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도행전에서 가장 긴 복음선포 내용이 스데반의 증거이다. 스데반의 증거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있다. “좋은 증거”나 “좋지 않은 증거”로 대조된 의견이다. “좋지 않은 증거”라는 주장에는 어떤 회심자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든다. 그리고 질책하는 것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바르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스데반의 복음 제시는 좋을 것일까? 좋지 않은 예일까? 복음은 책망이 아니라 구주 예수를 지시하고 증거하는 것이다. 필자는 루터가 율법과 복음 관계를 순환과 연합 구도로 이해했다고 본다. 그러나 복음과 율법의 기능은 엄격하게 구분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이고, 복음은 죄를 치료하고 회복하는 기능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자유는 오직 복음으로 주어진다.

스데반은 아브라함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성경대로 제시했다. 유대인들은 자치권을 가진 주권 거주라고 생각했고, 스데반은 계시를 받은 민족이지만 선지자를 거부한 족속으로 평가했다. 하스모니안 왕조(Hasmonean Dynasty)는 제사장이 회복한 왕국으로 다윗 왕국과 전혀 다르다. 1세기 유대인들은 수복 기념일로 수전절(修殿節, Hanukkah, festival of Dedication, 요 10:22-24)을 지켰다. 수전절에는 하누카 메노라(9개 촛불)를 8일 동안 켜놓는다. 1세기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잘 유지했다고 분석한 부류가 20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새관점학파이다. 1세기 스데반의 관점과 다른 견해이다. 그래서 새관점학파의 유력자인 샌더스(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 1977년))는 바울은 율법주의로 판단했는데, 유대주의(legalism)는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규정했다.

2.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당성”을 주장했고(4-5장), 집사 스데반은 공회에서 조상의 죄를 반복하는 행태를 지적했다(7장). 스데반의 발언 내용은 문제가 없지만, 해야 할 장소를 파악해서 모든 곳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형으로 보기는 어렵다. 스데반 집사의 발언은 계시 기록이며, 순교자의 설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조심스럽게 평가해야 한다. 계시가 완료된 시대에 율법의 역할과 위치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스데반의 증언에는 율법의 기능(몽학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능에 호소한 것이다. 1세기 유대인들의 일관성은 거룩한 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선지자를 죽이는 것이고, 황금성전은 좋아하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는 그러한 행태가 조상들의 죄를 반복하는 것으로 직시한 것이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멸망한 이유이고, 돌아와서 성전과 성벽을 복구했지만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하스모니안 왕조가 자치권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 습성을 개혁한 것은 아니었다.

3. 스데반은 대제사장의 심문에 의거해서 증언을 한다(1-2절). 스데반의 발언은 공회 앞에서 민족의 불법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패턴을 변론 사역으로 증언할 수 있겠다.

스데반은 공회에 모인 사람들을 부형이라고 부르며 시작했다(2절). 스데반은 “우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스데반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다(2절). 아브라함은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고향과 친척을 떠나 여호와께서 지시한 땅으로 이주했다. 믿음의 사람의 조상도 아브라함이다. 스데반은 혈통적 조상과 믿음의 조상을 말했고, 그리스도인들은 혈통이 아닌 믿음의 조상뿐이다.

스데반이 증언에는 많은 난제, 정확하지 않은 내용들이 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 중에 그 문제를 지적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것은 정보의 일치보다 추구하는 방향을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난제 중 하나는 아브라함이 메소보다미아에서 계시를 받았는지 정확하지 않다(창 11:31-12:1).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은 뒤에 떠났다는 제시는 창세기 12장의 제시와 일치하지 않는다(4절).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 후손이 다른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400년 동안을 괴롭게 되리라는 것은 430년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와서 여호와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다. 그 언약을 체결한 뒤에 할례를 받았다(8절). 스데반은 할례의 언약을 여호와께서 주셨다고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언약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조건은 ‘할례 언약’(8절)인데, 그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여야 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우리 열두 조상” 낳았다(9절). 스데반은 요셉, 애굽, 가나안을 상대적으로 길게 제시했다(9-19절). 요셉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내려갔고(75명), 요셉이 죽은 뒤에 애굽에서 고난받은 백성을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구원하셨다(14-36절).

요셉의 무덤까지 세부적으로 제시한 것은 그들도 요셉에 대한 깊은 존경과 이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타나, “우리 족속(스데반이 레위 지파로 확정하기는 어려움)”에게 고난을 주었고, 그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되어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40세가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돌 볼 생각을 했다(22-23절). 성경은 왜 모세가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종인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는지 표현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이라고 제시할 뿐이다.

