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에 대한 1시간 32분짜리 독일어 기록 영화: https://www.bibeltv.de/mediathek/videos/bonhoeffer-614685

일러두기: 해설에 "9:50"과 같은 숫자는 비디오가 방영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이러한 종류의 영상물은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경향성을 띨 수 있으므로 조심해서 들어야 한다. 편집자가 신학자가 아니므로 내용에 가끔식 오류도 있는데, 내가 발견하는 대로 수정했다.

본회퍼는 누구인가? 동시대 사람들도,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에게 관심을 두고 연구함에도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본회퍼 자신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잘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단 한 가지 분명히 아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이다.

본회퍼에 대해 2019년에 기념비적인 기록 영상물을 만들었다. 올해 본회퍼가 죽은 날(4월 9일)을 기념하고자 기독교 방송에서 재방영한 것을 내가 보았다. 이 기록 영화는 신앙적 관점에서 제작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잘된 편이다. 그의 신학적인 형성 과정(Werdegang)을 통해 그의 신학의 삶의 자리를 잘 볼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이를 통해 본회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본회퍼 연구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내가 들으면서 중요한 것을 번역했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내가 별도로 보충했다. 특히 당시 본회퍼에게 배웠던 학생들의 증언도 중요하다. 본회퍼 유고를 모아서 책으로 발행한 베트게의 증언도 들을 수 있다.

문제는 시청자가 이곳에서 말한 본회퍼 전문가들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는 점이다. 비록 그들의 통찰이 객관성이 있고 깊이가 있지만 모두 받아들여야 할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히틀러, 괴벨스가 연설하는 것도, 독일 국민이 열광하는 것도, 군인들이 열병하는 것도 보고 들을 수 있다. 유명한 해방신학자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몇 번 등장하는 것을 보아서도 해방신학자들이 본회퍼를 자기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본회퍼는 독일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 그룹에 들어간다. 그는 개신교도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 신도로부터도 존경받고, 보수 신자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신 죽음 신학자, 해방 신학자들도 그를 존경한다. 흥미있는 것은 이들 모두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글은 대체로 단편적이라서 신학적 체계를 남기지 않았음에도, 많은 신학적인 자극(impuls)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깊은 신학적 통찰을 맛본 사람은 그에 대한 매력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은 대부분 그의 글을 통해 영감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나도 그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본회퍼는 누구인가? 정통신학자인가? 자유주의자, 혹은 신정통주의자인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아무 데도 속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그는 “그리스도는 누구신지”,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를 매우 심오하게 깨달았다는 것이고, 그는 항상 하나님을 찾았으며, 자기 신앙과 양심을 다해서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투쟁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명히 여러 가지 과오를 범했다. 그의 말년의 신학(옥중서한)은 괴물과도 같다. 그는 죽기 전에 당시의 모든 신학을(불트만까지도) 포용하는 거대한 신학적 건물을 구상하고 있엇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하려고 했는지는 그의 삶과 당시 형편을 잘 알아야 이해된다. 당시 독일에 정통 신학자는 거의 없었다. 칼 바르트가 신학을 구원했다고 믿었을 때이다. 그가 튀빙엔 대학에서 배운 쉴라터와 칼 하임은 분명히 매우 훌륭한 신학자였고, 보수 신학자들이 그들로부터 배워야 하고 나도 존경하지만, 오늘날 정통 신학의 잣대에는 맞지 않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본회퍼가 시대정신과 당시 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이상한 글은 주로 감옥에서 쓴 것이다.

우리가 물론 그의 잘못을 잘 비판해야 하지만, 그가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확고하게 믿고 성경 말씀 그대로 살려고 투쟁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특히 당시에 그런 신학자는 보기 어렵다. 우리는 그의 과오를 분명히 인정하되 그를 관대하게 보아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글에서 우리가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깊은 경건함과 성경 이해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젊어서 쓴 “Nachfolge”(나를 따르라)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다. 당시에 그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과 똑같았다. 이 책은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몇 년간 신앙적으로 사경을 해메일 때 나를 살리는 양식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 여러분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어 번역은 어떤지 내가 장담할 수 없다. 그의 글은 유감스럽게 한국어로 번역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을 번역한 이신건 교수는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이 책은 영어로도 잘 번역이 되지 않는다.

