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창세기 1-11장은 역사(history)입니까? 아니면 허구(fiction)입니까?

A. 성경은 계시 문서입니다.

창세기(創世記, Genesis)는 오경(五經, תורה, pentateuch) 중 첫 책이다. 오경, pentateuchus는 pente = 5이고, teuchos = 항아리의 합성어이다. pentateuchus(오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이다. 히브리어 책 제목은 첫 단어이다. 창세기는 베레쉬트(בראשית, bereshit), 출애굽기(출애급기/出埃及記, Exodus), 쉐모트(Shemot)이고, 레위기(Leviticus), 와이크라(Wayiqra)이고, 민수기(民數記, Numbers), 베미드바르(Bemidbar)이고, 신명기(申命記, Deuteronomy-두번째 율법, 율법의 반복), 드바림(Devarim)이다.

오경은 저자 문제로 한국 교회가 분열할 정도로 긴밀한 주제이다. 1930년대 김재준(1901-1987)은 일본을 거쳐 프린스턴에서 수학했지만, 신학에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박형룡(朴亨龍, 1897-1978)은 중국 금릉대학을 거쳐 1923년 프린스턴에서 수학했다. 두 사람은 공통으로 메이천 박사에게 수학했지만, 메이천, 구(舊) 프린스턴에서 죽산(竹山)은 계승을, 장공(長空)은 한계를 느끼고 탈피를 추구한 것이다.

김재준은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은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의 종교사학파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종교사학파는 구약성경 본문이 팔레스타인 주변 상황과 역사 자료에 영향을 받았고, 후기에 이스라엘 민족정신을 정립하기 위해 편집한 것으로 구도화시킨 것이다. 1930년대에 논란이 진행되려 하는데, 한국 교회는 신사(神社) 도입을 결정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일제가 미국에 의해서 항복하면서, 해방된 한국은 잠재되었던 문제가 다시 드러났다. 신앙동지회 51인과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확립시켰다. 1953년에 김재준 측은 기독교장로회로 분리했다.

과격하게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가 아니라는 종교사학파의 고등비평인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 혹은 양식비평(Form Criticism)에서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으로 전환되면서 좀 다른 견해가 등장했다. 편집비평에서는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인정하지만, 전체 저작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견해도 신명기 34장은 모세 저작으로 보지 않고, 여호수아의 저작으로 본다. 그러나 편집비평은 양식비평에서 시작된 JEDP 가설이 다른 형태로 변형하면서 진행한다(Graf-Kuenen-Wellhausen hypothesis).

현대 정신은 계몽철학이 제언한 정언(Cogito, ergo sum) 위에 세워지고 있다. 계몽철학의 영향으로 자유주의도 새로운 정언을 정립하기 위해서 다수의 가설(假設, hypothesis)을 제시했다. 자유주의에서 세운 가설은 100여년이 지나면서 정설(定說)의 자리에 올라있다. 필자는 가설은 가설의 위치에 있도록 주장한다. 가설이 정설이 되려면 많은 연구 자료나 연구자의 숫자가 아니라 합당한 자료여야 한다.

창세기 50장을 구분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지만, 크게 1-11장(창조에서 바벨탑까지)과 12-50장(아브라함에서 야곱의 죽음까지)으로 구분한다. 창세기 전체를 평가도 일치되지 않지만, 1-11장까지는 다양한 논의를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성경과 과학 관계 논의에서도 다양한 의견을 갖고 있다. 창세기 1-11장까지를 바르트는 오버백(F. Overbeck)이 사용한 ‘원역사(原歷史, Urgeschichte)’를 창세기 1-11장으로 규정했다. ‘원역사’는 ‘시초의 역사’라는 뜻이 아니다. 역사는 히스토리에(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 두 개념이 있는데, 원역사는 게쉬히테(Geschichte)와 연결한 것이다. 독일에서 과거를 사유할 때 사용한 어휘가 게쉬히테(Geschichte)인데, 개념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니체는 과거를 “현재 관점의 표현”으로 보았다. 역사는 “과거 사건으로 역사(history as past)”와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historiography)”가 있는데, 전자는 객관적 사건이고 후자는 주관적 기록이다. 객관적 사건은 주관적 기억과 주관적 기록 속에서만 존재한다. 계몽철학, 자유주의, 현대신학은 성경 저자의 수준에 차이를 두지 않는 동시성(synchronicity) 개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유일회성을 주장하지만 개인에게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역사에 객관은 없다. 주관적인 사람이 쓴 기록에 객관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합리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생존자의 기록이다. 칼빈은 창세기의 저자를 모세로 제시하면서 신뢰성을 제시한 것은 조상들의 실수를 기록하며, 자기의 실수와 가족의 실수를 그대로 묘사하는 모습을 제시했다. 승자와 생존자가 기록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세도 자기 조상과 자기 가족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필자는 “원역사”라는 개념에 있는 “게쉬히테”라는 개념에 과거를 객관으로 보지 않은 표현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신학과 철학에서 어려운 점은 역사는 모두 “게쉬히테”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도 히스토리에(Historie)와 게쉬히테(Geschichte)을 history로 한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두 어휘의 개념은 명확한 차이가 있다.

성경은 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인간의 저술이 아니다. 성경은 계시문서이다. 계시문서는 생성되고 보존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기록자에게 영감(靈感, inspiration)하는 방식으로 직접 개입하셨다.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것에는 거의 일치하지만 방법과 범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완전 영감되었다는 계열에는 기계적 영감설(mechanical inspiration)과 축자적 영감설(verbal inspiration)이 있다. 부분 영감되었다는 이론은 동력적 영감설(dynamic inspiration), 사상 영감설(thought inspiration)이 있다. 성경 영감(靈感, inspiration)과 조명(照明, illumination)을 구분한다. 영감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성령의 작용이고, 조명은 기록된 성경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성령의 작용이다.

새물결플러스(주현규 역, 2020년)에서 출판한 『창세기 원역사 논쟁: 창세기 1-11장의 장르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원제: Genesis: History, Fiction, or Neither? Three views on the Bible's Earliest Chapters에서 제임스 호프마이어(James K. Hoffmeier, 1951-), 고든 웬함(Gordon J. Wenham, 1943-), 켄톤 스팍스(Kenton L. Sparks, 1963-)가 자기 이해를 피력했다. 호프마이어(Hoffmeier)는 창 1-11장을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문헌”으로 보면서,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역사적인 사실들 및 실제 사건들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웬함(Wenham)은 원역사를 “원형적인 역사”로 이해한다. 그는 창세기를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기에는 그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암류(undercurrent)가 깔려 있다면서, 추상화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그는 창세기가 “과거와 연결된 현재를 위해 역사를 해석해놓은 글”이라고 제시했다. 스팍스(Sparks)는 창세기 1-11장을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고대 역사 편찬 문헌을 편집해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제시하는 문헌으로 제시했다.

학자들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history)인가 허구(fiction)인가에 대한 논의보다, 계시 기록임을 인지해야 한다. 창세기 1-11장은 계시 기록이다. 계시 문서이면 성경은 신적권위가 있으며,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구원경륜)을 제시하는 정확무오한 말씀이다. 계시 문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도록 증진한다. 믿음에서 이해가 아닌 믿음에서 믿음으로 정진한다. 믿음으로 은혜를 받아, 믿음으로 이해하여 영혼의 강건함과 육체로 행동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은혜를 받으며 믿음으로 살 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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