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신앙생활의 목적은 무엇일까?
(1)신앙생활의 목적은 영생을 얻는 것이다. 영생이 왜 중요한가? 인간에게 가장 두려움의 대상, 극복하지 못하는 대상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과 영생은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는 공포이고 불안이다.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슬픔이고 영원한 이별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나라와 사회와 계층 문화와 종교에 따라 다르다. 동일한 것은 있다. 죽음은 이 땅을 완전히 정리하는 것이다.
(2)성경은 죽음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죽음의 문제는 결코 뛰어넘지 못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의 문제부터 시작 한다. 죽음을 뛰어넘어 영원히 사는 영생의 문제를 다룬다. 기독교는 죽음을 피하는 종교가 아니라 죽음과 정면 승부하는 종교이다.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 종교이다.
(3)영생은 구원은 어떻게 받는가? 주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다른이름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이다. 주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요5:24). 또한 성경이 쓰여 진 목적이 무엇인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성경이 쓰여진 목적이다.
(4)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알게 된다. 성경을 모를 때는 예수님의 실체가 흐려보였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성경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점점 분명히 알게 된다. 희미하게 알게 되었던 예수님이 성경을 읽으면서 뚜렷하게 보인다. 성경을 읽으면 영혼의 불이 켜진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영혼이 어두웠는데 예수님을 알고부터는 영혼에 빛이 비춘다. 어둠이 떠나고 영혼에 밝은 빛이 임한다. 어둡고 침침한 빛에서 생명의 빛이 비춘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야할 이유와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안보였는데 길이 환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비전과 사명과 내가 서야할 자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묵묵히 헌신의 시간을 보낸다. 주님을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져서 하나님이 부르신 곳을 향해 달려간다.
2.분문연구
죽음의 문제와 죽음을 극복한 제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인가?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쳐주고 있다.
1)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1)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율법사는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율법사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는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율법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자기의 성경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교만이 꽉 들어차있다. 그리고 성경지식으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고 골탕먹이려는 수작이다.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가 불순하다. 우리가 성경을 다할 때 의도나 동기가 불순하면 안된다. 영생의 문제를 말하면서 의도가 불순하면, 이미 방향이 정해졌기에 결과는 눈에 보이듯 뻔하다. 동기의 순수성이 중요하다.
(2)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이론을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사에게 물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네가 성경을 어떻게 읽었느냐?”(26절). 율법사의 대답은 완벽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예수님이 짧게 대답합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
이렇게 진리는 간단하며 정곡을 찌른다. 너가 성경의 진리를 알았다면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라. 기독교는 말씀을 실천하는 종교이다. 제가 자주 쓰는 문장이 있다. 1ton의 지식보다 1g의 실천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다. 말씀의 종교를 뛰어넘어 삶으로 살아내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살아있는 종교이다. 말씀의 진리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쏟아내는 살아있는 신앙이 기독교이다.
2)내 이웃은 누구입니까?(29절)
예수님은 여리고에서 강도만난자의 비유로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가르쳤다. 예수님이 왜 이 비유를 가져왔을까? 참된 종교인과 거짓 종교인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무늬만 종교인과 속사람이 종교인의 차이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바울사도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표면적인 유대인과 내면적인 유대인의 차이점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1)거짓 종교인 표상(제사장과 레위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인이다, 두 사람은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갔다. 종교지도자는 누구든지 고난당하는 자를 만나면 인도주의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당연한 모습이다. 그런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피해서 지나갔다. 종교인들은 인종적 편견이나 율법의 얽매이지 말고 인도주의적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종교인들의 행동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역할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한달란트다. 생명에는 등급이 없다. 모든 분들의 생명은 다 소중하다. 그런데 종교인들이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피해서 갔다.
(2)참된 종교인의 표상(사마리아인): 여행중에 있던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 고난 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구원받은 제자들이 가져야할 마음이다. 오랜 종교생활로 인해 오히려 마음이 굳어져 있거나 이웃에 대해 냉담하거나 사람을 등급메기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자세는 아니다.
●사마리아인은 구체적인 돌봄(34-35절):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마음만 불쌍하게 여긴 것이 아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왔다. 시간을 내어주었다. 구체적인 케어를 했다.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주막으로 옮겼다. 현장에서 응급처치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환자 가족을 대신해서 밤새도록 직접 간호했다. 강도만난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그리고 환자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오늘날 언어로 말한다면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고, 추가 비용은 자신이 내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껍데기 신앙인과 참된 신앙인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껍데기 종교인은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가 없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이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오직 자기의 편리함과 누림의 이야기만 있다. 이것은 감동이 없다. 하늘에 어떤 보물도 쌓지 못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체적인 돌봄의 이야기가 있다. 신앙의 이야기가 있다. 이런 믿음의 이야기가 세상을 살맛나게 하는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기독인들이 자기의 믿음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자기 믿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부모의 믿음도 소중하다. 교회가 하는 믿음의 이야기도 소중하다. 그런데 그곳에 자신의 믿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3)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_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냐? 바로 사마리아인이다. 기독인들은 강도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다. 기독인들이 걸어가야할 사명이다. 사명은 항상 현장에 있다. 사명은 이론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명은 항상 현장에서 강도만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에게 늘 요구하시는 질문”이 있다. “네가 성도들의 아픔을 볼 수 있느냐?” 의지의 대상이 아무도 없는 버려진 그들을 마음으로 품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늘 던지신다. 삶의 현장에서 늘 고민하는 지점이다. 목회란 무엇인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문장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주제이며 방향이다. 종교인의 껍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참된 종교인은 누구인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리더이다. 많은 분들이 비전과 거창한 사명을 말한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람의 몸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리고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셨다. 마지막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 던져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항상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건물을 세우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바벨탑을 세워서 인류의 흩어짐을 막고 우리의 이름을 만천하에 내고자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초점은 건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느냐? 끊임없이 질문하셨고, 그 질문을 우리가 이어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리더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토마스 머튼(1815-1968)의 영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내적인 흥미와 자신의 영적 회복에만 집착’ 하는 것을 ‘영적인 정욕’이라고 부른다. 심지어는 ‘자신들이야말로 거룩한 사람’이라고 믿지만 ‘가장 비열하고 사악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한다. 종교를 통하여 점잖게 내적 평안이나 갈등 해결을 추구하는 것은 사기는 아니지만 머튼에 의하면 초보적 수준이요 고작해야 영적 게으름에 빠지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야할 내용이다. 오늘날 ‘거짓영성’이 판친다. 현란한 언어껍질을 깨고 본질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그 본질이란 말씀을 삶의 자리에서 살아내는 것이다. 사명의 길에서 헌신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헌신은 무엇인가?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내가 만난 예수님을 사명의 장에서 묵묵히 살아낼 때 진짜 영성이 회복된다. 거짓영성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의 종착역이 다가온다. 그때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것, 본질은 버리고 껍질만 붙들고 살았던 모습이 한 없이 부끄러운 후회로 남는다. 눈물을 흘려도 그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말세를 살아가고 있다. 가서 너희도 이와같이 하라.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거짓 영성의 껍질에서 벗어나라. 교회가 세상에 보여줄 자산은 온전한 헌신과 순종의 모습이다. 나의 육체는 시간이 흐르면서 낡아지고 사그러진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살아냈던 아름다운 헌신은 더욱 영롱한 빛으로 사람들의 영혼에 믿음의 보석들을 남긴다. 이것이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남겨야할 진짜 유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