내가 본회퍼의 심오한 신학 사상을 한국 신자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마음먹고 그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20대부터 그의 신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마침 이 영상물을 보게 되어 자극을 받아 핵심적인 것을 번역하고 중요한 것을 보충함으로써 본회퍼를 소개한다. 영상물 거의 끝에 본회퍼의 “나는 누구인가”가 나오는데, 이것을 번역해서 먼저 싣는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내 감방에서 나올 때
어찌 그렇게 여유롭고 명랑하고 분명한 발걸음으로 나오는지
마치 영주가 자기 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를 지키는 간수들과
어찌 그렇게 자유롭고 상냥하고 분명하게 말하는지
마치 내가 그들을 명령하는 것 같다고.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불행의 나날들을
태연하게 웃으면서 당당하게 보내기를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 같다고.

나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하는 그 사람인가?
아니면 나 혼자 알고 있는 단지 그 사람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해하고 갈망하고 병든 나,
누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이 숨을 쉬려고 바둥거리는 나,
색갈과 꽃과 새들의 노래를 갈망하고
좋은 말 듣기와 인간의 따뜻함을 갈망하고
전횡에 대한 분노에, 그리고 조그마한 무례함에도 분노에 떨며
큰일을 기다리면서 근심하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을 위해 걱정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기도하고 생각하고 일하기에는 너무나 피곤하고 마음이 비어있고
녹초가 되어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그런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전자인가 아니면 후자인가?
나는 동시에 같은 사람인가? 사람 앞에서는 위선자이지만
나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만하게 애달픈 소리를 잘하는 연약한 자인가?
아니면 내 안에 아직 있는 패배한 군대와 같은가?
이미 얻은 승리 앞에서 무질서하게 도주하는.

나는 누구인가?
고독한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나를 조롱한다.
내가 누구든 간에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는 당신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글을 보면 온종일 성경을 생각하며, 그리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묵상한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보기를 권한다)

영상물 내용:

Dietrich Bonhoeffer(1906-1945).
아버지 칼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의 유명한 정신과 교수이며, 어머니는 프로이센 귀족이었다. 8남매 중 사비네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났다. 그는 사비네보다 먼저 태어났으므로 여섯째가 되었다. 그 가족은 사회적으로는 Grossbuergertum(상류층 시민계급)에 속했다.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했다: 교회를 포함한 전 국민이 황제의 전쟁 정책을 옹호했다. 이들은 황제의 선동을 받아, 주변국들이 자기들의 성장을 저지하려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도 전쟁에서 하나님이 자기들 편이라고 확고하게 믿었다(쉴라터와 같은 대 신학자도 전쟁을 지원했다). 본회퍼 형이 자발적으로(당시 18세) 1차대전에 참전한 지 단 2주 후에 전사했다. 수백만의 전사자를 내고 수많은 꽃다운 젊은이가 상이군인이 되어 돌아왔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위선적 집단(Scheinheilige)으로 생각했다(교회가 전쟁을 지원하고 하나님이 독일을 도우신다고 선전했으므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고 교회는 사람들의 지원을 잃었다. (당시 교회는 문화신교주의, 자유주의 등의 영향으로 대부분 신자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본회퍼가 오랫동안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진정한 신앙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생각과 삶이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본회퍼도 이러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배울 것이 많이 있다).
그 후 본회퍼는 점차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형의 죽음이 본회퍼가 신학을 공부하려고 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독일이 패망하자 이들이 절대 전쟁 일으키지 못하도록, 베르사유 협정에서 독일에 가혹한 배상 책임을 지웠다. 그런데 이것이 역효과를 가지고 왔다. 독일 국민은 이들이 자기를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다. 황제는 전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는데, 정부가 너무 연약했다.
아버지는 바이마르 정권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새롭게 등장한 히틀러를 믿지 않았다. 가족은 매우 보수적이었으나(자기의 가치관을 꼭 붙드는 사람), 오픈된 사람들이었다. 본회퍼도 처음부터 나찌를 믿지 않았다.

가족도 그리고 본회퍼도 교회를 잘 다니지 않았다. 당시 교회는 하나의 모임에 불과했다. 교인들 서로 간의 관계도 깊지 못했다. 목사들은 깊은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그는 1924년에 베를린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보충: 그는 1923년(17세)에 튀빙엔에서 신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아돌프 쉴라터와 칼 하임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한 학기를 로마에서 공부하고 1924-1927년 베를린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마친다. 1929-1930에 베를린에서 조교 생활을 하면서 교수자격논문을 썼다.)

