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사'(직함)에서 '자명'(慈明)으로 불려지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내 이름이나 직함으로 불러지기 보단 아호를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자명’ 이라는 아호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내 본명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자명은 한국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문인협회에 정식 등록된 작가 명이기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본명처럼 사용해도 된다.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이름을 그냥 부르기 보다는 직함을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직장의 문화였다. 내가 사화생활을 하면서부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사람들이 “차 이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내 연령층보다 빨리 이사 직위에 올라 오랜 기간 이사 직함을 쓰다 보니 사람들은 내 이름이 이사이고 차가 성인 줄 아는 사람이 참 많았다. 이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연령층이 빨라야 40대 후반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기에 삼십을 갓 넘긴 나이에 이사라는 호칭보단 이름이라고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밀레니엄의 시대에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넷 시대가 도래되어 아호 자명을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나의 대명사는 자명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느 새 ‘차 이사’라는 나의 이름은 사라지고 ‘자명’으로 인식되기 시작 했고, 역시 자명이 내 본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내도 어디를 가나 자연스레 자명이라고 부르니까 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를 하는 게 어쩜 더 자연스런 현상일지 모른다. 내가 살아온 궤적을 되돌아보면 자주 만났던 그룹에 따라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크게 달라진다. 지금도 나를 기억할 때, 차이사로 기억하고 있는 그룹들은 대부분 업무와 연관된 사람들이고, 자명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투자활동이나 다도를 통해 또는 문학을 통해 인연을 맺어 온 사람들이다. 언론에 칼럼이나 작품을 게재할 때와 단체나 특정모임에서도 나는 ‘자명’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기에 이제는 내 본명이나 다름없다.
지인들과 아호를 사용하다보면 참 편하고 거리감이 없어 참 좋다. 다도를 통해 인연을 맺었거나 우리 차실에 자주 오는 지인들에게 아호를 지어주었다. 가까운 지인들은 나이나 직함, 종교적 호칭에 상관없이 다 아호를 사용하니까 만남에서 수평적이고 연령 차이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참 편하다. 누구엄마, 사모님, 사장님 대신 아호로 그 사람을 부르게 되니까 더 친근감도 느껴진다. 특히 여성들은 결혼하면서부터 자신의 이름대신 누구엄마나 사모님으로 대부분 부르는데, 아호를 사용하므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있고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어 좋다는 반응이다.
지금도 가끔 아호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 사람의 이미지와 가치관 같은 것을 나타내는 아호를 짓는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자신을 나타내는 대명사일 수도 있는 호를 지어준다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호는 그 사람의 성품과 직업,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 등을 고려하여 아호를 생각한다. 이미지가 강하거나 성격이 급한 분에게 온화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아호를 사용케 함으로써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면 좋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내성적이거나 차갑게 느껴지는 분에게는 보다 밝고 명랑한 이미지가 떠올려지는 의미를 두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분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가치관과 이상, 그 사람이 지니고 있으면 좋을 것 같은 카리스마와 어울릴 색깔 등을 반영하기도 한다. 젊은 친구들에게는 그가 목표하고 있는 야망과 미래지향적인 이상향을 호에 은유적으로 담기도 한다.
아호 '초성'(草星)과의 만남
내가 처음 사용했던 아호는 사실 ‘자명’이 아니었다. 처음 사용했던 아호는 초성(草星)이었다. 평소 존경하는 교수님이 내게 지어주셨는데,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풀처럼 나의 이상을 져버리지 말고 하나의 고독한 별로 떠 있으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하셨다. 그 호를 받았을 때, 내게는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고독한 별'이라는데 마음이 끌렸다. 설령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외롭고 가난할 길일지라도 나만의 분명한 색채를 지닌 그 고독한 길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초성이라는 아호를 잘 쓰지 않았지만 문학동아리와 몇 사회단체활동에서는 초성이라는 아호를 사용했기에 아직도 이 아호를 기억하는 지인들이 더러 있다.
'순명'(順命)으로 다가온 아호 '자명'(慈明)
인연이란 참으로 신비스럽고 묘한 데가 있어 우리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인연은 한 인간의 운명을 바꿔 놓는 알 수 없는 어떤 신비의 힘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국가적 큰 사건이나 개인적으로 큰 업적을 일궈낸 영웅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우연히 또는 필연적인 인연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를 대변하는 ‘자명’이라는 아호를 사용하게 된 사연도 참으로 묘한 인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여의도 금융가에서 근무할 당시 싱가포르에 있는 금융기관들과 교류가 많아 일주일이 멀다할 정도로 싱가포르에 자주 갔었다. 어느 날 투자은행을 방문했는데, 약속한 당사자가 급한 일이 생겨 한 시간 늦게 사무실에 들어온다는 메시지가 남겨있었다. 마땅히 갈 데가 없어 대기실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아가씨 한 명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여성들과 달리 차가우리만치 맑고 총명함을 금방 느낄 수 있는 어떤 예리함이 그녀의 첫 인상이었다. 먼저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말을 건넨 그는 계속 한국말로 몇 가지를 물으며 대화가 이어졌다. 나의 신분(펀드매니저)을 밝히자 자기가 한 때 가고자 했던 분야라고 하면서 내게 선뜻 악수를 청한 후 명함을 건네주며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한국적문화로 받아들이기엔 조금 당돌한 그녀의 행동에 처음 어색함이 없지 않았으나 나이에 비해 참 자연스러워 남자인 내가 내심 당황했었다. 그를 계기로 우리는 친해졌는데, 알고 보니 그 아가씨는 스님이었다. 같은 빌딩 아래층 중국계투자은행에서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한국에 아주 관심이 많아 한국말을 배우는 중이었고 우리 차(茶)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불교와 달리 싱가폴에 있는 스님들은 절에서 생활하면서 학교는 물론 직장을 갖고 있는 스님들도 많다고 한다. 더 친해진 우리는 그녀가 스님이 된 계기를 말해주었는데, 말을 이어가는 동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 나를 참 당황하게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는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났고 그녀의 생모는 미혼모였다고 한다. 당시 그녀가 생활하고 있었던 절의 주지 스님이 그녀를 싱가폴로 데리고 와 절에서 자랐고, 자연스레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소설 같기도 한 그녀의 아픈 과거를 들은 뒤로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에 대한 신비스러움과 그녀에 대한 연민으로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회계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금융공학을 공부했는데, 한 때 펀드매니저를 꿈꾸었으나 스님으로 살기에는 맞지 않아 포기했다고도 한다.
