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신학 요약
1️⃣ 생애와 사상적 배경
칼 라너는 현대 가톨릭 신학의 중심 인물로, 칸트, 마레샬,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초월적 실존철학을 신학에 도입했습니다.
그의 초기 저서 『세계 내 정신(Geist in Welt)』 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초월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자문으로 참여하여, 전통적 교리 대신 종교다원주의와 보편구원론의 방향을 강화했습니다.
2️⃣ 고전 기독론 부정
라너는 니케아–칼케돈의 전통 기독론(하강기독론)을 “신화적 표현”으로 보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과 대속적 죽음을 부정하며, 예수의 죽음을 “사랑의 사건”으로만 해석했습니다. 결국 그는 성육신 교리와 삼위일체 이해를 사실상 해체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사도들의 신앙 판단일 뿐이다.”
— 『그리스도론』, p.71
3️⃣ 상승 기독론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라너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하강적 이해 대신, “인간 안에서 신성이 드러난다”는 상승 기독론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적 자각과 존재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초월적–존재론적 기독론입니다.
그에게 예수는 위에서 내려온 신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완전히 개방한 인간으로서 신적 실재를 드러낸 사람입니다.
이는 인간 중심의 신학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를 흐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4️⃣ 익명의 그리스도인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사랑과 선의로 살아가는 자는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상을 통해 종교 간 구원 가능성 (유대인·이슬람·이교도 등). 선교의 필요성 축소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비그리스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기독교 복음의 독특성을 약화시키고, “전도와 선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5️⃣ 신학적 평가 — 기독교 해체
라너의 신학은 전통적 기독교 교리(성육신, 삼위일체, 구속, 부활)를
철학적 인간학으로 대체했습니다.
그의 신학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했으며, 결국 기독교를 초월적 인문주의로 바꾸었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요약하면, 라너의 신학은
“초월철학적 인간론으로 신학을 해석한 결과, 기독교의 본질을 해체한 사상” 으로 평가받습니다.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현대 가톨릭의 최대 신학자로 일컬어진다. 라너는 그의 아버지 칼 요셉 에리히 라너와 어머니 루이제 라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2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2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임마누엘 칸트 등을 공부했고 요셉 마레샬의 초월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라너는 1933년 사제 수품과 예수회 양성과정을 마치고, 1934년 프라이부르크대에서 마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개념을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유한적 인식의 형이상학: 칸트, 마레샬, 하이데거의 개념을 이용한 해석”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으나 거절되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대학 신학 교수가 됐고, 탈락된 논문은 1939년에「세계 내 정신」(Geist in Welt)으로 출간됐다. 그는 1962-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자문으로 참가하여 종교다원주의를 교리로 결정하여 가톨릭을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와 같게 했다. 1970년 인스브루크대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4년 3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작은 16권의 「신학적 탐구」 (Schriften zur Theologie [1954–1984]; Theological Investigations)라 할 수 있다. 그는「그리스도론: 조직신학적 및 주석신학적 탐구」(Christologie, systematisch und exegetisch), 조규만, 조규홍 공역(서울: 가톨릭 출판사, 2016)에서 조직신학적으로, 공저자 빌헬름 튀징(Wilhlem Thusing)은 주석 신학적으로 탐구하였다. 우리는 이 책에 근거하여 그의 신학적 특징을 간단히 제시하려 한다.
1. 고전 기독론 부정
칼 라너는 고전 기독론과 신약성경의 기독론을 구분하면서 둘 다 부정한다(「그리스도론: 조직신학적 및 주석신학적 탐구」, 61). 그가 말하는 고전 기독론은 ‘하강-강생 교리’이고(같은 책, 97), 325년과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과 451년의 칼케돈 신경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고전 기독론은 한계가 있기에 그 한계에 관하여 논의할 수 있고, 더구나 고전 기독론이 신화적인 상상에 따른 것이다(같은 책, 95, 97). 이러한 주장은 라너가 고전 기독론을 부정하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라너가 신약성경을 후기 신약성경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현재의 신약성경이 고대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현대의 비평적 자유주의 신학의 결과를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라너는 고전 기독론과 신약성경의 기독론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같은 책, 95).
