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12)

  • 입력 2024.04.16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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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만년 살 것처럼 여유를 부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혈기왕성함에도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은 아무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 하지만 영악한 세월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듯 죽음의 그림자는 청춘남녀를 가리지 않고 오늘내일을 다투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매순간이 우리의 시간이라면 하루인들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석양의 그림자 같은 그대의 남은 날을 어찌 보내려나?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다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그대가 진정 믿는다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내세의 삶이 오늘 결정되는 것이라면 그대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과연 안전한가? 아무리 무익한 말도 심판 날에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대가 내뱉은 말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그대는 아는가? 더럽고 사납고 해로웠던 말이 한 마디도 사라지지 않고 허공을 맴돌고 있음을 잊었는가? 많은 이가 그대의 독설에 까무러쳤다.

직분이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사역이 특혜의 이유는 될 수 없다. 상패나 훈장이 쓸모없고 사람들의 존경과 박수도 도움 되지 않는다. 그대는 실상에 비해 너무 많이 누려왔다. 과분함을 은혜로 간주하면서 감사에 인색했다. 옹졸함을 신중함이라 자위하면서 영적 허세를 즐겼다. 사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주님의 성령은 근심하셨다. 천사들은 여러 번 날갯짓으로 안타까움을 표했지만 무딘 영혼은 그저 엘리의 비둔함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상이 흔치 않은 시대에 아이는 이상을 보았으나 이스라엘의 등불이었던 엘리의 눈은 어두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이 사무엘이 거룩한 음성을 들을 때 엘리는 희미한 환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깨어 있어야 할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워 있을 때 자고 쉬어야 할 아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성막에서 무를 꿇었다. 이 시대에 엘리들이 많은 것은 절망이지만 곳곳에 사무엘이 도사리고 있음은 희망이다. 이 어두운 시대를 사는 그대는 과연 누구인가?

시대의 무거운 짐을 져 나르는 아모스가 우리에게 없음은 통탄할 일이다. 하나님의 예표적 사랑을 실행할 호세아가 자취를 감추었음도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비극이다. 이사야처럼 나체로 활보할 이도, 에스겔처럼 오랜 날 동안 불편한 잠을 잘 이도, 예레미야처럼 간이 물처럼 흘러내릴 만큼 애통할 이도 보이지 않는다. 강렬한 풀무불 속을 거닐 친구들도 없고 목을 내걸고 의를 외친 세례요한의 후예도 없다. 있어야 할 이가 없음이 무섭도록 아프다.

죽음을 직면해 보았는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선 외로움과 두려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 기억이 삶을 진지하게 살아가게 만든다. 까마득한 옛 일이다. 고교 시절 담력 시험을 위해 친구와 함께 새벽 2시에 수백 개의 무덤이 있는 산을 향했다. 시체를 이장해서 비어 있는 관 속에 홀로 들어가 몸을 완전히 땅 속에 가라앉혔다. 그때 느꼈던 순간적 공포는 대단했다. 죽지 않을 것이면 죽을 만큼의 고통도 견뎌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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