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문서의 발전 과정(단, 계, 요)
1. ‘작품의 완성도’라는 말이 있다. 어떤 제하의 글을 쓸 때 처음에는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아 짜임새도, 사상적 깊이도 엉성하고 미숙하지만, 오랜 사색의 기간을 거치면서 글의 짜임새도 정교해지고, 사상도 깊어져 마침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이를 사복음서에 적용하면 최초의 복음서로 일컬어지는 마가복음서(주후 70년경)는 ‘복음서’라는 문학 장르를 창안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업적을 이룩했지만 글의 짜임새나 신학적 깊이에 있어서 아직 미숙함을 면치 못한다.
그러다가 마가복음서를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쓴 마태복음서나 누가복음서(주후 80년대)는 짜임새나 신학적 깊이에 있어서 마가복음서보다 더욱 정교하고 다듬어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러다가 맨 마지막에 기록된 요한복음서(주후 90년대)에 오면 짜임새나 신학적 깊이에 있어서 앞의 세 복음서(공관복음서)를 능가하는 가장 정교한 짜임새와 신학적 깊이가 있는 복음서로 완성된다.
이를 거의 같은 시대에 쓰인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두 가지 측면에서 요한복음이 요한계시록을 넘어서는데, 하나는 묵시문학적 측면이고, 또 하나는 기독론(삼위일체론과 성령론 포함)적 측면이다. 후자는 다음호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번호에서는 묵시문학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묵시문서는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상황의 역전에 대한 강렬한 갈망에서 비롯된 문서로서, 주전 2세기의 하스모네 왕조시대와 주후 1세기의 로마 강점기 시대에 가장 융성했고, 바로 그 시대 속에서 상당량의 묵시문학 저작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경 중에서는 다니엘서가 묵시문서로 인정되어 왔고,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 유일한 ‘묵시문학’에 속하는 문서로 불려 왔다.
그런데 지난 세기 이후 모든 신약문서들은 묵시문학적 배경하에서 쓰인 작품이라는 것이 거의 모든 신약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해서는 묵시문학적 특징을 적용하는 데에 열을 올린 데 반해, 요한 문헌에 속하는 요한복음이 ‘묵시문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요한복음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기문학적 성격을 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은 요한계시록과 거의 같은 시기인 주후 90년대 도미티안 황제 시절 황제숭배가 강요되는 묵시문학적 박해상황에서 배태된 묵시문서이다. 그런데 양서는 장르상 묵시문서이지만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라이트(N.T.Wright)는 이렇게 말한다.
“묵시문학은 억압받은 집단들의 전복을 꾀하는 문학으로 기능할 수 있고 또한 그런 기능을 하도록 의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묵시문학이 철저한 신비체험에 의해서 영감을 받았든, 아니면 훌륭한 문학적 기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여기서 계시록은 전자(철저한 신비체험)에 의해서, 그리고 요한복음은 전자를 넘어선 후자(훌륭한 문학적 기법)에 의한 묵시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즉 요한복음에는 계시록에서 보이는 밧모섬에서의 환상이나 천사의 등장,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천상으로의 여행, 짐승과의 투쟁과 같은 신비체험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훌륭한 문학적 기법인 다양한 상징코드를 사용한 묵시문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의 묵시문학적 성격은 미래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사66:22; 계 21:1)에 관심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예수에 의해 성취된 ‘실현된 묵시문학’(realized Apocalyptic)을 말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의 묵시적 성격은 ‘저 세상으로의 여행’을 다루고 있지 않는 ‘역사적 묵시’로써, 사후예언식 서술을 사용하고 있는데, 21장의 베드로의 순교가 그 실례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성취된 종말론
2. 한편 묵시문학은 종말론을 그 특징으로 한다. 묵시문학과 종말론은 별개의 사상이 아니다. 한 손의 양면이다. 비유하자면 ‘손이라는 역사’에 ‘손등이라는 묵시문학’과 ‘손바닥이라는 종말론’이 함께 있는 격이다. 역사의 파국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끝’이라는 감정이다. 그 감정 속에서 역사와 하나님에 대한 변호 내지 변주가 바로 묵시문학이다. 그리고 한 개인의 끝 또는 역사의 끝이라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종말의식 곧 종말론이다. 종말론은 묵시문학적 상황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귀결이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종말론적 특징은 미래적 종말론이기보다는 현재적 종말론 또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다.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미친 미래적 종말론은 유대묵시사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사상은 시대를 둘로 구분하는 시간적(역사적) 이원론을 그 특징으로 한다. 즉 하나님의 왕국 건설 이전은 옛 시대이고, 그 이후는 새 시대로써 옛 시대는 악하며 사라질 것으로, 새 시대는 선하며 영원한 것으로 보았다.