당시 신학은 1차대전의 끔찍한 사건을 두고 사람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성찰되고 있었다. 이때 젊은 스위스 신학자 칼 바르트가 등장했다(9:50). 그는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는 하나님을 근거 대기(auf Gott berufen)를 했다고 한다. 독일, 프랑스, 영국의 하나님이 모두 다른가(1618-1648의 30년 전쟁에서도 제기되었던 문제)? 바르트는 하나님 말씀이 모든 인간 행동의 가장 위에 서야 한다(Gottes Wort als oberstes Gesetz)고 했다. 인간의 교만(Anmassung des Menschen; 인간의 주제넘음)… 본회퍼는 그러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는 21세에 박사학위를 summa cum laude (최 우등상, 상위 5%)로 받았다(그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석사와 함께 박사학위도 마쳤다. 이 모든 과정이 4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학위 제목은 Sanctorum Communio(성도의 교제)였다. 그리스도는 단지 성도의 교제로서 존재한다(Christus existiert allein als Gemeinschaft). 그런데 교회가 부르조아적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사라지고 시민들이 교회를 차지했다. 교제가 이렇게 분리되면 그리스도도 분리된다. 본회퍼는 교회의 교제보다 인간의 교제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리스도인은 인간 세계에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성을 원하신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해야 한다(12:10 이하를 요약한 것).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임무는 국민 사이에서 일어나는, 계속 성장하는 불만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

1920년 대에 독일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때 교회가 역할을 못했다. 이때 나찌가 등장했다. 지도자들도 노동자들도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시민들은 그 혼란한 시대에 강력하고 권위적인 지도자를 원했다. (당시 한끼 식사 가격이 10억 마르크였다. 나에게 당시 화폐 50억 마르크 짜리가 있다. 1929년 10월 3일 뉴욕 증시에게 주가가 폭락함으로써 경제 공황이 시작했다. 독일도 당연히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독일인이 나치당을 지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본회퍼의 한 학생이 증언: 자기도 젊어서 나찌당(NSDAP)에 가입했고, 히틀러를 존경했고 그에게 희망을 걸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희망을 걸고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본회퍼는 1930년(독일에서 신학 수업을 마치고 2차 국가고시도 마친 후에)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다. 그곳에서 라인홀드 니버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사회 윤리학(social ethics)의 아버지이다. 미국의 사회 부조리 비판, 실제적인 제안. 그는 자주 흑인 신학자들을 인용했다. 이것은 획기적이었다.
본회퍼는 처음에 그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니버에게는 칼 바르트와 같은 그리스도 중심 사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신학과 윤리의 의의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것(Die Welt positiv zu aendern)을 깨닫게 되었다.

흑인 학생을 통해 할렘의 흑인 교회를 알게 되다. 상당히 큰 교회, 교회 건물 규모가 백인 교회에 뒤지지 않는다. 이들이 이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곳에서 유명한 백인 목사(파울)가 목회했다. 본회퍼는 독일인 예배와 전혀 달리 감정적으로 예배를 보는 것을 좋게 평가하게 되었다. 파울 목사가 성경적이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에 인상을 받았다. 본회퍼는 죄와 은혜와 사랑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의 설교에는 큰 능력이 있었다: „흑인 그리스도가(der schwarze Christus) 정열적으로 설교했다.“

유니언 신학교에서 평화주의자 프랑스 친구 쟝 라세르(Jean Lasserre)를 만났다.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 중에서도 우정이 계속되었다. 라세르는 결코 예수님의 몸이 분열되어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독일 교회와 프랑스의 교회는 하나이다). 전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지금까지 교회의 문제는, 자기 국가를 방어하는 데에는 성경 가르침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가르친 데에 있다. 라세르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본회퍼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본회퍼는 라세르가 산상수훈을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에 설득당했다. 당시까지는 그 가르침은 단지 우리의 이상이며 죄를 밝히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만 이해했다. 이것이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에게는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었다.

당시 독일에는 7백만이 실업자였으며, 천오백만 – 이천만 독일인이 배고픔을 겪었다. 여기에서 해야할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교회는 이제 아주 다르게 말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1931년 여름에 그는 미국을 떠나 독일로 갔다.

