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방 여인의 믿음(막 7:24-30)
예루살렘에서 감찰 나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추궁을 받은 후에 예수님은 그곳을 피하다시피 빠져나와 북쪽 두로 지역까지 오게 되었다. 사실 예수님이 너무 많이 갔고 예수님이 밟은 땅 두로 지방은 유대인의 경계를 벗어난 곳이었다. 예수님은 그 곳에 한 집에 들어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방지역에서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기를 꺼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숨어있는 집에 이방출신의 한 여인이 갑자기 찾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다. 그녀는 귀신들린 딸 때문에 수년간 시달리고 심리적으로 지친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에게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주시도록 간청을 하고 있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예수님이 조용히 들어와 숨어있는 이 집까지 이 여인은 어떻게 찾아왔는가? 소문을 듣고 왔다고 한다.
여인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선뜻 여인의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유대인 분위기를 풍기는 말씀을 하신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할지니”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이방인을 먹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온 것이 아니라 자녀를 먼저 배불리게 하려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다. 이방인으로서 유대인이 표현하는 “개”가 누구인지 그녀는 알았을 것이다. 이방인을 모독하는 차별적인 언어인 “개”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자존심을 건드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주여 옳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들도 먹습니다”고 했다.
예수님은 “네가 이 말을 했으니 돌아가라 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느니라” 집으로 여인이 돌아가 보니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딸이 건강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산과 같이 도우시는 하나님(시 125편)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서 있는 시온 산에 비유하고 있다. 시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충성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보호하시고 돌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돌보시는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같이” 자기 백성들을 돌보신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산이란 남쪽으로는 감람산이다. 그리고 서북쪽으로는 시온 산이다. 이 산들은 높지도 않고 나지막한 산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이 산들이 예루살렘을 보호하는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시온 산이나 감람산이 고대시대에는 요새였다고 한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왔던 자들이 이 요새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되돌아갔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 산은 대단한 요새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그런데 시인이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산처럼 하나님이 백성들은 영원부터 지금까지 돌보신다고 할 때 마치 그 산이 대단히 큰 산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백성들 가운데서 떠나지 않고 늘 돌보시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성 때문이다.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가 지리적인 실재에 기초하기보다 신화적인 개념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주하시기 때문에 의인들이 결코 악인들의 풍조를 그대로 따라가도록 허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악인들이 의인들의 세계 속에서 권세를 남용하여 의인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도 못할 것이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예루살렘을 두른 산들처럼 하나님이 늘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심으로써 백성들은 평강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에 보호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흔들리지 않는 충성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겨야 할 것이다.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3. 차별에 항의하는 바울(약 2:1-10, 14-17)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기독교인들을 보자마자 자리에 일어나 슬그머니 유대 기독교인들 자리로 옮긴다. 이 장면을 목격한 바울은 베드로의 면전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다. 바울이 왜 베드로를 책망하였는가?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때 한 말은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였다(갈 2:14). 베드로가 이방인을 처음에는 포용하였으나 이제 이방인으로 하여금 유대인처럼 살게 한다는 것이다. 중심주제는 차별이다. 유대인이 이방인을 차별하는 점에 대하여 바울은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다.
오늘 읽은 야고보서에도 차별의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약 2:1). 초기 기독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자들을 차별하여 대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겉보기에는 부자를 존경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므로 발생된 차별이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2-3절). 예수님을 가르침을 받아 시작된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부자를 좋아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한다는 말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가능하다. 오늘날도 가능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난한 자는 누구이며 부자는 누구인가?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차별한다면 그 근본이유가 무엇인가?
4. 노블리스 오블리제(잠 22:1-2, 8-9, 22-23)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한다. 오늘날처럼 물질 우선하는 시대에 재물과 은금이 명예와 은총보다 더 크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명예와 은총을 물질보다 더욱 선택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부자가 취해야 할 겸손 때문이다. 로마에서 귀족은 존경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귀족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솔선하여 우선적으로 감당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실천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한다.
왜 부자가 사회적 책임으로 그들의 재산과 물질을 사회에 환원하였는가? 그들이 부요하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은총과 백성들 덕분임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가난한 자와 부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한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창조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자나 가난한 자가 다 하나님 여호와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힘의 원천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부자되게 하신 이유는 가난한 자를 돕고 보살피라고 주신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가난한 자로 만드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궁구하고 전하는 영적 양식을 공급할 수 있는 영적 권세를 주시기 위함이다. 초대 기독교 사도들은 걸식 전도자로 파송받았다. 그러나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축복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