요한복음의 종말론은 유대 묵시사상이나 초기 기독교 전승에서는 찾기 어렵다. 그렇다고 영지주의적 사상, 즉 여기는 악하고 저기는 선하다거나 보이는 물질세계는 악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정신적) 세계는 선하다고 보는 공간적이고 존재론적인 이원론과도 다르다.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이원론적 개념들-빛과 어둠, 영과 육, 진리와 거짓, 하나님과 사탄-은 존재론적, 공간적 이원론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적 응답으로서의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계시록은 선명한 이원론에 의한 하나님과 사탄의 대립을 강조하고 있다. 이 세계는 하나님과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12:9) 사이의 우주적인 갈등 아래 놓여 있다. 이 갈등에는 어떤 타협도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탄 중에 누구를 섬기고 따라야 할지 결단해야 하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통치와 사탄의 지배,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너무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과의 경계선을 선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피오렌자(E.S. Fiorenza)는 그녀의 저서 『요한계시록』에서 ‘Justice and Judgment’(정의와 심판)이라는 부제를 달면서, 묵시문학은 권력과의 관계를 정조준 한다고 말하였다. “저자의 주요 관심은 역사에 대한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에 있다.” 즉 ‘누가 세상의 주님인가?’라는 묵시문학적 질문이 요한계시록의 주요 쟁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신화적이고 정치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한마디로 요한계시록은 누가 우주의 주(主)인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가이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책이다.
보링(M.E. Boring)은 계시록의 요한은 환난을 당하는 소아시아 교회를 향해 목회적 편지를 쓰면서 그의 메시지를 묵시문학적 언어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예언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했는데, 계시록은 다음과 같은 두 질문에 대한 예언적/목회적 응답이라는 것이다. 그 두 질문이란 첫째, 하나님에 대한 질문으로써 “이 세상은 누가 통치하는가?”이고, 둘째, 역사에 대한 질문으로써, “우리의 역사 속에서 포함된 비극적인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이 보는 환난
-이 세상은 누가 통치하는가?
-이 비극적 사건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신앙적 응답이 묵시문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역사적(시간적) 이원론’이다. 현 시대는 사탄이 지배하는 악한 세상이고, 다가올 시대는 하나님이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김으로써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원한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이것이 구약의 묵시문서인 다니엘서의 사상이고, 신약의 바울서신이나 공관복음서에 보이는 묵시사상적 특징이다. 그렇다면 묵시문서로 알려진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러한 묵시문학적 특징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까?
