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Emmanuel Levinas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의 도입부에서 답한다. “경험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어떤 행동이 멈추는 것이다. 죽음은 회복할 수 없는 간격이며 분해이며 응답/반응-없음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문자답한다. “수만 년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죽음은 항상 너의 머리 위에 머물고 있다. 잠시 후면 너는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잠시 후면 모든 것이 너를 잊게 될 것이다.” 미국 통계청에 의하면, 1초에 1.8명씩 죽는다고 한다. 태초부터 20세기까지 세상 떠난 1000억 명으로 추산한다. Greco-Roman 작가들은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죽음이 고통을 끝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요한계시록은 사망을 반드시 패하게 될 대적자로 생각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음에 의해서 고통과 슬픔이 그쳐진다고 보았다.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고대 문헌들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였다. 죽음의 기원은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궁극적인 형벌이 죽음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다시없게 될 사망은 마지막 원수이다. 죽음이 사라져야 구원이 성취된다. 죽음은 신약 어디서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 죽음은 늘 죄와 연관된다. 하나님과 교제에 장애물이다. 사망은 죄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왔다. 우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와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 죄와 죽음은 불가피하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을 필요로 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할 뿐이다. 죽음의 두려움에 노예가 되어 버렸다(히 2:15). 이사야는 하나님이 ‘사망을 영원히 멸하셨다’고 선언한다(사 25:8).
1. 수한이 차지 못하여 죽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복을 종말론적으로 묘사한다. 포로생활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킨다. 이전 시대는 심판과 포로 생활의 경험이다. 새 시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새 시대의 특징은 육체적 건강과 장수 보장이다. 유아 사망과 조기 사망 모두 추방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사람들은 현 세계와 같은 방식으로 질병과 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장수와 경제적인 안정이라는 두 가지 보장은 복을 받은 자들을 나무에 비유된다. 시편 1편을 떠올리는 복을 받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은 물질적인 실재를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복을 통해 그 실재를 변화시키려 한다.
이사야는 야훼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는 것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완전히 회복으로 묘사한다. 그 때에 그들의 머리 위에 ‘영원한 기쁨’이 있을 것이다. 고난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이므로 슬픔과 탄식이 달아날 것이라고 예언한다(사 35:10: 51:11). 요한은 여기서 영원한 지복 상태가 예언의 성취 중 하나라는 사상의 흐름을 이어간다. 하나님의 새 창조를 통해 변화된 예루살렘과 그의 백성 가운데는 천수를 다하지 못한 죽음이 더 이상 없다(사 65:20). 수명은 나무의 수명에 비교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구속되고 의롭게 되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죄를 담당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완료되었다. 마귀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는 십자가에서 획득되었다. Frederick Buechner는 1959년 미국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교목으로 부임한다. 채플 시간에 ‘찬란한 패배’를 주제로 설교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나사렛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상한 발을 딛고 휘청거리며 무덤에서 나와 부활로 걸어가는 그분의 모습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몸에는 패배의 자랑스러운 훈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찬란한 패배입니다.” 부활의 역할은 사람들이 버린 그 예수님이 정당하셨음을 변호한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능력으로 선언한다. 죄를 담당하는 그분의 죽음이 사죄의 능력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확증한 것이다.
슬픔, 사망, 애통, 곡성, 그리고 아픔이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은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의 확장이다. 바다는 이제 일어나게 될 죽은 자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라진다. 바다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바다가 없다는 것은 새 질서의 시작을 표시한다. 요한은 고대의 사고 체계에서 상징하던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셨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사망에 대해 용감히 맞설 수 있다. 사망이 부활과 새 창조로 종말을 고한다. 바다가 없어진다. 악이 끝난다. 사망이 다시 있지 않는다. 사망의 소멸과 함께 슬픔과 아픔이 사라진다. 죄로 혼탁한 옛 질서와 그에 수반되는 사망이 영원한 복이 지닌 완벽하고 영원한 질서에 굴복하게 된다.
야훼와 바다의 반목은 구약과 초기 유대교의 문헌들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사야가 ‘바다’가 사라진다는 것은 첫 출애굽 사건의 반영이다.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10). 이런 바다 현상을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회복과 비교한다. 공자는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未知生 焉知死)고 했다. 현대인에겐 라틴어 경구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가 더 절실하다. 새 질서에는 더 이상 의미 없게 된다. 사망이 없으니 죽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서는 태어나면서 죽기 시작한다. 죽음이 시작이자 끝이었다. 새 질서에서는 사망이 다시없다.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와 생명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할 때 방해하던 바다를 제거하셨다. 안전하게 홍해를 통과하게 하셨다. 완전한 구원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했던 모든 장애물을 제거한다. 슬픔, 사망, 애통, 아픔이다. 완전하고 끝없는 안전함을 주실 것이다.
2.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사망이 없을 것이다
요한은 이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유익을 묘사한다. 다시는 없다는 것은 영원히 도말된다는 뜻이다. 인간을 약해지게 만드는 죄의 영향력은 사라진다. 하나님과 교제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은 제거된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일부였던 사망이 이제 지나가 버렸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죽음을 멸하실 것이다(사 25:6-8). 이러한 죽음의 정복은 단지 미래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했을 때 죄를 정복하셨다. 무기로서 죽음을 사용한다(히 2:14-15). J. Stott는 마귀가 천년동안 결박을 당하는 것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강한 자를 결박하는 일로 해석한다. 십자가를 패배로, 부활을 승리로 여기지 않는다.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신 것이다. 부활은 미래에 있을 그의 백성의 부활을 보증하는 것이다(고전 15:12-28). 이사야의 비전의 성취다(고전 15:50-54). 그 허무함과 썩어짐의 통치가 온 세상으로 퍼지게 된다(롬 8:20-21). 마지막 원수, 죽음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서 완전히 파멸된다. 옛 질서에서는 죽음은 삶의 일부이자 과정이다. 장자(莊子)는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두려울 것도 싫어할 것도 없다’고 했다. 새 질서에서는 다르다. 죽음이 아예 없어진다. 다시는 있지 않는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 즉 사망의 소멸은 이미 십자가에서 일어났다. 십자가는 획득된 승리다. 부활은 추인되고 선언되며 입증된 승리다. 십자가에서 무기와 위엄을 박탈당했다. 악한 정사와 권세들은 이제 그분의 발 아래 정복되어서 그분께 복종하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다시 사망이 없는 근거다.
새 창조가 도래하면 사탄은 영원히 심판을 받는다. 새 창조에서 쫓겨날 것이다. 사탄의 어떤 위협도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사망도 다시 있지 않다. 죽은 자들의 거처가 제공될 바다가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문자적인 바다는 나라와 나라를 떼어놓는다. 요한을 그의 사랑하는 교회로부터 분리했다. 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런 분리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사망은 분리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기 때문이다.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뛰어나며 그것을 대체하듯이(히 8:7-13), 새 하늘과 새 땅은 새롭고 영원한 상태를 위한 배경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새 질서 속에서는 죽음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하는 믿음을 통하여 그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사망의 위협조차 사라진다. 인간의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은 남녀노소와 지위고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냉혹한 것으로서 인류의 가장 큰 적이다. 그것은 부모에게서 귀중한 아이를 빼앗아 감으로서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남겨 놓는다.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에 유아의 죽음이 없다. 수한 안에 죽는 죽음이 없다. 자녀 출산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다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진다. 바다도 없어진다. 더 이상 슬픔과 사망과 아픔이 전혀 없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사야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사 25:8)과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사 26:9)과 모순되게 말한다. 미묘한 차이는 있다. 의미는 명확하다. 미래에는 이른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