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하나님앞에 헌신이란 무엇인가? 헌신의 깊이를 알게 해 주는 귀한 말씀이다.
(1)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6절)
마태복음 저자는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고 표현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 어떤 사람이 청년이라고 한다(마19:20).
마가복음의 저자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했다고 한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어떤 관리가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오늘 본문은 공간복음서에 다 기록된 말씀이다. 예수님께 와서 질문한 사람이 누구인가? 청년이며 관리였고, 그리고 재물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영생이란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정도로 지식이 있는 분이다. 영생이란 단어를 알 정도라면 그는 분명히 종교인이었을 것이다. 세상것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생이란 단어를 이해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관원이며 청년이 상당한 수준의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던 지적인 사람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 청년관원은 영생을 알 정도로 상당한 종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어쩌면 교회에서 칭찬받고, 멋진 청년이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요, 여성들과 어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철저한 종교인으로 살았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주님을 찾아온 것이다.
(2)주님이 청년에게 물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청년은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을 다 지켰다고 한다(마19:20, 막10:20).
모세의 십계명이 무엇인지 다 알고 어려서부터 다 지킨 사람이다. 빈틈이 없는 반듯한 청년이었습다. 성실한 청년이었다.
젊은이들이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잘 드리고,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생활도 모범적으로 하는 청년들을 보면 너무도 기쁘고 대견하며 고맙기도 하다. 이렇게 성실한 청년들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청년 공무원은 대단한 종교인이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문제 제기를 한다.
(3)모든 것을 다 팔아 이웃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9:22).
우리의 생각에는 더 이상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신앙인으로 생각했는데, 주님은 네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다. 네가 “온전하지 않다”고 하셨다.
●네게 있는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 길은 모든 것을 버리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나의 삶의 중심에 주님만이 오로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헌신이다. 주님은 이 관원에게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신다. 99%가 아니라 100%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적당주의가 신앙을 타락으로 이끄는 요소이다. 적당하게 하는 헌신은 오히려 자신의 삶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적당주의는 곧 타락이다. 하나님의 통치 질서를 수용하지 않는 불신앙이다.
우리는 날마다 나의 저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봐야 한다. 다른 성도들과 비교해서 내가 조금 낫다고 생각해서 나는 괜찮은 신앙인이라는 것에 만족하지 마라.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요인이 되기 쉽다. 항상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스스로 높아지고, 스스로 잘 난체하며, 스스로 웅덩이에 빠지게 된다. 신앙의 적당주의는 우리가 경계해야하는 늪이다.
●주님은 완전한 헌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다.
⓵주님은 자기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셨다(빌2:5-11). 예수님은 자기의 권리를 철저히 포기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자신의 전부를 헌신했던 예수님을 하나님은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그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름으로 세워주셨다. 그의 이름앞에 모든 만물들이 무릎을 끊게 하셨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하셨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철저히 죽읍시다. 우리가 철저하게 주님께 헌신을 하십시다. 그러면 오히려 삽니다. 지금 위기가 찾아왔다.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있다. 주님앞에 더 드리십시오. 주님앞에 기도의 시간, 말씀을 읽는 시간을 더 드리십시오. 주님께 더 통큰 헌신을 하십시오. 이것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헌신이란 무엇인가? 부담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기에 드리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아버지것이다. 왜 사람들이 헌신의 양이 적은 줄 아는가?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헌신이란 자신의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이다. 다윗은 온 회중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다. 모든 것이 주의 손안에 있다고 고백한다. 부와 명예도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다윗은 고백 하기를,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셨기에 감사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께 받은 것을 드린다고 한다. 할렐루야. 이것이 완전한 헌신이다.
⓶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모든 권리를 일임하셨다.
주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나의 통치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일임하셨다.
다니엘과 친구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헌신했다. 그결과 이방나라에 하나님의 기적을 전하였다. 하나님께서 풀무불가운데서 이들을 지켜주셨다.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았고, 겉옷 색깔도 변하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렸고 감옥에 갇혔다. 요셉은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겼다.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겼다. 그 결과 고난을 뚫고 일어나 애굽에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다.
믿음의 사람들은 다 자기의 권리를 하나님에게 일임하고 순종하였다. 이것이 헌신이다.
⓷온전한 헌신은 결과가 아름답다. 하늘의 보화가 있다(21절).
이 땅에서 아름다운 헌신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이다.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했다. 그러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다고 하셨다.
오늘 부자청년관원은 다른 것들은 다 합격점의 인생을 살았는데, 주님이 100% 온전히 헌신하라고 하니까? 재물로 인해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이 청년은 재물이 더 귀했기에 영생을 포기한 것이다.
완전한 헌신을 포기하고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이 부자청년공무원처럼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오늘 말씀을 읽고 마음에 신바람이 나면 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을 것이다. 또한 주님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고민이 되고, 근심이 되고, 기분이 상하고, 마음이 편하지 아니하면 믿음의 씨앗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드린 우리의 모든 봉사는 반드시 때가 되면 주님이 값아주신다. 하나님이 다 계산해준다.
⓸재물을 의지하는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이 부자관원청년을 보시면서 한 마디 하셨다. 영생을 알정도로 종교적지식과 영적 목마름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마지막 결단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청년을 보시면서 안타까워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재물)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3,24).
청년은 영생보다 재물이 더 중요했기에 포기한 것이다. 청년의 가치이다. 이렇게 가치가 중요하다. 내면의 가치는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제자들이 말한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반듯한 청년도, 직업도 분명한 청년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26절). 아멘. 이것이 답이다.
사람은 못한다. 지혜도 한계가 있고, 지식도, 물질도, 감정도, 능력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다. 창조주이시다. 그분에게는 불가능이 없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좁은 식견에 가두지 마라. 성령님은 모든 것을 다 가능하게 하신다. 이것이 기독교의 능력이다.
옆에 있던 베드로가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온전히 헌신한 나의 미래는 어떻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28-30).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것인가? 아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이다.
우선순위가 분명한 제자들을 하나님은 축복하신다(29절).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100배)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온전한 헌신을 통해서만 세워진다. 하나님은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찾지 않는다. 자신의 전부를 주님께 내어드리는 사람들과 일을 하신다. 그런분에게 자신의 전부를 맡기신다. 적당주는 신앙의 독이다. 예수님에게 자신의 전부를 걸고 드리고 섬겨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모두가 보게 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 할일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