셨기에 이 특별한 본문을 반추함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흡사 나뭇가지처럼 천 갈래 만 갈래로 뻗쳐나간 인간들의 고집스런 의지가 돋보이긴 했지만 역사는 언제나 인간의 궁극적 구원이라는 대명제 곧 하나님의 뜻에로 집중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성경만이 아니라 불가사의한 세상 역사의 중요 사건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성인과 영웅의 출입, 민족의 흥망, 제국의 일어섬과 무너져 내림에는 거역할 수 없는 초월적 개입이 반드시 있다. 인간과 하나님 간에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관계 이상의 불가분리적 관계가 존재한다. 질적인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마주 대하게 하는 인력(引力) 같은 것이 있다.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한 축을 이루며 인간의 시대는 곧 주님의 시대에 한 획을 긋는다. 하나님이 인간의 한 시대를 주관치 못한다면 시초부터 종말까지 세상의 모든 시대도 주관할 수 없을 것이다. 세움 받거나 폐함을 입고 존재하거나 사멸에 이르는 것은 모두 그분의 의지와 주권이다. 선택은 우리 편이 아니라 오직 시대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안에 의미가 있는 인생
우리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애의 매우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숨결이 머무르지 않은 곳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이 세상에서의 다채로운 삶을 경험하게 하신다. 삶은 신비이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 의해 마무리되는 거룩한 신비이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살 때에만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한 인간의 출생과 죽음에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가 있기에 인간의 출생이 거룩하고 인간의 죽음이 장엄한 것이다. 살아가는 매 순간, 삶의 어렵고 힘든 순간에서부터 행복과 환희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들 삶에 배어있기에 인간의 삶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영혼이 거둬지면 남는 것은 흙으로 돌아갈 육체뿐이다. 죽음이 이르기 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운으로 그 영혼이 지탱되지 못한다면 육신은 살아있어도 그 영혼은 이미 죽은 것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란 말이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영혼의 삶과 죽음이 존재의 사멸을 결정짓는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 영혼은 죽은 상태와 진배없다.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 그의 삶과 죽음에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 존재와 삶의 구심점으로 삼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불신은 하나님을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이다.
시대를 아는 것은 시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는 것
당신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주님의 손바닥 끝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점이나 미세한 먼지에 불과할 뿐인 시대이건만 사람들은 영겁의 세월을 사는 양 다투고 꾸미고 노닐기에 여념이 없다. 당신이 숨 쉬고 살아가는 이 시대에 대해 투명한 인식이 없다면 당신 삶의 의미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과업이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시대정신(Zeitgeist)에서 떨어진 위대한 과업은 시대의 주관자이신 주님에게는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당신이 살고 있는 시대정신을 꿰뚫고 밀물처럼 덮쳐오는 시대적 조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그럴듯한 인간적 과업도 하나님 앞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없다. 시대를 아는 것은 진정으로 당신 자신을 앎이요 당신이 사는 세상을 속 깊이 이해함이다. 나아가 시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아는 길이다. 이 시대의 어떠함을 알아야 이 시대를 향하신 주님의 진심, 그 한 자락 끝이라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짧고도 기다란 시간의 영역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며 도대체 어떤 형체로 드러나고 있는 것인가? 시대(時代)란 일정한 넓이를 지닌 시간을 칭함이다. 40년 정도면 세대(generation), 100년 정도면 세기(century), 보다 긴 시대(age)와 보다 짧은 시대(period) 그리고 그 중간 정도의 시대(epoch), 또한 포괄적인 시대(times)에서 특정적인 시대(era)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는 자신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의 정황은 어떠한가? 전후좌우에서 비치는 이 시대의 참 모습은 어떠한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과 희망의 조짐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 말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을 통해 그 시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오늘의 시대상을 조명하신다. 그것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되고 낙조와 여명이 엇갈리는 시간으로서 혼돈의 파편들로부터 조각이 맞추어진 질서의 퍼즐 게임과도 같다.