먼저, 계시록부터 살펴보자. 공간적 차원에서 묵시문학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그린다. 계시록의 환상적 지리는 하늘로부터 땅까지, 그리고 깊은 심연에까지 확장된다(계 4:1; 8:7; 9:1). 선견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보좌로까지 여행하며(4:1), 그가 음녀 바벨론을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광야까지 여행한다(17:1). 심지어 신부 새 예루살렘이라는 새 창조로까지 여행한다(21:9). 계시록의 공간적 차원은 지상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구조 너머의 참된 권위에 위치한다. 독자들은 하늘(12:7-12)과 땅(17:15-18) 및 지하(1:18; 20:13-14)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계신 하나님께 충성을 보여야 하고 이 세상의 권세와 구별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시간적 차원에서 묵시문학은 종말에 있을 심판과 구원을 고대한다. 구원에 대한 묵시문학적 환상들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 왕국의 수립과 더불어(단 7:27; 4 Ezra 13:39-50), 부활에 대한 소망을 포함한다(단 12:3; 4 Ezra 7:32-36). 현 세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힘들은 강력하고, 독자들은 갈등을 피하기 위해 그것들을 수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대의 세력들은 곧 끝나고, 희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그의 통치가 계속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먼 전망을 취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내용을 말하기 위해 계시록은 묵시문학적 언어(상징)와 그 형식을 받아들였다. 특히 ‘사탄과의 전쟁’이 그것이다(12장). 12:7-8에서 우리는 묵시사상의 뚜렷한 언어를 발견한다. ‘천사들의 반역’이 그것이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그리고 그 전쟁과 더불어 그 원수가 여러 가지 명칭으로 설명된다. 그는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 등이다(12:9).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마귀론’ 또는 ‘사탄론’이 없다. 그 까닭은 사탄(마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독자적인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함께 이루어가는 심부름꾼이자 종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요한복음의 절정을 이루는 11장에서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말이다. 나사로의 소생으로 충격을 받은 산헤드린 의원들은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때 그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 가야바는 지금 예수의 원수 된 입장에서 말하고 있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가야바만이 아니라 가룟 유다(요 13:27)도 그렇고, 빌라도(요 19:10-11)도 그렇다.
3. 묵시문서로서의 계시록은 천사와 괴물들, 순결한 처녀와 음녀,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두 세계는 전쟁 중에 있으며, 거기에는 어떠한 협력이나 타협이란 없다. 박해와 환난을 당하고 있는 묵시적 상황에서 계시록은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것을 주문하고, 이기는 자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있다(계 2-3장).
그런데 요한복음도 장르상 묵시문학에 속하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이원론은 헬라적 사고에 속하는 플라톤주의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이원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즉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와 같은 두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의 이원론이 아니다. 요한복음의 이원론은 두 세계를 상정하는 이원론(분리)이 아니라 한 세계(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단지 두 관점(구분)에서 설명한 것이다.
‘이원론’(dualism)과 ‘이원성’(duality)은 다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원론은 양손에 해당하고, 이원성은 한손의 양면에 해당한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빛과 어둠, 진리와 거짓, 위와 아래 등과 같은 문구는 계시록에서 말하는 대립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이원론적 세계라기보다는 이원성의 세계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 여부에 따라 구분될 뿐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계시록에서처럼 대립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이원론적 세계 간의 전쟁이란 찾아볼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이원론
요한복음은 이원성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요한복음에는 ‘전쟁’ 또는 ‘다툼’에 해당하는 어휘(πόλεμος)가 없다는 사실이다. 18:36에 나오는 ‘싸움’이라는 어휘는 전쟁이라는 의미가 아닌 ‘노력하다’ 또는 ‘경쟁하다’라는 의미의 어휘(ἀγωνίζομαι)를 사용한다. 계시록은 ἀγωνίζομαι(경쟁하다) 어휘는 없고, πόλεμος(전쟁) 어휘는 9회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철저히 싸우면서도 결코 눈에 보이게 싸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악한 세력과의 전쟁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묵시문서의 특성상 요한복음은 계시록을 넘어선다
요한복음에는 계시록에 나타나는 영적 싸움에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된 보상 개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악의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사탄(마귀)과의 전쟁이란 없으며, 이는 사탄(마귀)을 비롯한 온 세계(로마제국)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이미 승리하여 온 세계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그리스도)을 믿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을 뿐이다.
묵시문학적 이원론에 대한 요한복음과 계시록의 이 같은 차이는 박해와 환난을 당하고 있는 묵시적 상황에 대한 양서의 관점과 해법이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을 사도 요한이라는 한 저자가 이원론적 세계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 중에 있는 계시록을 먼저 쓰고, 이어서 전쟁이 종식되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종속된 세계를 그리고 있는 요한복음을 순차적으로 썼다고 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다시 말하지만 최고의 명저인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은 한 사람이 양서를 짧은 기간 내에 모두 쓸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또한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을 복음의 두 축인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계시록은 ‘십자가 신학(복음)’을 강조하는 순방향(십자가-부활)의 패턴, 즉 교회(제자)의 길은 십자가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의 패턴이다. 이에 반해 요한복음은 ‘부활의 신학(복음)’을 강조하는 역방향(부활-십자가)의 패턴, 즉 교회(제자)의 길은 부활의 영광을 통한 십자가의 패턴이다.
