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남편과 사별한 젊은 여성을 상담했었다. 남편은 30대 후반이었고, 아내는 30대 중반이었다. 사별을 하고 2주후에 내담자로 만났던 것이었다.
“남편은 뭐든지 성실했어요.”
“남편은 뭐든지 최선을 다 했어요.”
“남편은 너무 책임감이 강했어요.”
“남편은 큰 아들로서 책임을 다하려고 했어요.”
“남편은 쉬지를 않았어요.”
아내가 기억하고 있는 남편의 이미지다. ‘성실하다’, ‘책임감이 강하다’, ‘쉬지를 않는다’ 아내가 마음속에 남겨진 남편의 이미지는 좋은 남편이었다. 자녀들에게도 좋은 아빠였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고 살았겠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혹독했었다. 스스로 자신에게 ‘쉼’이라는 선물을 주었던 경험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그렇게까지 너무 과할 정도로 하지 않아도 충분한데,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낄 수 있었던 무의식적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쉬고 싶어도 쉬지를 못하게끔 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내면비판자가 있다. 내면비판자는 내 마음 속에서 “좀 더 완벽해야 해”, “튀지 말고 가만히 있어”, “확실한 것이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가만히 있어”, “좀 더 열심히 해야 해”라고 말을 한다. 그런 내면비판자의 목소리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정말 나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나를 도와주는 목소리로 착각을 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않고 그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순응해서 살아간다. 그래서 그 목소리대로 사는 방법을 선택한다.
먼저 천국에 간 30대 후반 남편은 젊고 아직 해야 될 일들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내로부터 사연을 들어보니 남편 역시도 내면의 비판자의 목소리를 따라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남편 안에 있었던 내면비판자의 목소리는 그 남편이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주로 듣고 자랐던 비판의 목소리였다.
그동안 목회현장에서 성도들을 만나왔었다. 대학에서 목회상담에 관한 과목들을 지도한지 벌써 9년째다. 그리고 상담현장에서 사람들의 아픔을 섬기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속고 있는 내면비판자의 소리를 하나정도는 듣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그 비판자의 소리에 속게 되면 나 자신을 쉬지 못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갈등의 원인이 된다. 내가 누군가에 비판을 하는 기준은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비판을 받았던 목소리였다. 그래서 관계적인 회복이 있기 위해선 무엇보다 나 자신이 먼저 회복이 되어야 한다. 이를 가리켜서 ‘자기화해’라고 말한다.
내면비판자의
소리에 속지 말고
자기화해를 이루자
상담현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부모, 좋은 부부, 좋은 자녀와의 관계를 기대하면서 찾아왔었다. 그런데 상대방의 단점만 생각할 뿐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회복된 가정을 보면 공통된 특징이 자기화해가 있었던 가정은 관계적으로 많은 회복을 가져왔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행1:8). 가장 가까운 예루살렘부터 시작해서 가장 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 내가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 아니면 가족들이 나에겐 가장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니 가장 가까운 장소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싶다. 또한 가만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가장 먼 곳이 나 자신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권능은 자기화해가 이루어질 때 강력한 역사가 이루어진다. 내면비판자의 목소리에 속지 않는 방법은 그 목소리를 그냥 무시하고, 승리자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수록 자연스럽게 내면의 비판자의 목소리가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승리자이신 주님의
음성에 집중하면
내면비판자의 목소리에
속지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