정리자 추가부분
◇ 본회퍼의 회심: 그는 31-32년에 강의도 하고 목사 안수도 받는다(31.11.15). 그는 학생목사가 되어 설교도 한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성경을 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32년에 회심을 체험한다: „나는 그 전에 기도한 적도 없고, 했을지라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froh). 성경이, 특히 산상수훈이 나를 이러한 상태로부터 해방했다. 그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는 이것을 분명히 느꼈고, 심지어 내 주위 사람들도 이것을 느꼈다. 이것은 커다란 해방이었다“(DBW 13; 272f. 1936년에 쓴 서신에서). 물론 그가 정말로 성경적으로 회심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 이후 성경에 대한 관심이 달라졌고, 이해가 훨씬 깊어졌으므로 회심으로 볼 수 있다. „나를 따르라“는 중생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다. 그는 비록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신학과 성품은 그와 많이 다르다 

히틀러는 자주 자기가 독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연설했다. 당시 교회는 보수적이었고 왕 제도를 좋아했으므로, 그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지도자로 믿었다. 독일 교회는 늘 권력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민주주의를 없애고 자기가 영도자가 되어 왕을 계승하는 자처럼 말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가 히틀러와 나찌 정부가 수립되는 데에 책임이 있다.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에 제국 수상이 되었다(제3제국 탄생). 히틀러가 수상이 된 지 2일 후에, 아직도 독일인들이 히틀러가 수상이 된 것을 축하하고 있을 때, 본회퍼는 라디오(베를린 방송)에서 히틀러를 비판했다. 제목은 „Wandlung des Fueherbegriffs in der jungen Generation“(새 세대의 지도자 개념의 변화). 자기 지위와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지도자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이며, 그는 결국 망한다. 이 경우에 그 지도자는 미혹자가 된다.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방송이 꺼졌다.

3월에 히틀러는 제국의회의 재개를 포츠담 교회에서 축하했다. 그는 새 나라가 전통적인 교회의 가치 위에 세운 것임을 보이려고 했다. 당연히 대부분 교회 지도자는 그를 환영했다. 이들은 그렇게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그들은 실추된 교회 명예를 세우고 교회를 재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의 생각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가르침과 매우 거리가 멀다. 아러한 상황에서 당시의 거짓 교회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한다).

독일 교회는 원래 작은 영방교회로 독립적으로 활동했었으나, 나찌에 협력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영향으로 서서히 첫 연합 제국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루드비리 뮐러가 제국 비숍으로 임명되었다(28:23에 군인들과 함께 히틀러에게 손을 들고 인사하는 목사). 히틀러가 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을 무렵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한 여학생 증언: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교수와는 다르게 강의했다. „Jetzt und hier redet Gott mit mir“: 여러분이 성경을 읽거든 „지금 그리고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라(29:48). 그는 이것을 계속 강조했다. 다른 교수들과 달리 학문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 „Bibel musst du auf dich hinlesen“(너는 성경을 너에게 하는 말로 생각하며 읽어라). „Das Wort Gottes zu dir hin“(하나님께서 너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다른 학생의 증언: 당시에 (히틀러를 통한) 독일 백성의 구원에 대한 희망이 널리 퍼지고 있었을 때, 본회퍼는 강의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Das Heil kommt von Jesus Christus“(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구원이 히틀러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고 가르쳤다. 그는 대중이 믿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가르쳤다. (1932년에 그가 회심했으므로 이러한 강의가 가능했다. 이로써 종교개혁/ 경건주의 이후 오랬동안 잊혀졌던, 인격적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신학의 주제가 되었다).

1933년 4월 1일
나찌의 선전장관 괴벨스 연설과 함께 시민이 유대인 핍박하고 교회에서는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31:15). 그럼에도 90세가 된 본회퍼의 친할머니는 겁내지 않고 유대인 가게에 들어가 장을 보았다. 가게 앞에서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군인들이 그녀를 막지 못했다.
일주일 후(4월 7일)에 Arierparagraph(아리안 조항)가 나옴: 유대인 공무원직 금지. 이때 사람들이 마틴 루터의 문구를 근거로 삼기도 했다. 루터를 반유대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볼프강 후버 교수의 루터 평가: 우리는 반유대주의와 반유대인주의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반유대주의는 옛 부터 신학에서 있었으나 20세기에 여기에 인종차별주의가 첨가되었다. „Luthers Antijudaismus ist nicht rassistisch“(루터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Er erwaechst aus dem Glauben“(그것은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Er sieht einen Glaubenskonflikt zwi. Juden und Christen, und er interpretiert es faellig falsch“(그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충돌하는 것을 보았고 이것을 아주 잘못 해석했다). 20세기에는 신학적인 충돌을 인종에게 적용했다.