종말의 순간은 무르익어가지만 실종된 종말의식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세상이 말세다” “세상이 끝났다” “인류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말을 해왔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말들이다. 모두가 세상에 대한 절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절망은 곧 인간에 대한 절망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안과 밖에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흔적들, 역사로 정리되는 그 숱한 일들,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인간에 대한 절망이 세상에 대한 절망을 부른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세상이 보여주고 있는 절망적인 모습들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추락시키는 비인간화와 인간을 인간 이상으로 포장시키는 초인 사상은 세상을 인간이 더 이상 인간답게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린다.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비뚤어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왜곡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비정상적인 섹스와 광란의 속도감 그리고 과도한 스포츠의 세계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끈다. 매머드를 숭상하고 만사를 거대주의, 물량주의 관점에서 측정하려는 시류는 크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외길이다.
시대적 암울함을 더욱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종말 의식의 실종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종말의 결정적 순간은 무르익어 가는데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현실에 대한 집착과 희미한 미래를 향한 속절없는 기다림이다. 이 절망의 상황이 종말을 앞당긴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의 마지막 책에 이르기까지 종말은 무수히 언급되었다. 성경의 모든 포커스는 주님의 오심으로 성취되는 종말의 한 점에 맞춰져 있다. 공관복음서에서 주님이 남겨주신 교훈들의 하이라이트는 종말에 관한 가르침이다. 바울도 서신서 곳곳에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었다. 종말은 시대의 끝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의지도 이 마지막 한 점을 향해 있다.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마지막 끝 날을 염두에 두고 계셨다. 세상의 모든 역사가 당신에게는 장구한 시간의 흐름으로 감지되지만 하나님께는 일순간에 불과한 시간 곧 영원의 한 자락에 불과하다. 한 개인의 시작과 끝이 있듯 한 나라의 시작과 끝도 있다. 세상이 한 점에서 시작되었다면 세상이 끝나는 한 점도 있게 마련이다. 인류 역사 역시 마감의 순간이 있다.
하나님을 집단으로 거부하는 시대와 종말적 징조들
지나간 역사를 관찰해보면 종말의 중요한 매 과정마다 시대의 특징적인 얼굴이 그려졌다. 성경의 모든 예언들은 각 시대를 따라 거의 이루어졌고 종말에 관한 예언들만 이루어가는 도중에 있다. 종말적 징조들의 현상은 이미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시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시대는 하나님을 집단적으로 거부한다. “하나님이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비아냥거린다. 유아기를 벗어나 성인이 된 현대 후기의 사람들에게 젖먹이를 달래던 유모에 불과한 하나님의 존재가 과연 필요한 것이냐? 며 딴죽을 건다. 하나님의 존재가 없으면 인간 존재 또한 무의미하기에 이 시대는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 인간의 모습이 사라졌다. 당신은 때때로 인간에게서 인간이 아닌 짐승의 모습을 보고 악마의 얼굴까지 바라본다. 이것을 수성(獸性)이라, 마성(魔性)이라 한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녔다” 해서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이 시대는 바른 것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이상한 것들이 환영받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룩하도록 만든 하나님의 가정 질서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동성 간의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시대이다. 이혼을 부끄럽게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혼은 수치가 아니라 독립적인 인간이 획득한 삶의 훈장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나쁜 쪽으로만 해체되어가고 있다.
이 시대는 진리를 비웃는다. 진리를 언급만 하면 유서 깊은 지하 도서실에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아무렇게나 진열된 고문서 나부랭이 정도로 취급한다. 진리 운운하는 사람들을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거나 고리타분하게 매도해 버린다. 철학에 하품을 하고 신학에 팔짱을 낀다. “진리가 밥 먹여주느냐?” 는 태도이다. 영혼이니, 내세니, 도덕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은 인기 없는 종목처럼 사람들의 주된 관심을 끌지 못한다. 대신에 유행이, 돈이, 성공이, 향락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 시대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만 있을 뿐 나아갈 방향을 따라 줄기차게 걷는 이가 없다. 의미 없는 뜀박질만 있을 뿐 진지한 순례의 걸음이 없다. 바라볼 목표가 없기에 만사가 맹목적이 되어버린다. 생존만 있지 삶이 보이지를 않는다. 흥얼거리는 곡조는 있는데 의미 있는 가사가 없다. 순간을 노래하고 찰나를 찬양하는 현실주의자들이 득세하고 내일을 바라거나 영원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변두리에서 맥없이 서성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