그녀와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는 딸 테레사와 함께 만나면서부터였다. 딸 테레사가 중 1학년 때, 싱가폴에 있는 미국국제학교에 입학을 하고 혼자 싱가폴로 건너가 그 곳에서 살고 있을 때다. 아내는 공무원으로, 나는 회사 일에 쫒기다 보니 테레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싱가폴에 있는 누군가 부모의 대리역할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테레사를 소개했고 그녀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과도 친해지기 전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부탁한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 자신의 호를 한국식으로 지어달라고 한 것이다. 호는 대부분 한문으로 짓고 그 문자가 뜻을 함유하고 있기에 한국식이라면 같은 한자라도 한국과 중국에서 쓰는 의미가 약간 다르다는 것이다.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오랜 고심 끝에 내가 지어준 호가 바로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자명(慈明)이다. 포용과 배품의 근간이 되는 사랑으로 살아가되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남기라는 뜻으로 그녀의 아호를 지었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 그 자체를 표현하고자 했지만 그녀가 꿈꾸고 있었던 한 인간으로써의 순수한 이상과 야망을 은연 중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종교인이라는 굴레와 한 인간으로써의 꿈과 자신의 정체성에서 방황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전통 한지에다가 유명한 서예가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쓴 아호 자명(慈明)을 받아 본 그녀는 호가 너무 좋다고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호텔 커피숍을 뛰쳐나갔다 눈물자국이 그대론 채 다시 들어와 감사합니다를 몇 번이고 되 뇌이던 모습이 어젠듯 생생히 아른거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캐나다로 정착하기 위해 몇 가지 정리를 위해 싱가폴로 갔을 때다. 우연히 안식휴가를 위해 예정에도 없었던 밴쿠버로 왔던 것이 계기가 되어 가족들도 따라오게 되면서 테레사도 싱가폴을 떠난 후였다. 나를 배웅 나온 그녀는 공항에서 줄 선물이 하나 있는데, 꼭 비행기 안에서 보라고 한다. 서툰 한국말과 영어를 번갈아 쓴 내용은 ‘자명’이라는 호는 자기에게 너무 크고, 아호에 맞게 자기는 살 수 없을 것 같아 이 호를 다시 돌려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초성(草星)이라는 호를 더 이상 쓰지 말고 꼭 지금부터 자명 이라는 호를 이름 대신 쓰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모시고 있는 큰 스님에게 나의 호 “초성”의 뜻을 풀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 설명을 들은 뒤로 초성이라는 호는 나에게 맞지 않다는 부연 설명도 끄트머리에 적어주었다.
호를 바꾼다는 게 결코 쉽지 않기에 한 동안 망설였지만 왠지 그 스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떠나질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스님이라는 신분이었기에 무언가 큰 의미를 담아서 내게 그 호를 권유했을 것이라는 어떤 신앙적인 믿은 같은 것도 없지 않았다.
불교는 나의 종교는 아니지만 유난히 스님 친구들이 많고 또 그들이 살아가는 단순한 삶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청년이었을 때, 앞이 보이지 않은 긴 터널을 건너는 동안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었다. 스님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것도 참 좋겠다는 생각에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탐독했고 여러 곳의 사찰을 찾아 다녔다. 차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글을 쓰는 스님으로부터였다. 어쩌면 나의 전생은 스님이었던지 최소한 불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 본다. 그녀의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하늘 길에서 그 허황했고 알 수 없는 쓸쓸한 마음을 떠 올리면 지금도 싸아하게 젖어드는 휑한 가슴을 어찌할 수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행의 길을 찾아 곧 인도로 떠난다는 그녀가 행여 다시 싱가폴로 돌아왔을까 하는 생각에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딸 테레사와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수없이 하였지만 끝내 소식이 없었다. 그 스님을 본 것은 싱가폴을 떠나오던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작가 칼럼니스트
●블루애플자산운용주식회사 CEO & CIO(투자총책임자)
●블루애플리츠펀드운용주식회사 CEO
●M&A 전문가(기업인수합병 및 기업평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