계시록은 지금 현재 지상의 교회는 계속해서 영적 전투의 격전장에 서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아직 끝나지 않은 ‘전투하는 종말론적 교회’이기에 영적 전투를 치르기 위해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 고난의 길을 요청받고 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최종 승리하는 자에게는 부활의 영광, 즉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라는 찬란한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묵시문서로서의 계시록은 현재의 역사가 악한 세력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현실은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마침표를 찍어야만 새로운 미래가 도래할 수 있다는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은 대부분 미래적인 선상(미래적 종말론)에서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요한복음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3대 원수인 사탄과 세상과 사망 권세를 이미 다 이기시고 부활하셨기에 이미 모든 전쟁은 다 끝났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박해 속에 있는 이 지상의 교회(제자)는 주님이 이미 승리를 통해 보여주신 부활의 영광을 안고 당당히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러기에 계시록에서처럼 만일(If) 회개하면, 그러면(then) 상급이 주어질 것이라든가, 앞으로 승리자에게 주어질 보상적 차원의 찬란한 미래 약속 같은 것은 요한복음에서는 일체 찾아볼 수 없다.
묵시문학은 한마디로 “세상의 주권은 궁극적으로 누구의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신앙적 응답이다. 묵시문학의 주요 쟁점이 “현재 세상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가?”에 있다면, 신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세 묵시문서인 다니엘, 요한계시록, 요한복음은 하나의 일관된 사상적 흐름을 보여준다.
먼저, 다니엘서는 현재 세상의 주권은 악의 세력(사탄)에게 있으며, 장차 하나님이 하늘에서 악의 세력(사탄)을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그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라고 말한다. 다니엘서 7-12장은 다니엘에게 보인 종말의 날에 이르는 역사의 시간표이다. 이 장들은 상징적 표현들을 사용하여 역사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가령, 다니엘 7장에 등장하는 네 짐승들(날개 달린 사자, 곰, 표범, 끔직하게 생긴 힘센 짐승)은 각각 세계를 지배하였던 네 제국들(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헬라)을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종말의 날은 구체적으로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말이 두 번 언급되고 있다(단 7:25; 12:7). 즉 3년 반만 지나면 종말이 온다는 것이다. 12:11에 이 날은 1,290일 내에 도래한다고 명기되어 있고, 12:12에서는 1,335일로 연장 수정되어 있다. 이러한 날짜들은 ‘임박한 종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종말의 날이 임박하였으니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다음으로,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주권을 놓고 현재 악의 세력(사탄)과 하나님이 치열하게 전쟁 중에 있으며 곧 하나님의 승리로 끝날 것이니 조금만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처럼 3년 반이라는 긴 기간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 사탄이 치열하게 전쟁 중에 있으니 조금만(10일) 참으라는 것이다. 곧 전쟁은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끝으로, 요한복음은 악의 세력(사탄)과의 전쟁은 하나님의 승리로 이미 끝나 현재 세상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장중에 있기에 하나님을 믿고 승리자로 담대하게 세상을 살아갈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는 사탄(마귀)과의 전쟁이라는 사탄론(마귀론)이 없다. 따라서 ‘역사적 이원론’의 관점에서 묵시문서인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요한복음을 순차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다니엘서는 현재는 악한 세력인 사탄이 지배하고, 곧 다가올 미래는 하나님이 지배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현재 하나님과 사탄이 치열하게 교전 중에 있으니 배교하지 말고 조금만 참고 충성을 다하라고 가르친다. 요한복음은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사탄조차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완전히 실현된 묵시문학(묵시문학의 완성)을 말하고 있는 요한복음은 성경 전체의 마지막 책이다(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