본회퍼의 실수:
자기 쌍둥이 자매가 유대인과 결혼했는데, 남편의 부친이 죽자 본회퍼에게 장례식 설교를 부탁했다. 그는 교회 지도부에 찾아가서 상담했는데, 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들은 처음에 히틀러를 환영했던 때와는 달리 히틀러를 조심하기 시작했다. 그후 그는 그 설교를 거절했다. 나중에 이것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나중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도 당시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끔찍하게 겁을 먹을 수 있었을까?(grauenhaft aengstlich). 오늘 당시의 실수에 용서를 구해야겠다.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거세지자 그는 목사들을 위한 교회지에 글을 썼다(1933년 4월): „Die Kirche vor der Judenfrage.“(유대인 문제 앞에 직면한 교회;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그는 교회가 유대인을 도울 것을 분명히 요구했다. 이것은 인쇄되었다! 그는 정말로 용감한 사람이었으며,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나섰다. 그는 반유대적인 법을 교회에 다니는 유대인에 적용해서는 안 될뿐더러, 더 나가서는 국가 권력의 희생자가 된 유대인을 보호하라고 요구했다. 교회가 국가에 순종하는 의무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유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1) 교회는 먼저 국가에 그러한 행동이 합법적인지를 물어야 하고,
2) 교회는 국가의 행위로 말미암은 희생자를 도와줄 의무를 져야 하며(그가 교인이 아닐지라도),
3) 교회는 극단적인 경우에 저항할 각오를 해야 한다(„im Extremfall drittens bereit sein, nicht nur die Opfer unter dem Rad zu verbinden, sondern dem Rad selbst in die Speichen zu fallen“)

그는 교회가 이것을 묵과하면 안 되며 행동할 것을 공개적으로 요구한 첫 목사(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이러한 기사를 읽기만 하면 실감이 나지 않지만, 당시 나찌들이 행군하는 것과 국민이 열광하는 것, 교회당에도 나찌당 표시(Hakenkreuz)가 붙어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용감하고 위험한 일인지가 실감 난다.

나찌는 로마 가톨릭이 과반수를 차지했던 남독일에서 일어났다. 로마 가톨릭은 처음에는 히틀러를 반대했지만, 점차 그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1933년 여름에 바티칸이 히틀러와 협상했다. 그때 나중에 교황 피우스 12세가 될 추기경도 참석했다.
협정서(Komkordat) 작성: 가톨릭 교회는 Autonomie(자치권)을 받는다. 그 대가로 당의 정치적 삶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히틀러의 첫 외교 정책의 승리이다. 이로써 가톨릭은 히틀러 정권에 항거할 수 없게 된다. 로마 가톨릭 지도자 대부분은 히틀러가 로마 가톨릭 신자이고 합법적으로, 분별력 있게 행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찌가 폭력을 사용하고 개신교 교회에 간섭이 많아지면서, 그간 나찌에 매우 충성하던 신교도들도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마틴 니묄러(베를린) 목사는 1차 대전 때에 공을 세운 사람이며 베를린의 유명한 목사였는데, 공개적으로 나찌 정책에, 특히 아리안 조항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본회퍼와 함께 Pfarrernotbund(목사 비상 동맹)를 결성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7000 이상의 목사가 참여했다. 당시 20000명 목사 중 다수가 침묵하거나 히틀러에 동조했다. 본회퍼는 교회 내부의 분열을 보고 매우 불안해했다. 당시 칼 바르트에게 쓴 서한: 자기가 고립되고 있음을 느꼈다. 자기 생각이 반드시 옳은지에 대해 의심도 했다.

본회퍼는 일단 후퇴하여 영국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독일 교회의 목회 자리를 받았다. Chichester 비숍 죠지 벨과 친분을 맺었다. 이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교회를 회복하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독일에서는 반대하는 목사들을 핍박하고, 많은 목사를 투옥했다. 히틀러 유겐트(청년 나찌당원)는 니묄러가 „Gott ist mein Fuehrer“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는 이유로 목사관에 폭탄을 던졌다. (당사자는 물론 가족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는지 생각해보라!)