이에 따라 칼 라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정한다. “빈 무덤 사화 하나만으로 부활의 의미와 실체가 결코 입증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과 관련하여 어떤 전승층에 이 빈 무덤 사화가 속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는 거기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하는 질문은 일찌감치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고 보거니와 여기서도 조용히 지나칠 수 있다” (같은 책, 64). “예수의 부활을 사도들이 본 것은 환시일 뿐이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 부활의 환시자들이다 그것은 신앙 판단의 전형일 뿐이다. 사도들의 부활에 대한 증언 역시 신뢰할만한 것이 못 된다” (같은 책, 71).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은 부활 희망일 뿐이다” (같은 책, 73). “부활 체험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지 그 어떤 체험 자체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같은 책, 75). “만일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어떤 정황들만을 역사의 고유한 구성요소로 한정하여 이해하고는 우리의 시공간적인 혹은 일상적인 경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역사 안에서 또다시 종종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예수 부활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인 사건일 수 없으며 또 그렇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명하다” (같은 책, 76). “예수의 죽음은 희생제물도 아니고, 대속적인 죽음도 아니다” (8같은 책, 4). “고전 강생-그리스도론은 명시적으로 표현하는 그 자체의 형식을 따라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이 갖는 구원사적인 의미를 불분명하게 그리고 간접적으로만 소개한다” (같은 책, 102). 따라서 라너는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구속적 의미를 말하지 않고 사랑의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책, 123). 이러한 라너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인격과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부정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2. 상승 기독론 주장
고전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 곧 하강 기독론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하나님의 성육신 교리이다. 라너는 이 성육신 교리를 부정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명제는 주사 (主辭)와 빈사 (賓辭)의 관계를 직접 명시적으로 말해주는 바가 없다는 설명으로 고전 기독론을 부정한다 (같은 책, 98).
라너는 칼케돈 신경의 ‘나뉘지 않는다’와 ‘뒤섞이지 않는다’는 표현에 대하여 단성론적으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였다 (같은 책, 98). 칼케돈 신경은 오히려 단성론을 정죄하고 두 본성의 한 인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너는 칼케돈 신경을 신화적 사상으로 취급한다 (같은 책, 99).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거나 그분께서 “현현하셨다”는 표현 자체는 신화적인 용어들이다 (같은 책, 100).
이처럼 라너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교리 혹은 하강 강생 교리가 신화적으로 따져 생각했던 시기에 유일한 관점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강생하신 말씀이요 우리에게 하강한 말씀이라는 그리스도의 강생 교리는 신화이다. 이것은 그저 신앙일 뿐이지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책, 97).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가르침은 신화이고 칼케돈의 기독론도 신화적이고, 하나님이 내려오셨다거나 그분께서 현현하셨다는 표현은 신화이다 (같은 책, 100). 고전 강생 그리스도론에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구원사적인 의미에 불분명한 면이 있다 (같은 책, 102). 그래서 라너는 하강 기독론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라너는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기독론’ 곧 상승 기독론을 주장한다 (같은 책, 114). 라너가 시도한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새로운 기독론이다 (같은 책, 103). 이 새로운 기독론은 ‘초월-기독론’, ‘찾아가는 기독론’ (같은 책, 104-7), ‘자각-기독론’ 그리고 ‘존재적 기독론’ 더 나아가 ‘존재론적 기독론’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책, 112). 이 존재론적 기독론의 전제조건은 그의 존재와 의식이 최종적인 이해 안에서 동일하다는 통찰이다. 사유하는 정신과 사유하는 존재는 같다는 차원에서 통찰되어야 한다. 존재와 참됨은 서로 호환된다. 어떤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한, 그것을 사유하는 정신과 실재하는 그것은 같다 (같은 책, 112-3). 이 존재론적 기독론에서 존재적 기독론과 자각-기독론과 초월 기독론이 해명될 수 있다 (같은 책, 113). 이러한 입장이 상승기독론 곧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에 요구된다 (같은 책, 114).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은 요점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복된 직관에 대한 자연적인 바람을 가진 존재이다. 그 질서는 인간의 궁극적인 본질을 경험하는 인간의 질서이다. 그로부터 절대적인 구원사건과 절대적인 구세주 개념이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강생 교리를 정확하게 말할 것이다 (같은 책, 114-7).
