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회가 천년동안 죄의식을 부당하게 민중에게 씌웠다”고 평가해야 한다. 그 부당함은 1517년 10월 31일, 만성절 전날에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의해서 폭로되었다. 서양 사회는 부당하게 씌워진 죄의식을 제거하고자 무척이나 노력했고, 1, 2차 세계대전으로 죄의식에서 벗어나버렸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you do well, will you not be accepted? And if you do not do well, sin is crouching at the door. Its desire is contrary to you, but you must rule over it.”(ESV)

대명사 it을 우리번역에서 일반명사(죄)로 번역했다. 마치 죄에 속한 것처럼 이해될 수 있지만, 좀 더 숙고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져 있기(crouching)” 때문에, 죄에 이르지 않은 상태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인류는 선악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는데,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해석할 능력을 상실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향한 적개심이 발생할 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특별계시이다. 그 특별계시를 받은 가인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문턱을 지나 죄를 범했고, 그 죄를 생활 체계로 구축했다.

죄에 이르기 전의 인간 상태는 악한 상태이다. 악의 행동이 문턱을 지나면 죄가 된다. 우리는 그것은 죄악(罪惡)이라고 사용한다. 기독교 사회인 서양에서는 sin and crime으로 구분했는데, 종교적 위법과 시민법적 위법으로 구분했다. 동양에서는 단순히 규율을 어긴 것을 죄(罪)로 죄된 행동을 죄악(罪惡)으로 사용했다. 서양은 사회법에 신(神)이 깊이 들어와 있고, 동양은 사회법에 인륜(人倫)으로 구성했기 때문이다. 이슬람도 기독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사회법에 “자기의 신”이 깊이 들어있다.

기독교는 천년동안 신의 의지와 인간 사회법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다. 그런데 많은 오류를 발생시킨 것은 신을 자기 목적으로 사용하는 세력들 때문이다. 과학 분야에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성경, 교회 사역자의 지성의 틀로 규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교회 사역자의 지성이 과학자들의 지성에 비교될 수 없이 낮은 위치에 전락해버렸다. 중세에 오류를 일으킨 것 중의 하나가 “죄에 대한 개념”이다.

7대 죄악(The Seven deadly sins/七罪宗, septem peccata capitalia)는 이집트 사막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 345-399)라는 수도사가 처음 만들어낸 후,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수도원에서 교회로 가지고 왔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1천년 이상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seven deadly(capital) sins)”라고 규정한 것인데, 개혁교회는 개혁했지만 로마 카톨릭은 유지하고 있다. 7가지 항목은 교만을 근원으로 폭식(식욕), 정욕, 물욕, 슬픔, 노여움(화), 나태(게으름), 허영심이다. 이 구도는 천로역정에서 나타날 정도로 익숙한 지식 체계이다. 아퀴나스는 허영, 탐욕, 욕정, 질투(시기), 술취함, 분노, 나태로 구분하면서, 대칭되는 선행으로 겸손(humility), 자비(charity), 순결(chastity), 감사(gratitude), 절제(temperance), 인내( patience) 근면(diligence)으로 제시했다. 로마 카톨릭은 원죄와 본죄로 나누면서, 본죄를 대죄(7죄종)와 소죄 나누었다. 본죄를 대죄, "죽을 죄"(mortal sin)와 소죄, "용서받을 죄"(venial sin)로 구분했다. 원죄와 자범죄로 구분하는 것과 동일한 분류일 것이다. 죄를 해속하는 구도에서 원죄 해소와 본죄(자범죄)를 해소하는 방법에서 전혀 다를 것이다.

첫째 원죄를 해소하는 구도에 다양한 방법이 있다. 여기에서 “객관적 속죄”가 등장하는데, 1세기 예수의 생애와 골고다에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 제공된 속죄를 주관적 속죄를 분류한다. 객관적 속죄와 주관적 속죄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다양한 분류가 있다. 필자가 이해하는 원죄 해소 구도는 1세기 골고다에서 속죄제사,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셔서 속죄를 보고하시고,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보내신 것이다. 성령을 내주케하심으로 천상의 주의 음성(Vox Domini)을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천상의 주의 음성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자연적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주신 귀가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다(합 3:4, 계 2-3장). 원죄가 해소되는 것은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때이다. 원죄이기 때문에 법정적으로 이해한다. 죄(罪)는 언제나 법정적 구도이다.

둘째, 본죄(자범죄)를 해소하는 구도에서는 더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교황주의의 면죄부 행태를 비판한 것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다. 교회가 면죄행위를 하는데, 루터가 비판한 것은 죽은자의 죄를 면죄하는 것이며, 그것도 교회가 돈을 관련하여 진행하는 것을 비판했다. 천주교는 대죄나 소죄 모두를 고해성사로 면죄행위를 한다. 개혁된 교회는 사함을 주시는 주님께 회개하고, 죄사함의 확신을 갖도록 복음을 선포한다.

그리스도인은 죄사함의 확신을 갖고 있다. 죄사함의 확신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실성, 영생의 소망을 갖는다. 방종파는 죄사함의 확신에서 자유로운 현세를 지향한다. 구교는 영생의 소망을 위해서 현세를 희생시킨다. 복음이 주는 자유는 현세의 고난에서 구주를 믿음으로 위로와 새힘을 받아 거룩과 성실로 정진한다.

