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광채를 투영하는 거울과 같은 메신저
영광의 말씀에 이끌려 빈들에 거하던 요한에게 전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요한은 천상에서 들려준 그 말씀을 성실히 전했다. 요한은 도시로 돌아가지 않았다. 말씀이 임했던 빈들에 그대로 머물렀다. 빈들에서 외친 그의 말씀이 강한 흡인력으로 사람들을 광야로 이끌어냈다.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이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던 사람들을 불러냈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 회개는 믿음을 전제한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도 회개의 무릎을 꿇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보냈고 세례요한은 받은바 말씀을 전했다. 사람들은 들었고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회개의 반응으로 세례요한의 말씀에 대해 합당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결국 그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말씀의 거울이 되었다.
거울이 빛을 받아들여 물체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듯이 면이 바른 거울은 바른 상(像)을 비춘다. 달이 밤의 광명체로 인정됨은 낮의 광명체에게 받은 빛을 제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거울의 뒷면을 은, 수은, 알루미늄 등으로 가공하여 차단하면 빛이 반사되는데 이 반사 능력이 뛰어날수록 좋은 거울이다. 세례요한은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생명을 정직하게 반사한 의의 거울이며 비추는 달이었다. 바울 역시 복음의 위대한 반사체로 탁월함을 보였다. 거울이나 달처럼 메신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함에 있어 본래의 기능에 전혀 하자가 없어야 한다. 메신저는 매개자 또는 통로로서의 중차대한 사명에 진지함으로 임해야 한다. 전도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전하는 자가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믿음이 생겨날 수 없다. 듣되 반드시 바른 자세로 들어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듣는 자세를 중요하게 여겨야 함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영혼이 바르면 육신의 자세도 반듯하다. 바른 자세에 바른 정신이 깃든다. 바른 정신에서 바른 생각이 나온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결정이 나온다. 바른 결정이 한 사람의 영혼을 편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하나님의 말씀답게 역사하려면 자세 확립이 우선이다.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영적 상태를 고르게 만들어야 한다. 당신은 존귀한 사람 앞에서 함부로 처신하지 않는다. 옷매무새에서부터 몸가짐, 표정과 언어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것은 존귀한 상대에 대해 누구나 지닐 최소한의 배려이다. 당신이 말씀 듣는 자세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는 단 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말씀답게 듣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이 친히 일하신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고넬료는 베드로의 말씀을 듣기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추었다. 베드로가 전할 말씀을 높이고자 스스로를 낮추었다. 실상 고넬료와 그가 불러들인 일가와 친구들은 베드로가 아닌 하나님 앞에 있었다. 사람에게서 나올 말을 사람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 그들의 안목과 믿음이 그들을 복된 구원의 길로 이끌었다. 말씀을 듣기도 전에 이미 생명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 치부하여 업신여긴다. 전하는 자가 자신의 메시지에 영적 권위를 확신치 못한다면 이런 낭패도 없다. 이런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격하시킨 대언자에게 책임이 있긴 하지만 인간 언어에 갇혀 숨막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한 최종 책임은 듣는 자의 몫이다. 말씀에 합당한 가치와 영광을 부여하지 못한 대언자나 들은바 말씀을 멸시하며 홀대한 청중은 그에 상응한 대가를 나중에 치르게 될 것이다.
천상적 기원이 분명한 말씀의 영광
천 겹 만 겹 싸여도 말씀은 말씀이다. 포장이 더럽고 허름해도 그 속에 간직된 것이 보석이면 보석의 가치는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설사 어린 아이가 전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말씀에 합당한 영광은 마땅히 보존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누구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원래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설교자는 말씀의 대언자라는 위치에서 존경받는다. 말씀을 해석하고 대언할 수 있는 거룩한 직능이 교회를 위해 선택받은 헌신자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다. 물론 훈련이 훌륭한 말씀 전달자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았을지라도 말씀 사역자가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기 어렵다. 기술적인 숙련보다는 말씀의 영을 받아야 하고 기도 속에서 영적 지각력을 부단히 키워가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께 받은 말씀을 전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했기에 그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 저주를 선언할 수 있었다. 바울의 복음은 그 기원이 사람의 전통이나 개인적 연구 결과에 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천상적 기원이 뚜렷했다. 그가 받은 계시는 깊은 기도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산물이었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계시를 받아야만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을 이루는 말씀의 계시는 이미 끝났다. 계시되어진 말씀에 대한 성령의 조명을 얻으려면 많은 기도와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과연 전할 메시지 하나를 위해 부끄럽지 않을 정성과 헌신을 다하는가? 선정된 본문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깊이 묵상하며 활력 넘치는 메시지로 다듬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가? 계시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음의 전달자로 세움 받은 만큼 그리스도의 대언자다운 준비에 철저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바울의 확신에 찬 어조를 들어보라! 얼마나 당당한가?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듣는 자-깨닫는 자-지키는 자
듣고 지키면 복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한 가지 이유는 지키도록 함이다. 계명 준수는 하나님의 백성 된 도리였다. 구약에 나타난 일관된 사상은 말씀 준수의 강조와 순종자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다. 시 119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양한 표현으로 불렀다. 주의 계명, 주의 율례, 주의 법도, 주의 율법, 주의 규례, 주의 법, 주의 증거, 주의 판단, 주의 말씀 등이다. 말씀을 듣고 명심하여 지키는 자들에게는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르기도 전에 준행자 자신이 먼저 희열과 감격을 느낀다. 말씀을 듣고 지키지 않으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성경적인 복에서도 멀어진다. 말씀으로 인한 복의 크기는 한량없이 풍성하다. 특히 신명기에서는 계명과 복의 상관성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신 11:27)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
말씀을 읽는 것도 복이요 듣는 것도 복이지만 역시 최상의 복은 읽고 들은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에게 에스라가 율법의 말씀을 낭독했을 때 그들 곁에는 예수아를 비롯한 13인과 레위인들이 그 내용을 깨닫도록 도왔다. 말씀을 깨닫자 백성 가운데 통곡의 역사가 일어났고 초막절을 거국적으로 지키면서 이레 내내 말씀 집회를 계속했다. 낮 1/4을 할애하여 율법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회개와 자복에 연이은 야훼 경배로 이어갔다. 깨달은 말씀이 가져온 축복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도 주님이 풀어준 말씀에 따라 깨닫자 발길을 되돌려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듣고 지키면 복이 되지만 들음과 지킴 사이에 깨달음이 없다면 복된 준수가 가능하겠는가? 응당 깨달음이 있어야 합당한 준수가 따라오고 그에 알맞은 복이 이어지니 아귀가 맞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