라너의 이러한 상승기독론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너는 상승기독론과 하강기독론이 하나됨을 만들어야 한다는 괴이한 주장을 한다 (같은 책, 120).
3. 익명의 그리스도인
익명의 그리스도론은 ‘찾아나서는 그리스도론’(suchende Christologie)이다(같은 책, 106-7). ‘찾아나서는 기독론’이란 예수가 아닌 신앙인이 어떤 경우에든 찾게 되는 데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공동체에게 신앙의 행위로 정당화시키는 것이다(같은 책, 107). 이러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밝히는 데는 세 가지 소환의 시도가 있다.
(1) 절대적인 이웃 사랑에로의 소환이다. 이 사랑은 위로부터의 사랑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사랑이다. 여기서 마태복음 25장이 소개하는 지극히 작은 자에 대한 사랑을 해석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과시적이거나 주고받는 이해타산적인 사랑이 아니라 일종의 절대적인 사랑이다(같은 책, 107). 이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하나 됨을 지향한다(같은 책, 108). 이런 사랑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이 되도록 스스로 구체화하고, 그로써 신인(神人)은 하나의 인간성 안에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의 절대성을 가능하게 한다(같은 책, 109).
(2) 죽음을 앞둔 대비에로의 소환이다. 죽음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죽음 안에서 자유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실현한다. 자유를 실현하는 과정은 죽음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죽음에 대한 철저한 무기력 앞에서 받아들임과 기꺼운 응답이 함축된다. 여기서 능동적인 행위와 무기력한 고통 사이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해소된다. 이것은 죽음의 실재성과 엮어짐으로써 고양되는 것이다(같은 책, 110).
(3) 미래를 향한 희망에로의 소환이다. 인간은 계획을 세우면서 미래와 마주하기를 희망한다. 미래를 향한 그의 발걸음은 미래에 누가 되고자 하며, 누가 되어야 바람직할 지 그 간격을 최소화함을 의미한다(같은 책, 110-1). 영원히 멀리 있는 목표는 절대적인 미래에나 도달할 수 있는 목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이고, 절대적인 화해는 우리 바깥에 있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일 것이다. 이러한 희망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세상 역사의 절대적 미래인 하나님의 도래를 보장하는 열쇠일 것이다(같은 책, 111).
이러한 세 가지 소환을 통하여 인간은 절대적인 구세주를 전망하고 구세주가 이미 도래했거나 구제주가 미구에 나타날 것임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여 혹은 은총에 힘입어 마침내 스스로 현존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긍정적으로 고백할 것이다(같은 책, 111).
그러면 라너가 말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고, 비기독교인이나 무신론자 중에, 하나님의 구원 은총을 받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봐야 하는 이교도가 있을 수 있고, 자신이 기독교인인 줄 모르는 기독교인이 있을 수 있다. 라너는 이러한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을 1962-65년 제2차 바티칸 공회의 문헌 중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2장 하나님의 백성의 16절 교회와 비그리스도인에서 표현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유대교인들과 무슬림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이고, 무당을 포함한 일반 종교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에 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965년 이후 천주교에서는 그때까지 금했던 조상제사를 허용했다. 그러면 그 이전에 조상숭배 반대로 순교한 자들의 의미가 없게 되는데, 그 100여 명을 성인으로 추대한 것은 커다란 모순과 무지라 할 수 있다.
4. 기독교 해체
이상에서 간단히 살펴본 바에 따르면 칼 라너의 신학은 현대 로마교회 혹은 천주교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라너는 성경의 고전 기독론을 부정하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기본인 상승 기독론과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해체하는 신학적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부정되었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의 주장대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전도와 선교 그리고 기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우리가 동의할 수는 없다.
정규철 박사.
현) 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예수인교회 협동목사
총신대학교와 동 신학대학원 졸업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조직신학 Th.M. Ph.D)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신약신학 Ph.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