우리는 죄를 대죄(7죄)로 구분하면서, 대결하려는 의식이 발생했다는 것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7가지 죄의 기원은 죄에 하당된 마귀(魔鬼, satan)을 설정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약 4:7, 벧전 5:9) 영적전투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사람은 절대로 마귀와 직접 대결할 수 없다. 마귀에게 조종 받는 사람과 대적한다. 마귀에게 조종 받는 가장 위험한 사람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이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선생과 반드시 대적해야 하는데, 대적할 때 지혜와 순결을 갖고 대적해야 한다. 그리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 아님도 잘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영국 국교회를 부정하는 형태를 취했다. “교회를 부정한 상태에서 거룩을 이루려는 구도”가 “죄죽임 구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분리파 청교도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워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 했다. 비분리파 청교도나 분리파 청교도들은 후천년주의 종말론자들로 새로운 이상적인 기독교 사회를 구축하려는 것은 일치하는데,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교회를 떠나 생활에서 이상 사회를 구축하려고 했다. 그러한 발상은 당시 사회가 기독교 사회였기 때문에 불가능한 구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미련은 지금 탈기독교화된 지금 서구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복음은 교회를 세움이고, 교회에 복음을 전해서 들어온 새로운 신자와 복음으로 더 복음의 사람이 된 신자들의 증진을 위한 유일한 방편이다.

죄죽음이 불가능한 이유는 죄는 법적인 가치이지 실제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악에 대한 평가(판결)이다. 평가를 죽이는 것은 뿌리를 놓아두고 싹만 자르는 것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서 죄(罪) 후에 있는 벌(罰)과 관계를 표현했다.

그런데 청교도주의에서 죄죽임을 강조했던 것은 “대죄를 죄”로 규정하는 범주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대죄는 죄라기보다 악의 양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4세기 수도사는 악을 사탄과 동일하게 규정하여, 사탄을 대적하는 것을 수덕(修德)의 목표로 삼아 정진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을 상상했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예수님은 성령께 이끌리어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 아닌 고난 중에 시험을 받으신 것이다. 마가는 시험을 에덴과 대조시키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스도인이나 수도사가 예수께서 행하신 고난을 반복하려 했다면 큰 오류를 범한 것이다. 예수께서 그 고난을 반복하도록 명령하시지 않았으며, 의도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12사도 중에서 사막 속에 들어가 고행을 한 분은 한 명도 없다. 사울이 개종한 뒤에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 머물렀을 뿐이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복음 선포(주의 말씀)로서 교회를 강조했다. 그리고 언약적 관계를 이룰 것을 주장하며, 언약이 유지되는 방법은 신실하게 계약 사항을 준수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하나님과 언약과 인간과의 계약에서 준수해야 할 수준에 차이가 없었다. 인간이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법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땅과 법이 매우 긴밀하기 때문에, 미국은 자기 땅에서 출생한 태아에게 미국 국적을 부여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창세기 3장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죄이다. 그 죄가 발생하기 전 악은 없었다. 사탄은 있었지만 사탄의 작용과 무죄한 아담의 연관성은 없다.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는 동물들에게 이름을 주는 것과 땅을 경작하며 땅에 충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에게 미혹되었다는 것은 자기 임무에 충실하지 않은 불충이 추가된다. 아담이 죄인이 됨으로 땅과 인류는 악이 보편(Universal Evil)이 되었다. 죄가 없는 아담이 죄를 범한 것은 신비이지만, 그 죄가 유입되어 악이 생활화가 되었다. 칸트는 인간 본성이 악하다고 합리적으로 증명했다(참고, 김화성,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악하다 -악의 보편성에 관한 칸트의 증명-”, 『철학사상』 32권, 2009년). 그러나 그리스도인 합리적 증명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서 고백한다.

그런데 교회에서 죄와 악의 문제가 아닌, 죄를 단순하게 7 죄(칠죄종)로 규정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복잡한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 7가지 죄가 아닌 악의 양상(form of evil, 살전 5:22)으로 평가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런데 교회가 그 7가지를 죄로 규정했고, 그 한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성화로 판단하게 되었다. 즉 악을 죄로 규정한 오류가 있고, 그 악의 양상을 죽이는 것이 죄죽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칭의는 악과 관련하지 않고, 최초 악이 없는 상태에서 범한 죄에 대한 해결, 그리고 그 후에 악으로 말미암은 죄에 대한 해결이다. 이 죄는 모두 법정적 요인을 갖고 있다. 이신칭의는 근원적인 문제해결이지만, 근원적인 문제해결이지 않은 이중성이 있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시편 1편). 악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모습이다. 그 결과의 총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한다. 죄로 심판을 받는데, 그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악에 악을 더한 극악(極惡)은 죄로 평가되지 않을 수준으로 심각한 상태이다. 악은 심판될 내용될 내용이고, 악으로 인한 죄가 심판된 내용이다. 지금은 죄인을 심판하시지만, 마지막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죄인과 악을 심판하실 것이다.

1961년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은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 과정을 보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창안했다.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이 사전적 의미인데, “악의 평범성”이란 용어는 비기원성을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 합법적인 아이히만을 인간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2차 대전의 전범인 아이히만은 패전국의 장군이었을 뿐이다. 만약 독일이 승전했다면 아이히만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렌트는 지극히 승전국이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규정한 것이고, 승전국 지위로 전범을 규정한 아이히만을 재판했다. 인간관계에서 규정한 악이며, 그 악에 근거한 행위(유대인 학살)을 이스라엘 재판정에서 아르헨티나에 있는 사람을 체포해서 죄로 규정하고 교수형을 재판한 것이다. 인간 공동체에는 완전한 정의는 없으며, 인간에게 완전한 악은 있다. 악에 전적으로 물들지 않고 갈대처럼 사는 것이 인간인데, 성경은 악은 모양이라도 벌리라고 명령한다. 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악의 모양을 버리는 것이 더 성경적이고 실천적인 명제일 것이다. 그런데 “악의 평범성” 속에 있는 사람은 자기 행위를 절대로 악하다고 평가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양심의 소리.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해도 양심의 소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양심을 높인 독일에서 1차, 2차 대전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양심의 가치는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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