1934년 5월에 바르멘에서 백 명 이상 목사 대표들이 모여 바르트가 작성한 것을 기초로 바르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주가 되심을 고백했다. 이것을 기초로 고백교회가 탄생했다(당시 목사들이 거의 자유주의자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는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주가 되신다“는 집단적 고백은 거의 혁신적이다. 독립교회에서도 일부는 히틀러에 의해 핍박받고 일부는 그에 협조했다). 본회퍼는 18개월 후에 영국에서 돌아왔다.

1934년 8월
나찌가 군사무기를 만들면서 군비확장을 시작하자 전 세계 목사 대표들이 덴마크에서 모임을 가졌다. 본회퍼는 당시 28세였다. 그는 벌써 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의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전쟁을 염려하여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의논하고자 모였다. 그곳에서 그는 „Kirche und Voelkerwelt“(교회와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이것은 유명한 설교이다: „Der Friede muss gewagt werden… Schlachten werden gewonnen nicht mit Waffen sondern mit Gott“ (평화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전투는 무기로 싸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이기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일어나서 이 전쟁을 막아야 한다. 그 연설의 마지막 문장: „Worauf warten wir noch? Es ist alle hoechste Zeit“(우리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왜 행동에 옮기지 않는가? 더는 지체할 수 없다).

„Wenn uns Christus ruft, fuehrt uns sein Ruf hin zum Tod“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시면, 그 부르심은 우리를 죽음으로까지 이끈다: 그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이 자막으로써 그가 교장으로 있던 고백교회 신학교 이야기가 시작한다. (47:25)

당시 대학에서 올바른 신학교육이 어렵게 되자 고백교회는 1935년 신도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차세대 목회자 양성을 위해 여러 곳에 신학교를 세웠다(독일 여러 곳에 이러한 신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불법적인 학교였다. 본회퍼는 핑켄발데의 신학교 원장으로 부름 받고 인도 여행 계획을 연기하고 이것을 수락했다.
그는 산상수훈을 진지하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이것을 가르쳤다. „여기에 모든 것을 폭파시킬만한 능력의 근원이 있다.“ 그는 평화와 공동체를 강조했다: 함께 공부하고 기도에 집중하는 새로운 공동체.

그는 젊고 스포틱하게 생겼으므로 학생과 구별이 안 되었다. 며칠 후에는 학생들에게 Herr Direktor라고 하지말고 본회퍼 형제로 부르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를 잘 정리하라고 했으며, 그는 이것을 검사했다. 고전 음악, 그 이후의 음악을 함께 연주하며, 그는 할렘에서 배운 흑인 영가도 가르쳤다: 스윙 체리옷.
그는 핍박받는 유대인과 흑인 사이에 동일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가 미국에서 이미 인종차별의 경험을 했으므로 유대인에 더욱 관심을 뒀다.

이러한 신학교는 엄연히 불법이었으며(루터 교회에서 갈라짐), 루터 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학생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교인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Ruth von Kleist(룻 폰 클라이스트)도 지원했다. 그녀의 친손녀 Ruth Alice von Bismarck(본회퍼의 약혼녀 Maria v. Wedemeyer의 자매)의 증언: 우리 가족은 나찌를 반대하고 매우 경건했다. 우리는 그곳을 방문했다. 우리는 자기가 말하는 것에 그렇게 확신에 차서 하는 설교자는 처음 들었다.
이곳에서 그는 „제자도“를 썼다. 값싼 은혜와 비싼 은혜. „값싼 은혜는 십자가가 없는 은혜이다… 비싼 은혜는 복음이며, 이것은 사람의 생명을 요구한다… 이것이 비싼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비싼 것이 우리에게 값싼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신학교는 설립한 지 2년 후인 1937년 9월에 게쉬타포에 의해 폐쇄된다.

1938년
유럽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말살한다는 히틀러 연설: 사람들이 열광함(55:25).
그해 11월 9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Die ReichsKristallnacht가 있었다. 유대인 가계를 파괴하고 회당을 불태웠다. 본회퍼는 „단지 유대인을 위해 소리치는 사람만 그레고리안 찬송가를 부를 수 있다(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고 썼다. 그는이 행위를 단지 유대인에게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보았다. 그러나 고백교회는 침묵했다.

본회퍼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그가 베를린에 체류하는 것이 금지당했다). 가족 중 몇 명이 항거 운동을 하는 단체에 들어 있었다. 이들은 히틀러의 만행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본회퍼의 형(클라우스)과 두 처남이 그 모임에 들어 있었다. 처남 한스 폰 도나니(변호사)가 본회퍼에게 이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Abwehr“(저항단)라는 이 모임은 처음부터 히틀러를 반대했고, 그를 암살하려는 모임의 중심이 되었다.

