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머물고 있는 요양원 화단에는 이른 봄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서 그 꽃이 지고 나면  또 다른 꽃들이 연이어 피어나고 있다. 요즘은 나리꽃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처럼 사랑으로 가득찬 대 자연의 섭리는, 인재(人災)가 없는 한 끊임없이 이루어 진다. 꽃들도 시절을 따라 자기의 존재를  유감없이 향기로 드러낸다. 

이러한 향기는 꽃에만 있는게 아니다. 우리가 얼굴 가득히 사랑을 머금으면, 오로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활짝 웃는 웃음 꽃이 있다. 그래서 꽃의 향기가 백리를 간다면,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해서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했지 싶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은은하게 뿜어내는 크리스찬을 만나면,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평온해 진다. 말 그대로 꽃의 생명은, 벌 나비를 끌어 들이는 향에 있듯, 인간의 아름다움은 그 인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다움에 있다. 

태초에 '말씀'이라는 사랑이, 우주와 만물의 생명을 잉태했듯이, '그분의 형상'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고, 그게 바로 우리의 존재 이유다. 바울은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사랑이라 했다. 그러기에 삶에 있어서 가장 절절한 언어는 사랑의 언어다.

아침 집을 나서기 전 
식구들과 혹여 다툼이 있었나요? 
바로 화해하세요.
그리고 그 화난 얼굴로 출근했나요?
직장 동료나 어르신을 대하기 전, 
거울을 보고 얼굴 표정부터 고쳐주세요.
분이 차오르는 맘도, 
벌레를 씹은 듯한 찌푸린 얼굴도, 
다리미로 옷을 대리듯, 
'말씀의 거울'을 보며 얼굴을 활짝 펴세요.

사랑은 원래 사량(思量) 즉 '헤아리는 마음의 양'에서 비롯되었다. 중국 후한 삼국시대 때에 조조에게는 장남 조비와 넷째 조식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됨이 조식이 조비보다 위여서 신하들과 백성들로 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이를 시기한 조비(曺丕)는 아버지 조조가 죽자 바로 동생 조식(曺植)을 죽이려 하였다. 마음을 비운 조식이 형 조비에게 시 한수를 지어 형 조비의 어리석음을 나무란다.

"탄다 탄다 콩이 탄다. 콩깍지는 아궁이에서 타고 콩은 솥에서 탄다. 본시 콩과 콩깍지는 한뿌리에서 나왔거늘, 태우고 볶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급하냐!"

꼭 우리민족의 남과 북을 두고 한 예언시 인듯 싶다. 조비는 지금의 한반도처럼 사방에서 적들이 두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므로, 동생 조식을 죽일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지혜를 얻고 국난을 도모했어야 했다. 그는 하늘로부터 받은 천혜의 복을 차버린 거다. 지금 남과 북도, 상대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고, 민족애를 가지고 머리를 맞대면, 지금 서로가 짐덩이 화근덩이처럼 보이는 남북문제가, 반드시 무한대의 복덩이로 바뀌게 될 것이다.

서로의 입장과 애로는, 우리민족이 풀어야 할 과제로 끌어 안고, 서로를 이해하면서 남과 북의 난제를 풀어나간다면, 근심이 변하여 축복이 될 것이지만, 서로가 목전의 이익과 손익 계산서만 찾다 보면, 헝크러진 실타래처럼 더 꼬일 것이다. 한때 남과 북 두 정상이 오가며 화해의 여건이 되는 듯 싶더니, 이제 어렵게 합의한 것마저도 판을깨려는 듯 찬물을 끼얹고 있다.

지금 북은 6, 25전란에 대한 일말의 성찰도 없다. 전란 후 70여 성상이 지났으면, 동족상잔에 대한 회한과 성찰이 있어야 할터인데, 그러한 표징이 전혀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 맘속엔 '그럴지라도'란 도가 하나 더 생겼다. 남과 북이 70여년 동안 독자의 길을 걸어 오며, 같은 것보다 다른 것이 더 많아졌겠 지만,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 모든 불일치들을, 용서와 화해라는 용광로에 넣고,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여기 이 '그럴지라도'는 모든 분단의 이유와 근거위에 있는 최상위 개념이다.

증오와 미움은 민족의 앞날을 어둡게한다. 서로가 증오심을 몰아내고, 상대를 인정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길이 열리고 하나가 될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할 때 모든 문제가 풀린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주체'다. 사랑만이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답이다. 그러므로 사랑 이외는 길도 없고 답도 없다. 사랑의 절정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나에게 원수요 핍박자라 할지라도, 나를 연단하시려고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사랑의 매일수도 있기에,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 해서 내가 그들을 멀리한다면, 진정 우리가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과 다름이 있어야 하고, 그 다름이 용서와 사랑이다. 자신의 무지와 몰 이해로 원수가 되기도 하고 박해자가 될 수도 있다. 미워할 것은 무지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것이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하신 것이다. 원수를 미워하다 보면 부지중 원수를 닮게 된다. '탐욕에 눈이 멀었다'는 것은 탐욕때문에 분별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이 무지의 전형적인 인간이 '아합'이다. 주님이 아합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살인을 하고도 땅마저 차지하려 하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 에게나 불의한 이 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차별이 전혀 없는 사랑, 공평무사하신 주님을 닮아 
참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라는 것이다. 인종, 국적, 종교, 문화, 언어 모두를 초월하여, 모두가 아버지 품안에 있는 자녀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초대교인들이 동서양에 뿌린 말씀의 씨앗은 사랑이었다. 

지금의 서양인들을 신사의 나라니 문명인이니 하지만, 중세이전의 그들 모든 족속들은 하나같이 무지몽매한 야만인들 이었다. 그곳에 기독교가 들어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아져서, 심령의 눈이 열려 문명인이 되었다. 교회는 쓸모 없는 사람을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사회로 환원시키는 '사람을 만드는  공장'이다. 가 자기 맘에 맞는 이들하고만 맘을 연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이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여든 야든, 우든 좌든, 남이든 북이든, 나라와 민족이라는 공통 분모아래, 민족이 하나됨의 길을 찾아, 민족의 염원을 이루자!

태초에 세계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차 있던 우주를, 
사랑의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이제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혼신을 다하자!
소아를 버리고 우리의 입을 크게 열자!  
그럼으로 조물주의 하나됨의 뜻을 따라 
민족이 하나가 되자!
참으로 '선민으로 살라'고 
이 이땅을 이 민족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모든 매임으로부터 
진정한 자유함을 얻고 하나가 되리라!
바로 이 것이 
우리에게 부과된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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