원통한 일을 당한 동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세는 압제하는 애굽 관원을 쳐 죽였는데, 동족은 싸움을 중재하는 모세를 살인죄로 고발할 기세였다(24-28절). 모세는 자기를 통해서 구원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바랐는데 살인자로 고발당할 위기에 봉착하자, 광야로 도망했다(29절). 모세는 이스라엘이 자기를 구원할 지도자로 깨닫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민족은 모세를 고발하려고 협박했다. 이스라엘이 버린 모세를 여호와께서 일으켜서 구출할 도구로 삼으셨다.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어 아들 둘을 낳았고, 40년을 지냈다(29-30절). 40년이 찼을 때에,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모셍게 나타났다(30절). 모세는 여호와의 현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과 함께 했다(신발을 벗음, 32-33절). 그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오히려 모세는 거부했다. 모세가 거부당했기 때문에 정당성이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강권하여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도록 하셨다. 그리고 시내산, 광야 교회에서 모세는 율법의 중재자로 확언되었다. 그 율법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스라엘과 아론은 송아지를 만드는 것을 기뻐했다(39-42절). 스데반은 그들의(우리 조상) 마음이 애굽을 향한다고 했고, 우상을 기뻐한다고 제시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권념하셔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시키셨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넜는데, 그 곳에서 몰록과 레판의 별을 섬겼다(43절).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44절).

다윗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구했는데,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되었다(46-47절). 그러나 선지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은 집에 있지 않는다고 계시했다(48-50절, 사 66:1-2).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 성전도 아닌, 스룹바벨 성전도 아닌 헤롯의 황금성전에 목을 내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바벨론으로 끌려 나간 것은 백성의 반역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땅을 모욕했고, 언약의 법(法)을 부정했고, 언약의 전(殿)을 부패시켰다. 그래서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선언하셨다. 그럼에도 그 죄를 돌이키지 않고, 죄를 더해서 에돔 사람이 지은 황금성전에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자고하고 있다. 이러한 총화(總和)가 선지자들이 지시한 의인 예수를 죽였다(52절).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기회, 선지자를 존경한다면서 죽이는 이스라엘에게 준 마지막 기회, 선지자를 죽였지만 그 선지자를 죽였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천사(여호와의 현현)가 준 율법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준 은혜를 받지 못한다(53절).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형성된 아브라함 후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지 못하는 때가 이제 왔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임으로 그들이 스스로 육적인 단절을 선언했다. 그래서 그 과오를 회개하고 영적으로 연결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다.

4. 스데반의 설교는 제사장들과 듣는 사람의 마음을 찔렀는데, 그들이 스데반을 향해서 이를 갈았다(54절). 악인의 본성은 율법을 만나면 이를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이를 가는 것이다. 지옥은 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가득한 곳이다. 악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과 의인이다.

5.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해졌고(54절), 청중의 마음에는 화(火)가 충만해졌다(54절). 그래서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서 이를 갈았다. 그 때 스데반은 “보라,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고 있다. 하나님 우편에 인자가 서신다”(56절)고 고백했다. 그들의 분노의 임계점을 넘었기 때문에, 무리들이 귀를 막으며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다. 그 때 돌을 던지는 증인으로 사울이 있었다(58절). 사울은 어떤 증인을 섰을까? 그는 스데반이 말하는 것이 거짓이고 신성모독이라고 증언했을 것이다. 스데반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주 예수여 나의 영을 받으옵소서”라고 유언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그는 잠들었다(60절).

6. 스데반의 증언은 1세기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리하는 중요한 증언이다. 구약성경 마지막 말라기는 십일조를 강조하면서 끝난다. 십일조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전이 있지만 제사장이 없는 구조가 되었다. 배고파서 사역을 떠나는 사역자들이 속출하는 한국교회도,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은 십일조를 해라, 복을 주시는지 주시지 않는지 시험하라고 외칠 정도까지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님이 오시면 이스라엘처럼 주님께 돌을 들지 않을까? 주님의 복음 사역자에게 돌을 들지 않을까? 가말리엘처럼 중간자적인 자세로 겸손과 관용을 떨며 높은 자리를 보존할까? 구약성경과 다른 유대교는 구약성경이 예언하고 지시한 예수를 죽이는데 앞장섰다. 사람이 만든 종교는 반드시 천지 창조주를 반역한다. 죄된 본성을 피할 수 없다.

7. 전능하신 하나님, 스데반의 증언은 당시 유대인들의 양심을 찔렀으며, 저의 마음에는 주의 신실하신 역사를 보았습니다. 나의 양심을 찌르는 설교를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주님께 회개하며 경배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양심을 억압하는 설교를 만났을 때에는 조용히 일어나 그 자리를 떠나게 하옵소서. 주의 얼굴을 뵈며 주의 형상을 이루게 하옵소서. 주의 나라는 영원하오니,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게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date. 2nd. 2020.06.24.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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