칼 바르트는 스위스로 돌아가고 나찌에 항거하던 마틴 니묄러는 수용소에 들어가고 수백 명 목사들이 감옥으로 들어갔다. 이 상황에서 친구가 미국에서 유니온 신학교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본회퍼 가족은 유대인 학살을 알고 있었으므로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여름에 다시 뉴욕으로 갔는데, 자기 행동에 확신이 없어 고민했다. „내가 어디에서 쓰임 받을것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미국에서, 혹은 독일에서 사용하기를 원하실까?“ 그러다가 „Wer glaubt, der flieht nicht“(믿는 자는 도주하지 않는다)라는 이사야 말씀을 보고 자기가 도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생명(살아남는 것)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자기는 전후 독일 교회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 „내 백성과 시험을 함께 나누지 않으면, ... „ 그는 나찌가 패망할 것을 믿었다.
그는 매우 애써서 마지막 배를 탔다. 전운이 감돌았으므로 그 후에는 배가 끊어졌다.
1939년 9월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로써 세계 대전이 시작했다.

폰 도나니는 그 사이 암살 공모팀의 지도자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본회퍼에게 그 공모에 함께하자고 권유했다. 그런데 신학자로서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베트게가 당시 본회퍼의 생각을 증언했다(베트게는 핑켄발트 신학교의 학생이며 본회퍼의 친구가 되었다: Eberhard Bethge 1909-2000): 그리스도인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옳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주변의 사람을 위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때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방책을 구해야 한다.

한 목사의 증언: 전쟁과 불의(유대인 문제), 이 두 가지가 그가 그 음모에 참가하도록 했다. 그리스도는 평화와 공의의 하나님이므로. 그가 침묵한다면 평화와 공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베트게에게 다음과 썼다:“ Ich bereue diesen Weg an keiner Stelle“(나는 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본회퍼의 이러한 결정은 성경적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불의의 집단에 동조하는 것은 큰 죄이지만, 그럼에도 살인하는 것은 여러 하나님 계명에 위배된다. 나는 전쟁과 불의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그분의 섭리를 따른다. 당시 자유주의에 함몰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좋다. 신자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신자는 여러 불이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를 당할지라도 불의에 동조하지 않고 복음과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본다. 실제로 히틀러 몰락 이후에 교회는 많이 정화되었다).

본회퍼는 단지 정보의 전달자일 뿐만 아니라 이 항거자들의 도덕적 지주가 되었다(Geffrey Kelly). 이들은(여기에 대장인 해군 제독도 포함되었다) 군인의 맹세를 깨고 지도자를 죽여야 했다. 거짓말도 많이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은 본회퍼를 통해 힘을 얻었다. 본회퍼는 목사와 간첩 노릇,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베트게: 당신은 현재에 살고 있다. 내일도 어제도 아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계속 사람이 살해된다. 이 사람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를 죽이고자 심지어 죄를 지을지라도(Schuld aufnehmen).

(추가 설명: 본회퍼는 처음으로 윤리에 Schuldübernahme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이 행위를 하든지 안 하든지 어차피 죄에 빠지는 경우이다. 마부(히틀러)가 미쳐서 마차에 탄 사람이 다 죽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마부를 죽이면 마차에 탄 사람을 모두 살릴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살인죄를 범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가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아서 모두가 죽게 된다면, 그는 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의 암살에 가담한다. 물론 그는 히틀러를 죽이는 것이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그가 죄(Schuld)를 스스로 지게 된다(Übernahme: 넘겨받는 것). 그리고 그 죄를 그리스도께 다시 전가함으로 스스로는 죄 사함을 받는다. 나는 본회퍼가 미친 마부와 히틀러를 동일시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적극적인 살인은 반대한다. 그러나 Schuldübernahme의 개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본회퍼는 어떻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농민전쟁 이후에 다음과 같은 루터의 괴로운 고백에서 배우지 않았을까? „그들의 모든 피가 내 목까지 찼다(나도 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나의 주님께 떠맡긴다. 그분이 나에게 이것을 명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는 달랐다. 루터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본회퍼에게는 그러한 필연성이 주어지지 않았다).

