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1세기 교회의 흔적을 보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유대인 회당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약 2시간 30분정도 되는 예배 시간에서 성경읽기가 3분의 2에 해당된다. 나머지 기도와 찬송과 설교가 있다. 성경읽기가 예배의 핵심이었다. 토라와 예언서와 시편을 번갈아 가면서 함께 성경을 읽는 시간으로 대부분을 할애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지루하지 않고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을 말씀 읽는 시간으로 삼고 있다. 가족이 (자녀들도 같이) 모두 참여하는 회당예배는 3대가 같이 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그 말씀을 듣는 것을 예배의 중심이 되는 것을 보고 어색했다. 우리는 거의 성경 읽기가 없고 찬송과 설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설교를 들으러 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유대인은 성경을 읽으러 예배에 참여한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개신교는 설교에 할애를 많이 하지만 유대인은 토라와 성경자체에 중심을 준다.
2시간 넘게 진행되는 예배시간은 아주 지루했다. 예배 순서가 찬송과 기도와 성경읽기, 말씀권면 이외에 다른 것이 없었다. 기도와 말씀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 되는 순서는 이방인에 보기에는 무미건조해 보였고 예배 같지 않았다. 토라와 예언서와 시편을 번갈아 가면서 읽는 성경읽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같이 참석했던 몇 동료 목회자들은 예배드리다가 아예 밖에 나갔다. 필자는 끝까지 예배에 참석해서 다른 시간을 기대해 보았지만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은 예배에 성경읽기가 중심이라는 점이었다.
반면에 우리 예배를 돌아보면 설교가 반절을 차지한다. 온 교인이 함께 성경 읽는 시간은 없다. 겨우 성경 읽는 것은 설교에 대한 본문이 전부다. 그것도 시간적인 제약 때문에 10절 내외다. 성시교독을 하지만 이것조차도 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 이런 점에서 찬양과 설교로 대부분을 자치하는 우리 예배 순서는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다. 지금 우리는 성경을 통해 직접 듣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거의 없다. 가장 중심이 되는 성경 읽기가 예배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종교개혁자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용했던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다: 예배부름, 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 시편 찬송,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 성경읽기(신약과 구약에서 한 장씩), 설교, (성례), 헌금, 긴 기도와 주기도문 암송, 사도신경, 시편 찬송, 축복선언 등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예배에도 비슷하다. 눈에 띄는 점은 예배 중심에 구약과 신약 성경 한 장 씩 읽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로 말하면 성경통독 시간이 예배중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전통이 계속 되다가 어느 날 가장 중요한 말씀이 예배 중에 사라졌다.
쉽게 말하면 주인인 성경이 시녀인 설교로 밀려난 예배가 되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말씀이 사라지면서 생기는 문제다. 설교가 말씀에 충실하지 못함으로 제 기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서 시급한 일은 성경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시녀로 밀려난 성경을 예배의 주인의 자리에 초대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예배의 회복이다. 혹자는 예배 회복을 위해서 찬양단이 나와서 찬양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자칫 인간적인 감정과 보이는 분위기로 갈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과 거리가 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것이다. 영이신 진리의 말씀이 예배의 중심에 섰을 때 인간이 조작할 수 없는 오직 성령이 운행하는 예배가 된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성경읽기를 예배 중에 과감하게 넣는 일이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그 시간이 지금 한국교회 예배에 필요하다 구약1장, 신약 1장 정도 읽는 시간 조차도 예배 중에 할애 할 수 없다면 내가 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깊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다른 시간을 조금 줄여서라도 성경읽기를 예배 중에 도입해 보면 어떨까? 이것은 새로운 시도가 아니다. 본래 있었던 초대교회 좋은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다. 일 년이면 100장의 성경을 읽는다. 그것도 예배 중에 모든 성도가 한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는다고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때 임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 해보자.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도 전교인이 성경 통독할 수 있다. 그 시간을 통해 성도들은 성경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점점 들 것이다. 이래저래 좋은 복된 그 시간을,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그 좋은 시간을 왜 실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초대교회는 이런 헤브라이즘 전통이 이어져 예배 시간에 구약과 신약을 읽는 성경읽기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성경읽기가 예배 중에 사라져 지금은 거의 설교가 예배의 핵심이 되고 있다. 말씀의 선포가 설교가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설교가 제대로 된 설교일 경우는 역할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많은 문제를 낳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성경읽기의 회복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다. 필자는 신학교 졸업 이후부터 지금까지 예배시간에 성경 읽기 시간을 넣어서 성경을 차례대로 읽고 있다. 성경읽기는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도 있고 성경을 중심한 신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좋다. 그리고 성도가 함께 소리 내어 예배시간에 성경을 읽는 것도 아주 좋은 시간이다. 때로는 설교 이상의 시간이 될 때가 많다. 한국교회 예배시간에 성경읽기가 다시 회복되면 좋겠다. 설사 설교에 은혜를 받지 못해도 성경 읽기 시간만으로도 의미가 있고 은혜가 된다.
성경읽기는 그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가장 강력한 시간이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시간이다. 성경읽기가 주가 되고 설교가 부가 되는 예배가 되면 좋겠다. 성경에도 성경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은 읽는 책이다. 모일 때마다 성경을 소리 내어 읽는 공동체가 되면 좋을 것이다. 교회가 살아나는 역사가 성경을 읽는 중에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성도들이 성경읽기가 생활화 될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듣기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쉐마가 훈련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함께 된다. 성경 읽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에 응답하며 말씀을 듣는 일이 예배 중에 일어난다면 한국교회에 예배회복이 일어나고 아울러 설교의 갱신도 일어날 것이다. 말씀이 주인이 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아울러 설교자가 자칫 주인이 되는 착각을 벗어 날수도 있다. 10분정도 성경 읽기 시간을 넣으면 좋을 것이다. 신약과 구약의 말씀을 5분씩 정도 읽어도 좋으리라 본다. 믿음은 말씀을 소리내어 읽고 듣는 중에 일어난다. 그것이 안 되면 설교도 잘 듣지 못한다. 일차적인 훈련을 성경 읽기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때로는 불가피하게 설교자가 없을 경우에 기도모임에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먼저 이루어질 때 설교말씀도 들려진다. 교회와 예배와 설교개혁은 성경읽기부터 회복하는데서 일어난다. 이것이 1세기 교회를 오늘날에 재현하는 우선적인 일이다. 설교자의 입에서만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온 성도가 말씀을 직접 소리 내어 읽으면서 선포되는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면 다시 한국교회가 말씀으로 흥왕하는 사도행전 부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