1940년 6월에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다.
1차대전 패배를 복수하고자 히틀러는 에펠탑에 갔다. 베를린으로 돌아가서 독일 국민과 함께 역사상 가장 큰 축제를 벌였다.

본회퍼는 룻 폰 클라이스트에게 갔다. 여기에서 그가 전에 알고 있었던 그녀의 손녀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를 사귀게 되었다.

그는 스파이 노릇을 하면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윤리학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히틀러 암살 계획을 지원하지 않았다. 음모팀이 몹시 실망함. 몇 번 암살 시도가 실패했다.
영국 하원에 호소했을 때도 거절당했다: 독일 문제는 독일인이 해결하라!.
1942 성탄절 쯤에 암살 동료들에게 „십년 후에“라는 에세이를 썼다: 유대인의 고난에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기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할 일이 아니다.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행동해야 하고, 후대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1943년에 연합군이 우세해져 전세가 역전되었다.
나찌가 „Abwehr“(저항단)를 의심하여 본회퍼와 도나니의 전화를 비밀로 도청하기 시작했다.
본회퍼는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함. 그는 히틀러가 암살되고 독일에 평화가 올 것을 믿었다.
1943년 4월 5일 도나니와 몇 시간 지나 본회퍼가 잡히다.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약혼녀 폰 베데마이어는 영문을 몰랐다.

그는 감옥에서 부모에게 자기는 잘 적응하고 있다고 편지함으로써 부모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처음에는이불이 너무 더러워서 며칠 간 덮을 수가 없었다. 베트게가 방문했을 때에 친절하고 웃으면서 나타났다. 간수들이 그를 도와주어 글도 쓰고 외부로부터 책도 받을 수 있었다.

감옥에서 베트게에게 쓴 것:
„교회는 남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의 삶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직업의 사람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이다.

감옥에서 그는 계속 성경을 읽었다. 그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가 좋아하는 욥기에 이르렀다. 다음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편에 이르렀다. 44년까지 전쟁이 계속되자 그는 옥살이에 익숙해져서 다시 „윤리학“을 계속 쓰기 시작했다.

44년 7월 20일 백작 폰 쉬타우펜베르크 대령의 암살 시도가 실패했다. 이것이 마지막 시도였다. 4명이 죽었으나 히틀러는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히틀러가 철저히 조사하라고 했다. 이로써 도나니와 본회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본회퍼는 „나는 누구인가“를 썼다. 내가 번역한 것이 앞에 있다.

1945년 4월 베를린이 완전히 파괴되다. 전쟁이 패배할 것이 확정되었음에도 히틀러는 암살자들을 모두 사형하라고 명령했다. 본회퍼도 포함되었다. 그는 플로센부르크 수용소로 이송되어 약식 재판 후에 4월 9일 처형당했다. 그 후 자기 형, 두명의 처남도 처형당했다.
그의 마지막 말: „Das ist das Ende, fuer mich der Beginn des Lebens“(이제 마지막이 왔다. 그러나 이것이 내 삶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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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의 추가분:
본회퍼는 감옥에서 쓴 것 중 거의 마지막 서간들에서 십자가 신학에 골몰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하나님만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하나님의 „성육신적인 다가옴“과 „자신을 비우는(kenosis:빌2:7) 깊음“을 강조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고 자신을 비우고 낮춤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상당히 깊은 신학적 사색과 통찰이 엿보인다. 이 기회에 본회퍼가 다시 신학적 주제로 부각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핵심을 살펴본다. 그가 루터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제 19-22 요약)

• 진정한 신학이란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분에서 찾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이란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불린다.
•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성(사변)과 선행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루터는 이것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고 명명하고 이것은 잘못된 신학이라고 비판했다.
• 이 가짜 신학은 악을 선이라고 하고, 선을 악이라고 한다: 이것은 가톨릭 신학에 대한 폭탄선언이다.
• 십자가 신학은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를 안다(예수님의 인성과 고난을 강조).

이로써 개신교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핵심 가르침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 대중 전도시대를 맞아서 신자의 삶에서 십자가가 사라진 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설교에서 십자가의 피, 거듭남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용도로 사용되며, 복음의 핵심을 나타내는 경건한 용어가 장식품처럼 사용된다. 이렇게 현대 복음주의도 계속 타락하여 영광의 신학이 되었다. 이것은 가짜 신학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모색해야 한다.

송 다니엘 목사(독일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
송 다니엘 목사(독일 프랑크푸르트 개혁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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